생각이 출발점에서 멀어져 길을 잃었을 때, 최초에 내가 가졌던 문제의식과 내가 원했던 결론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왔던 길의 흔적을 더듬으며 찾아간 출발점에서 나는 '역사적(historic)'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무엇을 뜻해야 하는지 고민했었다. 역사의 표면으로 올라와 우리에게 알려진 사건들은 무슨 자격으로 표면에 있는 것인지, 표면 아래에서 보이지 않는 사건들은 어째서 그곳에 있어야 하는지 말이다. 교과서는 수많은 역사적 사실 중에서 '중요한' 것을 가려내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라고 말한다. 그리고 랑케와 같이 그 기준을 철저히 과거에 두는 사람들과, 반대로 콜링우드와 같이 그 기준을 철저히 현재에 두는 사람들이 있으며 E.H.카라는 사람이 이 둘의 종합을 꾀했다고 설명한다. 저 유명한 문구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과 함께.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다만 카의 관점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아니, 그렇게 단순해서는 안 된다. 과거는 말이 없다. "과거와 현재의 대화"는 현재적 입장의 일방적인 폭력으로 변질될 것이다. 이것이 역사철학자들이 카를 '현재주의' 사상가로 분류하는 이유이며, 내가 카보다 랑케의 사상에 더 관심을 갖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랑케의 역사철학은 <다시, 역사란 무엇인가>, <근세사의 여러 시기들에 관하여>에 잘 드러남. 알고보면 랑케는 카가 묘사하는 것처럼 앞뒤가 막힌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카 방식의 현재주의의 한계에 실망했기 때문이었지, 현재적 해석을 배격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칫 모순되어 보이는 실증주의와 사실주의를 어떻게 종합할 것인가가 더 큰 화두였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써둔 일기의 한 구절을 발견했다.


"책이나 글을 읽을 때에는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저자가 진리의 어느 면을 보았는지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엄밀한 의미의 '모순'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사람들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기 마련이다. 조금 다른 차원에서 보면 이들의 주장은 서로 모순을 이루지 않고도 종합될 수 있다. 그 방법 중 하나는 주장들이 위치한 '층위(level, layer)'에 주목하는 것이다. 사실 실증주의와 현재주의가 대립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이들이 모순을 이루는 주장들로 보였던 이유는 그들을 요청한 최초의 문장 속에 숨어 있다. 역사가는 역사적 사실 중에서 중요한 것을 가려 서술해야 한다는 언명 말이다. 이 언명에서 '역사 서술'이라는 지평은 '/어둠', 또는 '있음/없음'과 대응되는 '중요함/안 중요함'의 구조를 띤다. 이 때 모든 역사가는 단일한 층위에 고정되며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오는 개개의 역사적 사실들의 '불량 여부'를 확인하는 일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너무나 편협하다. 위와 같은 생각은 개개의 사건들 중 처음부터 특별한 의미가 있거나, 그런 의미를 부여받아야 하는 것들이 정해져 있다는 전제에서 비롯된다. 굳이 말하자면 일종의 영웅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사건에는 그것에 수반되는 의미가 반드시 있으며, 이 의미들은 서로 다른 '층위'에 머무른다. 예컨대 우리 집 주방 수도관이 얼었다가 다시 녹은 것은 '우리 집'이라는 미시적 층위에서는 상당히 의미 있는 사건이지만, 국가적 차원에서는 별 일이 아닌 것이다. 한편 다양한 층위에 걸쳐 의미를 행사하는 사건 또한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경제 공황이나 전쟁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이런 관점 아래 역사가의 '임무'는 단순히 중요한 사실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것에 있지 않고, 개개의 사건이 과연 어떤 층위에 머물러야 하는가를 판단하는 것에 있다. 과거에는 특정한 지역적 차원에서만 중요하게 인식된 사건을 국가적 층위에서 인정하도록 '승격'시킬 수도 있는 것이고 반대의 경우도 가능한 것이다.


한편 우리는 실증주의와 현재주의의 공존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실증주의에서 중시하는 사건들은 항상 당대를 기준으로 한다. 따라서 과거에 높은 층위에서 의미를 지니던 사건이 시간이 지날수록 낮은 층위로 내려갈 수도 있는 것이다. 반대로 현재주의가 중시하는 사건은 항상 현재를 기준으로 한다. 따라서 과거에 낮은 층위에 머물던 사건이 시간이 지나 높은 층위까지 올라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변화와 역동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이 두 관점은 모순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두 관점은 역사 서술에 있어 반드시 있어야 할 것들이다. 하나를 취하고 다른 하나를 버리는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모든 역사 서술은 현재를 위한 서술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나는 '역사적(historic)'이라는 말의 의미가 '중요/안 중요'라는 단순한 구도에서 비롯해서는 안 되고, 다양한 의미의 층위를 인정하는 지평에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20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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