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산문

시는 직관적인 글이며, 산문은 지성적인 글이다. 시에서 줄 바꿈, 각운, 음보와 같은 특성은 단지 이미지의 직관성을 살리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그것은 테크닉이다. 테크닉은 시대와 사조에 따라 바뀐다. 테크닉에는 유행이 있다. 그러나 시의 본질은 직관성에 있다. 산문에서는 문장이 문장에 종속된다. 문장이 문장을 설명한다. 물질을 다루듯이 이미지를 자르고 나누고 붙인다. 뒤에 나오는 문장이 앞에 나오는 문장에 종속된다. 산문에서 시간은 계속 지연된다. 가장 바람직한 산문은 완전히 논리적인 글이며, 가장 논리적인 글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산문은 탈시간성, 즉 완전한 타성inertion을 지향한다. 시는 우주적 지속 안에서 서로 멀리 떨어져 흐르는 이미지를 하나의 근원적 은유 속으로 응축하고 펼쳐낸다. 그것은 섬광과 같이 아주 짧은 순간에 일어난다. 서로 다른 힘과 방향으로 흐르는 흐름들을 모으고 펴낸다. 앞의 시구와 뒤의 시구는 서로에 의해 해명되지 않는다. 시는 우주적 지속에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낸다. 시의 탄생은 세계의 탄생이다. 시는 도처에 있다. 줄 바꿈과 각운, 복잡한 상징을 모아놓은 글은 시가 아닐 수 있다; 해 지는 가을 하늘은 시가 될 수 있다. 시의 외관을 흉내 낸 무시간적인 글은 시가 아니다; 길게 늘여 쓴 글이라도 그 안에 시간이 존재한다면, 이질적인 흐름이 존재한다면, 그 글이 자신만의 지속을 점유한다면 그것은 시이다. 시가 음악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늙은 궁정 음악가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에서 단 하나의 음이라도 더하거나 빼기라도 하면 그 완전함이 무너져 버리고 말 것이다. 세계의 균열을 그려내는 시에서조차 우리는 우리 마음껏 자르고 더하고 빼고 붙여도 되는 틈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산문에서 문장은 병치된다; 시에서 문장은 흐른다. 산문에서 언어는 배치된다; 시에서 언어는 펼쳐진다. 늙은 별이 우주 한 가운데에 거대한 불꽃놀이를 펼쳐내듯이.


P.S. 물론 시도 산문도 못 되는 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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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ors“The End”와 오이디푸스 신화

 

곡 길이만 장장 12분에 달하는 이 노래는 무언가에 홀린 예언자의 살풀이처럼 들린다. 도입부에서는 신비로운 분위기의 기타 리프가 네 번 반복되고 그 위에 탬버린 흔드는 소리가 얹히는데 이는 샤만의 제의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듯하다. 곡 길이가 긴 만큼 그 가사도 47행에 달한다. 처음 들었을 때는 이 가사가 어떤 하나의 이야기를 나타내고 있다고 짐작하기 힘들다. 그 자신이 시인이었던 짐 모리슨은 이 곡의 가사에 또한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시어를 수놓았다. 그럼에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안에는 일관되게 흐르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 힌트는 곡의 클라이막스이자 가장 잘 들리는 가사 “Father, yes son, I want to kill you/ Mother, I want to, murder you(32-33; 33행에 ‘murder’ 대신에 ‘fuck’이 쓰여진 판도 있다.)”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반자동적으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떠올린다. 그러나 가사 텍스트의 전반적 맥락에서 주인공 목소리가 오이디푸스적 욕망을 스스로 억누르면서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내용은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내용은 프로이트가 읽었던 오이디푸스 신화에 대한 재전유일 가능성이 있다.

가사 텍스트를 살펴보면 그것이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첫 부분은 1-9행으로 주인공 목소리가 말하는 부분이고, 둘째는 10-33행인데 여기서는 주인공 목소리와는 별개의 나레이터가 등장한다. 끝으로 34행부터 47행까지는 다시 주인공 목소리가 등장한다. 물론 실제 곡에서는 세 부분 모두 짐 모리슨이 노래하고 있다. 세 부분의 시간선에 대해서는 후에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가장 먼저 주목되는 것은 첫 부분에서 주인공 목소리가 대사를 전달하는 ‘you’가 누구일까 하는 것이다. ‘you’에 대해 주어진 정보는 다음과 같다: 그는 주인공 목소리의 ‘best friend(1)’이자 ‘only friend(2)’이며, 주인공은 그의 눈을 더 이상 보지 않을 것이다(6). 또한 43-44행에서 그는 ‘you’를 놓아주는 것이 가슴 아픈 일이며, 그러나 ‘you’는 그를 따라올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 후, 그는 ‘you’와 공유했던 ‘laughter’, soft lies’, 그들이 죽으려고 했던 수많은 밤들에 끝을 고한다(45-47).

첫 번째 가능성은 주인공 목소리와 ‘you’가 분리된 존재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 둘이 한 인간에 내재한 두 인격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 경우에는 다시 ‘you’가 이야기 속 인물인지 아니면 이야기를 초월한 인물인지가 문제된다. 그러나 가사의 맥락에서 이야기 속 청자가 따로 있다고 판단하기는 힘들다. 또한 이야기를 초월한 인물이라면 주인공 목소리가 위와 같은 구체적인 정보를 담은 대사를 할 까닭과 개연성이 떨어진다. 따라서 우리는 ‘you’가 주인공 자신이라고 보는 편이 낫겠다.

실제로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아버지 왕을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눈을 찔러 멀게 한다. 그는 아름다운 친구이자 자신의 유일한 친구인 자기 자신에게 말한다: 모든 미래의 꿈과 계획이 더 이상 쓸모 없어졌으며,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종말이 왔다; 과거 누려왔던 안전도 더 이상 없으며, 새로운 것도 없을 것이다. 이어 그는 말한다. 앞으로 무엇이 펼쳐질지 상상할 수 있는가, 제약도 없이 자유로운 미래를. 그리고 그 미래는 ‘desperate land’에서 ‘stranger’s hand’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 주인공 목소리 자신의 손을 기다리고 있다. 소포클레스의 극에 등장하는 오이디푸스는 테바이의 왕이었지만, 코린토스 태생의 유일한 이방인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그 답을 우리는 위에서 분류한 곡의 두 번째 부분에서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첫 번째 부분과는 이질적인 목소리가 등장함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주인공 목소리를 지칭하는 단어로 ‘I’가 아닌 ‘The killer’ 내지는 ‘he’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볼 수 있다. 10-19행에서 그는 고통의 광야에서 길을 잃은 채 ‘summer rain’만을 기다리는 사막의 존재로 나타난다(낙타? 아니면 선인장?). 그리고 그는 자기 안에서 낯선 목소리를 듣는다: ‘ride the king’s highway’, ‘to the ancient lake’; ‘the west is the best’, ‘the blue bus is callin’ us’. 여기서 서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암시되지 않는다. 그것은 해가 지는 곳일 수도 있고, 혹은 추방된 낙원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고대의 갤러리에서 얼굴을 가져온 후, 형제자매의 방에 들른 뒤 부모가 있는 방으로 향한다. 여기서 그가 그의 신발을 신었다는 것은 어떤 떠남을 암시하는 상징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저 세상으로의 떠남이 아니다. 오이디푸스는 그 자신이 아기일 때 버려졌던 키타이론 산으로 향했다. 주인공 목소리는 광야로 돌아갈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가사의 두 번째 부분이 첫 번째 부분에 앞서는, 과거 시점임을 알 수 있다. , 그는 소포클레스의 극에서처럼,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정사를 나눈 뒤 자신의 눈을 찌르고 무한한 자유의 광야로 나아간다. 그런데 왜 이 주인공은 적극적으로 이런 패륜의 현장으로 뛰어드는가? 그는 단지 평범한 하나의 정신병자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오이디푸스가 아폴론 신전에서 받았던 신탁, 하나의 예언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소포클레스 극의 오이디푸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절망적인 운명을 거부하고자 했다. 그가 자신의 아버지라고 생각한 코린토스의 왕을 피해 광야를 걸었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바이의 영웅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진짜 아버지는 광야에서 자신이 죽인 늙은이 라이오스였으며, 테바이의 왕비는 자신의 어머니였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피하려던 운명에서 결국 벗어나지 못하고 다만 소극적으로 그것에 굴복해야 했다.

 “The End”의 인물은 그와는 반대이다. 그에게 오이디푸스와 같은 운명이 똑같이 주어졌다고 할 때, 그는 적극적으로 그것에 맞선다. 그는 운명이 자신을 덮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던진다. 찢어질 운명이었다면 그는 먼저 자신을 찢는다. 불탈 운명이었다면 그는 먼저 자신을 불태운다. 운명이 그를 휘갈기고 내동댕이치기 전에 그는 자신을 파괴한다. , 운명아 보아라, 네가 원하던 나의 모습이 지금 여기 있다, 더 없이 비참하고 광기로 가득 찬 이 모습이! 자기파괴적 저항. 그는 마녀다.

그리고 그는 그 운명이 실은 자기 안에 있는 것임을 보았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욕망이다. 거울을 보고 그는 말한다, ‘This is the end, my only friend’, ‘I’ll never look into your eyes, again’. 그의 웃음은 이중적이다. 하나는 운명에 대한 조롱,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신에 내재된 광기의 웃음. 노래에서 39행과 40행 사이에 등장하는 긴 악기 부분에서 우리는 후자를 확인할 수 있다. <The Doors> 앨범에 실린 버전을 기준으로 8:47에서 등장하는 기타의 커팅 기법은 성행위를 묘사한 듯한 인상을 주고, 그 후 빨라지는 템포와 소리들의 충돌과 폭발 가운데 10:00에 나지막하게 ‘kill, kill, kill, kill’이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운명과 광기와 자기파괴, 그리고 욕망과 패륜, 고뇌와 갈망이 뒤섞인 폭발의 잔재 위에 그는 다시 속삭인다. ‘This is the end, my only friend, the end/ It hurts to set you free/ But you'll never follow me/ The end of laughter and soft lies/ The end of nights we tried to die/ This is the end’. 그리고 그는 무한한 자유의 광야로 발길을 옮긴다.

결국 그는 자기 자신과 싸운 셈이다. 이것을 두고 자아 분열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것은 원래 자아란 통일적이고 동질적인 하나의 고체여야 한다는 가정을 포함하고 있다. 그의 머리 속에서는 두 개의 목소리가 울린다. 두 목소리는 서로 싸우고, 서로 웃고(laughter; 45),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지어낸다(soft lies; ibid.). 그러나 그 둘은 결코 섞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내면에 꿈틀거리는 프로이트적 욕망과 그것을 억압하는 답답한 자기 자신, 결국 그것은 그를 옥죄는 하나의 운명이 된다.

그는 운명에 맞서 싸웠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가 소극적이고 무의미한 저항에 머물러 다만 운명을 수용하고 스스로를 추방자로 내몰았다면, “The End”의 주인공은 운명을 짓밟고 스스로를 파괴함으로써 결국 자유의 땅으로 나아갔다. 그는 자신의 눈을 죽였다. 그가 얻은 자유는 물론 세속의 도덕과 관습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법과 도덕과 관습의 테두리 안에서 부대끼며 만족하는 길들여진 자유가 아닌, 거칠고 고통스러운 자유이다.

그는 그 어떤 실존주의 철학보다 더 근원적인 고통에서 구르고, 근원적인 자유의 땅으로 나아가려 한다. 언제나 가장 거대한 적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부록: The End 가사]

 

This is the end, beautiful friend                                                1

This is the end, my only friend, the end

Of our elaborate plans, the end

Of everything that stands, the end

No safety or surprise, the end                                                 5

I'll never look into your eyes, again

 

Can you picture what will be, so limitless and free

Desperately in need, of some, stranger's hand

In a, desperate land

 

Lost in a Roman wilderness of pain                                          10

And all the children are insane, all the children are insane

Waiting for the summer rain, yeah

There's danger on the edge of town

Ride the King's highway, baby

Weird scenes inside the gold mine                                          15

Ride the highway west, baby

Ride the snake, ride the snake

To the lake, the ancient lake, baby

The snake is long, seven miles

 

Ride the snake, he's old, and his skin is cold                             20

The west is the best, the west is the best

Get here, and we'll do the rest

The blue bus is callin' us, the blue bus is callin' us

Driver, where you taken us

 

The killer awoke before dawn, he put his boots on                     25

He took a face from the ancient gallery

And he walked on down the hall

 

He went into the room where his sister lived, and, then he

Paid a visit to his brother, and then he

He walked on down the hall, and                                          30

And he came to a door, and he looked inside

Father, yes son, I want to kill you

Mother, I want to, murder you

 

C'mon baby, take a chance with us

C'mon baby, take a chance with us                                       35

C'mon baby, take a chance with us

 

And meet me at the back of the blue bus

Doin' a blue rock, on a blue bus

Doin' a blue rock, c'mon, yeah

Kill, kill, kill, kill, kill, kill                                                   40

This is the end, beautiful friend

 

This is the end, my only friend, the end

It hurts to set you free

But you'll never follow me

The end of laughter and soft lies                                           45

The end of nights we tried to die

This is the end


(가사 출처: http://www.lyricsfrea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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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에 대한 서유럽 근대 철학자들의 생각은 일면 단순하다. 그들은 '벗어남'으로서의 자유를 이야기했다. 한 개인이 어떠한 초월적 권위(관습, , 인간관계 등)로부터도 자신의 행위에 제약을 받지 않을 때 그 상태를 자유롭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사회계약론자들이 가정하는 모든 사람이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상태, 그들의 언어로는 '자연상태'에서는 개인들의 욕구와 의욕이 서로 충돌하거나(홉스) 아니면 아예 서로의 존재조차 모르는 채(루소) 공존한다. 그것들은 하나의 평평한 평면에 있을 뿐 그것들 ''에 있는 다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미 신을 잃어버린 그들 근대인은 인간들이 그런 절대적 자유의 상태에서 어떤 경로를 통해 지금과 같은 초월적 공권력을 만들어냈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답은 여러 가지였지만, 공통적으로 그들은 국가상태를 개인의 자유가 제약된 형태로 보았다. 특히 홉스의 통찰은 주목할 만한데, 그는 한 개인이 타인의 자유에 대해 불안과 적대감을 갖는다는 사실을 포착했다. , 모든 사람의 무제약적 자유를 동시에, 같은 정도로 제약한다면 모두의 마음 속에 (어느 정도의)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심지어 지금까지도 유효한 통찰이라 할 만하다. 실제로 우리의 관습과 법 체계는 '위험한 자유', 즉 살인, 폭력, 모욕, 사기 등을 모든 사람에 대해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발상이 극단으로 치달을 경우에 대한 대책을 그들은 마련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근대적 사고방식은 '자연'을 문제시 하고, '자유'를 적대시한다. 우리는 인공시설이 들어서지 않은 곳을 '빈 땅' 내지는 '노는 땅', 즉 일하지 않는 땅이라고 부른다. 일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정부는 인간들의 위험한 자유를 감시한다는 명목으로 완전한 치외법권에 놓이게 되었다(한 정부의 정책이 얼마나 대중의 의사와 유리되어 있는지 생각해보라). 자유를 적대시하는 태도의 극단에는 집단적 편집증이 있다. 뭐만 하려고 하면, 너 위험한 짓 하려고 하지, 너 반역하려고 하지, 너 내 등 뒤에 칼 꽂으려고 하지, 너 의무 이행은 소홀히 하고 받을 것만 챙겨가려고 하지 등등; 한 마디로, 너 빨갱이지-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그래서 잠재적으로 공동체를 위협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잘못 쓴 것이 아니다. 가능성이 두 번 포함되어 있다) 것으로 상상되는 모든 자유가 의문시되고 초월적 권위의 승인을 받고 감시를 받아야만 하게 되었다.

사회계약론자들은 국가와 개인이 계약관계라고 말했다. 개인이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 위해서는 국가가 내세우는 계약조건을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내세운 조건을 '의무'라 하고, 개인이 내세운 조건을 '권리'라 한다. 그런데, 최초로 계약을 맺은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그들의 자손, 자손의 자손들은 태어나기 전에 계약서에 지장 찍고 태어난 것도 아닌데, 그럼 이들과 국가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들은 논의의 일관성을 위해 그런 경우(실제로는 현대인들이 대부분 해당하는 경우지만) 국가와 개인 사이에 암묵적 동의가 있다고 보았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야훼와 이스라엘 민족의 관계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실제로 다수 칼뱅주의자였던 사회계약론자들은 계약이라는 모티프를 좋아했다). 성서에서 이들 사이에 적어도 두 번의 계약관계가 성립했는데, 한 번은 야훼가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헤브라이인들을 해방시켜준 대신 열 개의 계명을 내렸고(구약), 다른 한 번은 신 스스로가 모든 인간의 원죄를 대속하고 사랑이라는 새 율법을 내렸다(신약). 그렇다면 사회계약론자들은 국가를 신과 같은 위치에 놓았다는 말인가?

사실 이것은 신중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왜 국가와 신을 (적어도 이야기의 구조상) 같은 위치에 놓을 수밖에 없었을까? 여러 대답이 있겠지만 가장 유효한 답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자유가 그 만큼 소중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는 존재는 어떠한 인간적, 세속적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어서는 불합리한 것이었다. , 그들이 보기에 인간의 자유는 여전히 중요한 것이고 지켜져야 할 것이었지만, 인간의 공존상태를 해칠 수 있는 위험한 자유는 제약 받아야 할 것이었다. , 그들은 중세기 인간의 위험한 자유를 제약했던 준거가 신과 교회에 있던 것에 대비해 새로운 세기의 준거는 법과 국가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회계약자들의 나름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왜 근대국가는 지금 이 모양이 되었을까? 그것은 국가가 변방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국가가 변방을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국 춘추, 전국 시대의 정치에서 이 통찰을 구할 수 있다. 당장 <맹자>를 펼쳐서 아무 곳이나 읽어봐도 우리는 당대 왕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백성들의 여론임을 알 수 있다. 식객들을 향한 그들의 질문은 하나 같이 내 백성들이 내 나라를 떠나지 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를 맴돌고 있다. 뒤집어 피지배자의 입장에서 보면, 정치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 지배자에게 세금을 내지 않고 도망가거나 숨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현실적인 저항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 국민국가가 들어서면서, 도망자, 추방자, 이방인, 무법자의 이야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다만 그들에 대한 은유 혹은 값싼 서정적 상품만이 남았다. 예전에는 국가의 성벽을 나서는 순간 광야가 있고, 숲이 있고, 혹은 버려진 자들의 공동체가 있었다. 국가들은 이 지역을 적대국 사이의 완충지대로 인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성벽도 없는 국가의 국경을 넘어도 또 다른 국가가 등장한다. 성벽 바깥의 사람들이었을 사람들은 성벽이 없어진 도시 한 구석 슬럼에 살고 있으며, 그마저도 재개발에 밀려 해체되어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기도 하다. 많은 어린이들이 집과 가정 바깥에서는 자신이 보호받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부모의 무리한 요구도 꾹 참고 살아내는 것처럼, 국가도 변방 없는 지배체제 속에서 견제 받지 않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수 많은 원인 가운데에 자유에 대한 관념이 놓여있다. 사회계약론자들은 국가에 주목한 나머지 그들이 생각했던 자유의 긍정적 측면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베르그손의 통찰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우선 자아를 두 종류로 나눴는데, 바깥에서 주어진 관습이나 금기, 예절 등 나의 의사와 무관하게 행위로 드러나는 표층자아와, 다른 사람의 목소리와는 관계 없는 진정한 나, 즉 심층자아이다. 그는 그 심층자아와 행위와의 관계를 자유라고 보았다. 심층자아에 충실히 따른 행위는 자유로운 것이고, 도덕이나 관습, 금기, 사람들의 눈치에 떠밀려 하는 행동은 부자유이다.

우리는 자유로운 행위 아래에 놓인 것을 발견할 수 있고, 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먼저, 행위가 자유롭기 위해서는 심층자아의 욕망이나 의욕이 그 척도가 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의욕하는 바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나의 능력이 필요하다. 한편 의욕과 능력이 있어도 그것을 제지하는 외적 요인이 있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자유란 능력과 조건이 충족될 때, 내가 하고 싶은 바를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역할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된다. 공동체를 해칠 수 있는 위험한 자유는 제한하되, 그 밖의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충분히 실현시킬 수 있도록 적절한 조건을 제공하는 것이 따라와야 한다. 만약 후자를 무시할 경우, 국가는 계약을 위반한 것이고, 국민의 세금에 무임승차하는 것이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국가를 견제할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다.

 

(여기까지 쓰고, 내가 말한 내용이 헤겔의 국가철학에 흡수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래서 대부분의 철학도들이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철학자들에게 굴복하나 보다. 앞으로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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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생활에 대하여 -2015년 2월 10일 화요일


일단 가장 사소한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작년 초-중반 즈음에 5만원 정도 주고 산 회중시계가 고장났다. 요즘 시대에 소위 '빈티지'한 것을 동경하는, 그러나 생활을 그렇게 바꾸기에는 역부족인 사람들에게 이런 물건들이 그렇듯이, 처음에는 무척 마음에 들어하면서 어디를 가든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었으나, 어느 때부터인지 손에서도 마음 속에서도 점점 멀어져 나중에는 그것이 있는지조차 잊어버리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럼에도 종종 심심한 날에는 강아지 산책시키듯이 갖고 나가서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면서, 평소에는 대충 인사만 하는 사람이라도 좋으니 누구라도 마주치면 시계 자랑이나 해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품게 된다. 물론 주머니에 넣어놓고 또 다시 잊어버리는 경우가 대다수이지만.


이 시계의 외관은 영화에 나오는 로켓처럼 위쪽에는 쇠로 된 시계줄과 바로 아래에 톱니 모양으로 된 태엽이 있고, 거기서부터 반원을 그리면서 아래로 가면 그곳에 경첩이 있는 모양이다. 이에 더해 쇠로 된 껍질에는 장미꽃과 덩쿨을 미니멀라이즈해서 꾸며놓은 듯한 무늬로 투각되어 있다. 소위 예쁘장한 것들을 다루는 오프라인 매장에 있는 시계들이 하나같이 감수성이 메말라 있는, 예컨대 일반 커피 정도라면, 이것은 인터넷 여기저기를 뒤져서 찾아낸, 예컨대 'T' 무슨 커피와 같달까. 그럼에도 이 물건은 2세기만 일찍 세상에 나왔으면 신사다운 좋은 주인을 만나서 꾸준한 사랑을 받으며 제 명을 다했을 텐데, 잘못된 시대에 잘못된 주인을 만나서 그만 아기자기한 애물단지가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물건이 단지 겉치레만 화려한 속 빈 강정 같은 물건인 것은 아니다. 시계 껍데기 앞뒤를 열어서 무브먼트도 보고 손에도 쥐어보고 하면서 이모저모를 뜯어보면 그런대로 실한, 5만원짜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그런 물건이다.


참 예전 같았으면 그냥 시계가 망가졌나보다 하고 또 잊어버릴 만한 사건이지만, 도대체 몸에서 힘이 다 빠져 나가서는 시간도 공간도 감당하기 힘들어진 요즘에는 이것이 퍽이나 내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제는 고속버스를 타고 이천에서 서울로 오는데 난데없이 폭설이 쏟아져서 평소 같으면 1시간이면 족히 오는 거리를 두 시간 반이나 걸려서 왔다. 몸이 이상하게 각성되어 있어서 그 시간을 잠도 못 자고 오느라 몸도 마음도 지친 나 자신에게 나름의 보상을 주노라고 터미널에 있는 서점을 배회했다. 워낙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뻔해서인지 위층에 마련된 인문학 코너는 쭉정이 책으로 가득 차 있었고, 아래에 내려가서 시간 때우기 좋은 소설책이나 한 권 낚으면 좋겠다 싶었다. 처음에는 테스를 읽을까 하다가 지금의 몸과 마음으로는 이 내용을 감당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긴가민가 하면서 돌아다니다가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대충 서너 페이지만 읽어봤는데, 좀 만성적으로 염세적이고 우울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특유의 씁쓸한 유쾌함이 마음에 들어서 얼른 계산대로 향했다. 그래놓고 이 책도 지금은 방 바닥을 뒹구는 종이뭉치가 되어 있지만, 오며가며 몇 페이지씩 읽고 있노라면, 때로 바보같은 일을 벌이는 나 자신을 두고 헛웃음을 지을 때처럼 기분이 묘하게 괜찮아지는 효과가 있다.


운동을 또 안 해서 허리가 좀 쿡쿡 쑤시면서 아픈데, 허리를 쉬이면서 침대에 누워서는 '좀 언해피한 사람들만 사는 동네에 가서 어울리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사소한 지적일지는 모르나, 불행한 것과 언해피한 것은 다르다. 나는 불행한 사람들 사이에선 별로 살고 싶지 않다. 보들레르의 보들보들한 글을 읽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언해피한 사람들은 무기력한 가운데서도 기상천외하고 괴이한, 그러나 심히 유쾌하고 재밌는 일들을 벌이면서 골치거리를 만들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한다. 사회규범은 때로 너무 엄숙주의적이어서 재미가 없다. 남의 사정에는 전혀 관심도 애정도 없으면서 다짜고짜 판단부터 하고 훈수부터 두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탓이다.


최근 나의 생활은 마치 해면 같다. 그래도 해면은 물에서 건져서 가공하면 그릇 닦는 데에는 쓸 수 있다지만 나는 과연 뭘 할 수 있을까 싶다. 물론 사회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애초에 접었지만 말이다. 나는 내가 죽고난 다음에 사람들이 내 말과 글을 기억해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것이다. 관에 갇혀서 지하에서 웃을지 아니면 귀신이 돼서 공중에서 껄껄 웃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내가 봐도 나름 괜찮은 사유를 하면서 사는 것 같이 보이긴 해도 이걸 어떻게 글로 써낼 것이며, 또 논리와 증명을 금과옥조로 떠받드는 아카데미즘 속에서 이걸 어떻게 설득시킬 것인지는 정말 막막하다. 이런 고민은 솔직히 좀 쓸데 없는 것 같지만, 불행히도 오늘 '인문학자양성세미나'라는, 한 학기 동안 20-25쪽 분량의 논문을 써내는 수업의 수강신청에 성공함으로써 일말의 쓸모가 생겼다.


지난 학기를 끝마치면서 나는 한 가지 다짐을 한 것이 있는데, 시적인 산문을 쓰고 싶다는 나의 오래된 소망을 묻어둘 것이 아니라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자는 것이다. 도대체 대학에서 요구하는 보고서나 독후감 따위의 글들조차 숨 쉴 틈도 없이 꽉꽉 막혀서 이렇게 답답하면 나중에는 어떻게 글로 벌어먹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오히려 내 욕망을 억누르기만 하면 사태는 점점 더 안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솔직히 내가 내 글에 대해서는 일말의 자부심을 갖고 블로그에도 올리고는 있지만, 그것도 며칠만 지나서 다시 보면 도대체 이게 내 글인가 싶을 정도로 낯선 느낌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도서관에서 우연히 옥타비오 파스의 '활과 리라'라는 책을 발견한 뒤로 거진 서너 달 동안을 갈등한 뒤에 내린 결론이다. 특히 그 책의 1장 '시와 시편'은 읽고 있노라면 황홀해질 정도로 문장이 시적이고 아름다운데, 지금 내가 이런 문장을 써냈다가는 그 어느 누구의 칭찬은커녕 온갖 훈수와 비난만 받으리라는 생각에 아찔해졌었다. 그러나 고민한 기간이 상대적으로 길어서 그렇지, 대부분의 실존적인 고민이 그렇듯 결론은 '본래의 나 자신이 되어라'였다.


그러면서 내 나름대로 진행하고 있던 생각정리 프로젝트를 폐기하고 새로운 것을 시작했다. 당초의 주제는 그대로 유지하지만, 글의 스타일을 '혁신적으로' 뒤집은 것이다. 괜히 쩔쩔 매면서 있지도 않은 청자를 설득하려고 진땀을 뻘뻘 흘리면서 궤변이나 늘어놓느니, 차라리 '나를 이해할 테면 이해해 보시지'라는 고고한 태도로 일관하는 것이 속 편한 일인 것 같다. 어릴 적의 내가,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시를 동경했던 이유는 지금 와서 생각해 보건대 정말 단순한 것이었다. 산문으로 쓴 다른 글들은 내가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기 위해 분투하고, 그것에 실패할 경우에는 따끔한 질타를 감내해야 하지만, 시는 (모두까기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오히려 다른 사람이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분투한다. 내가 워낙에 자존심이 강해서인지 아니면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해서인지 (혹은 둘 다인지), 나는 시가 좋았다. 물론 윤동주나 한용운의 시가 가진 아름다움과 간결함, 조지훈의 시에서 엿보이는 고즈넉한 초가을의 달빛 같은 분위기가 좋은 것도 있지만, 이건 누구나 시에 대해 느낄 법한 것이기에 제외하고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적어도 시에 대해서는 나는 속물은 아니다.


이런 측면에 한정해서 볼 때, 돌이켜보면 계절학기를 들은 것이 나름 악수였던 것 같다. 종교개혁사라는 이름을 걸어놓고 서양 중세-근대 초기의 정치사와 정신사를 아울러서 3주 동안 폭풍같이 고찰했던 수업이었는데, 배운 것도 굉장히 많고 사유의 폭도 전보다 많이 넓고 깊어졌지만, 힘을 다 뺐다. 이 상태로 할아버지 상 때문에 일주일간 부모님 일을 대타로 처리하고, 또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가야 하니 참 기운이 나려다가도 싹 없어진다.  내가 고등학교 입학한 이후로 집에서 나와 산지 벌써 6년을 채웠는데, 집에만 가면 우울하고 무기력해서 '집'에 있는 것 같지가 않다. 그렇다고 엄마한테 이런 걸 말할 수도 없고. 부모 마음이 자식은 매일 봐도 또 보고 싶은 것 아니겠나 싶어서 말은 안 하고 있지만, 다른 것 다 제치고 집에 가는 게 나는 제일 부담스럽다.


집 하니까 떠오른 건데, 나는 누가 나 자신을 한 단어로 표현하라고 하면 주저함 없이 '이방인'이라고 말할 것이다. 아니면 '떠돌이'나. 한 단어를 더 허여해 준다면 겉멋 좀 부려서 '당신들의 이방인'이라고 해야지. 어디에도 편하게 속하지를 못하고 꼭 혼자 다니거나 나랑 비슷한 몇 명이랑만 다녀야 직성이 풀리는 게, 일부는 천성인가 싶어도 또 '집' 없이 산 세월이 너무 중요하고(나의 성장기와 일치했으니), 막대해서 어쩔 수 없구나 싶다. 따져보면 대부분이 그렇다. 중학교 때도 또래와 어울리지 않았고, 고등학교에서는 나랑 비슷한 애들이 많아서 낫다 싶지만 여전히 주류 집단에는 속하지 않았다. 대학교에 와서는 과 생활이라는 것은 완전히 남 얘기이며, 동아리에 들어가서도 1년을 못 버티고 나와서 산다. 남들이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렇다. 사람들 틈에 껴서 마음 편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까뮈의 '이방인'은 읽어보지 않았다. 모든 책과 사상을 다이제스트로 가르치는 한국 교육에서 자라난 탓에 내용은 대충 알고 있지만, 왠지 읽어볼 엄두가 안 난다. 한편으로는 이방인이라는 공통의 정체성 뒤에 숨겨진 막대한 차이 때문에, 까뮈에게 압도되어 나 자신을 잃을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내가 작품에 너무 몰입해서 어느 날 구금 이하의 형을 받을만한 짓을 벌일까 두렵기도 하다. 물론 주된 이유는 귀찮음이지만.


어쨌든 도대체가 요즘은 생산적인 일은 하나도 못하겠다. 또 게임이나 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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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계절

태양을 견디기가 힘들다. 요즈음의 태양은 쇠퇴한 왕국의 왕좌처럼 덩그러니 하릴 없이 떠 있다. 빛은 쇠약해서 그것이 비추는 모든 것들이 다만 허여멀건 어중간한 색채를 걸치고 있어서, 그 어떤 대단한 것도 이 태양빛 아래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모든 강렬한 것들이 떠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그저 허여멀건 일상뿐. 생활도 삶도 충만하게 채워지지 않은 일상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를 품고 있기에 나를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것일까? 비스듬이 기운 황혼녘의 빛. '이 땅의 빛은 예술을 하기에 적당하지 않아.'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 날개를 편다더니, 황혼빛이 비출 때 모든 의미를 탈각하고 심연 속으로 전락하는 세계에서 비로소 사유가 시작한다는 것인가, 라고 쓰고 지운다. 의욕이 없다. 어쩌면 2월이란 모든 강렬한 것들이 지나가고 남겨진 계절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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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대하여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뭘까? 최근의 결론은 이렇다: 나는 상상에 대해 생각하고, 세계에 대해 생각하고, 이데올로기에 대해, 자본주의에 대해, 생명에 대해, 실존에 대해 생각한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나에게 낯선 것이기 때문에 나는 계속 생각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는 다시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내 바깥에 있는 것과 내 안에 있는 것. 예컨대, 이데올로기, 자본주의, 철학, 사유, 생명, 올바름, 예의, 인간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내가 그것에 익숙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상상, 세계, 은유, 기억, 과거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내가 특히 단짝을 만난 이후 그것을 내 안에서 '발견'하였고(물론 그에게서도 발견하였고), 그것을 정당화하거나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이다. 어쨌든 나는 이것들 안에 푹 빠져서 스스로의 상태를 자각하지 않는 그런 익숙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첫째, 내 밖에 있는 것들에 대해 사유함으로써 나는 무엇에 이르고자 하는가? 나는 도덕과 예의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사실 내가 그것에 대해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한 것도 아니고, 그것에 대한 글을 읽지 못하고 자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할 때, 내 요구를 말할 때, 그들의 요구를 승낙하거나 특히 거절할 때 등 그것을 행하는 방식에 대해 꽤 많은 시간을 먼저 생각하고, 내게 허락된 혹은 내가 스스로에게 허락한 시간을 끝까지 고민하는 데에 쓴 다음 여전히 확신이 없는 채로 그것을 한다. 그 동안 내 머릿속은 내가 혹시 잘못된 방식을 따르거나 미처 단속하지 못한 실수를 흘려서 상대가 나를 나쁘게 생각하거나 오해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무게감으로 가득 차 있다. 지금까지 살면서 물론 숱한 실수와 오해를 남겨왔지만, 여전히 그것은 익숙하지 못하다. 실수를 하는 것은 괜찮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잘 수습하는 일이라는 말도 많이 듣고 그런 생각을 많이 하긴 하지만 여전히 나를 지배하는 것은 두려움과 부끄러움이다. 어쩌면 나의 정신이 그렇게 미안함과 죄책감, 절망을 앞당겨 겪음으로써, 내가 우려한 것보다는 나은 결과에 대해 안도하려는 성향에 '중독'된 것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이건 습관이니까.


결과적으로 그런 우려들이 나중에 무의미한 것으로 드러나더라도, 그런 상상적 재앙에 괴로워하는 순간은 없던 것이 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나는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행위의 '프로토콜'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것에 따르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문제는, 많은 경우 그렇듯이 모든 사람에게, 또 모든 상황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양식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의범절'의 모든 디테일을 따로따로 배우거나 모방하는 것도 골치 아픈 일이다. 스스로 따르기로 결정하지 않은 사회의 구조적인 행동양식에 따라야 하는 상황을 원체 싫어하고 그것을 억압이라 여기는 이유도 있다. 예컨대 윗사람에게 술 따르는 법에 대해 들을 때 내 머릿속에 지나가는 생각은 오직 '내가 왜?' 이 한 마디 뿐이다. 애초에 윗사람에게 술을 한 잔 따르는 것을 영광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관습도 이해 가지 않을 뿐더러, 술병 라벨을 가린다고 해서 나의 존경하는 마음이 더 잘 드러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는 나 같은 사람을 일러 '노답'이라고 한다.) 물론 이런 경우는 극단적인 케이스에 속하기는 한다. 일반적인 경우 나는 사회적 프로토콜에 따르려고 하지만, 단, 나 자신의 윤리적 기준에 비추어 부합하는 것은 따르고 아닌 것은 나름대로 변형해서 수용한다. 진짜 문제는 여기에 있다. 나 자신은 나의 기준에 따른다고 하더라도, 나의 행위를 대하는 상대는 이미 한국 사회의 관습에 익숙해져 있지 않을까? 굳이 한국 사회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회나 혹은 그 자신만의 기준이 있을 테다. 이 점이 참 많은 상념을 낳는다. 만약 내가 사회적 프로토콜을 그대로 따른다면 나쁜 인상을 줄 가능성은 낮지만 혹시 나 같은 사람에게 그렇게 한다면 그 사람은 나의 행동이 너무 과하거나 소략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또 내가 나의 기준을 적용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고전을 많이 읽어서 그런가 모르겠지만, 도덕과 예의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렇다: 물론 사소한 단어 선택이나 표현 등은 오해의 소지를 줄 수 있으니 관습에 비추어 충분히 단속해야겠지만, 예의의 큰 줄기는 나의 마음을 진실되게 표현하는 데에 있다. 특히 윗사람을 대할 때에 사람들은 그 사람의 비위에 거스르지 않기만 한다면 어떤 양식이든 예의에 부합한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아첨에 지나지 않는다. 윗사람과의 관계 역시 인간관계인 이상 언제나 서로 마음에 들 수만은 없다. 윗사람과 싸우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 역시 인간관계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이기에, 예의는 차라리 표현을 완곡하게 하는 데에 있는 것이지 내 마음을 감춰버리는 데에 있는 것은 아니다.


아, 노답이다.


혹은 자본주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나중에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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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대하여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단적으로 말해 '틀린' 질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제기되어서는 안 될 질문이라든가, 혹은 논의를 나쁜 쪽으로 몰아가는 질문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우리말에서 '틀리다'는 것은 어긋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뒤틀리다', '수틀리다' 혹은 '비틀다' 등에 그 뜻이 남아 있다.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사태의 질서와 어긋난 질문이라는 것이다. 무슨 사태를 말하는가? 내가 철학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나는 문학이나 역사학 혹은 경제학, 사회학과는 구분되는 분과학문으로서의 철학을 의미하는 것일 테다. 이 암시는 철학과 여타 학문 간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보아, 철학은 일차적으로 철학적 글이며, 이는 다른 학문 역시 마찬가지이다. 철학이란 '글'이 취할 수 있는 여러 속성 가운데 하나가 극대화된 형태를 말한다. 그렇다면 다시, "글이란 무엇인가?"를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틀린 질문이다. 왜냐하면 글 자체의 속성을 말하는 것으로는 어떠한 삶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관심은 글을 읽고 쓰는 것이니, 이렇게 고쳐 물을 수 있겠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은 (나에게) 무엇인가?"


시험 공부를 하다가 문득 나는, 마치 이상이 <권태>에서 지천이 다 초록으로 가득 찬 광경을 보고 경악하였듯이, 내 대부분의 시간과 활동이 글자로 가득 차 있음에 놀랐다. 수업 텍스트를 읽다가 다른 책을 읽다가 인터넷을 보다가 다시 텍스트를 읽는 이 순환 속에서 나는 글자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나는 오직 글자들이 뛰노는 환경에서 자라 지금에 이르렀다(물론 초딩 때는 거의 책을 읽진 않았지만, 지식에 대한 호기심은 참 많았다). 그리고 앞으로 철학이든 무엇이든 연구를 하는 사람이 된다면, 나의 인생은 마치 막걸리집 벽지와 같이 온갖 글자로 가득찬 무엇이 될 것이다. 만약 여기서 어떤 유의미한 것을 끌어올리지 못한다면, 수십 년 뒤의 나의 지적 삶은 거세된 양말처럼 되어버리지는 않을까? (소름 끼치는 일이다.)


본래 철학책을 읽던 목적 가운데 하나가 지식을 늘리는 일에 있었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돌이켜 보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세계에 대한 기존의 탐구를 흡수하면 나 또한 분명한 시각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간 읽었던 수많은 글 가운데 나에게 꼭 맞는 옷과 같은 글은 정말 몇 개 없었다. 그나마도 한때의 탐구거리로 머무는 경우도 많았다. 어쩌면 모든 관점과 체취를 지운 '초월적'인 지식이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에 그 시간들이 지탱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성급한 결론은, 각자의 관점에서, 각자의 상상에서 자유로운 철학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나의 지성이 어떤 하나의 철학 안에 포섭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또 그러고 싶은 욕망은 오직 '생각하지 않는 편안함'에 안주하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어쨌든 근래에 나는 오직 나의 삶에서 시작하는 사유만이 고유하고 또 (나에게) 유효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한편, 이런 생각이 어렴풋이 들던 무렵인 지난 학기부터 나는 철학자들의 글을 보면서, 그들이 그들만의 현실에 어떤 태도로 접근하는지를 유심히 보기 시작하였다. 개중에는 정말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문제에 대한 고뇌부터, 사회와 세계에 대한 (때로는 과도한) 고민까지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었다. (딱히 멜랑콜리하거나 실존주의적이지 않은 나에게 후자의 글들은 일종의 위안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나는 논리라는 것이 실은 자신의 고유한 고뇌와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을 하였다. 시적인 글을 쓰고 싶어했던 나의 오랜 소망과 철학의 엄격한 논리가 충돌했던 그간의 갈등이 해소되는 것 같았다.


방법! 다시 글의 문제로 돌아가자. 나는 시도 좋아하고 소설도, 희곡도 읽는 것을 좋아한다. 또 역사책을 손에 들면 아직도 설레고,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물리학이나 생물 책을 읽기도 한다. '글'의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이 모두 뿌리에서 같듯, 방법의 차이는 그 갈라지는 줄기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여전히 그 길들 사이에는 뚜렷한 구분이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위대한 글들은 특히 시와 논리 사이에 구분이 없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글이 담는 생각이며, 방법은 그 내용에 꼭 맞는 길을 택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그것이 시이든 철학이든, 남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현실과 그 사람의 상상과 그 사람의 목소리를 읽는다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해, 시는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소설은 이야기를 전달하며, 철학은 세계를 탐구한다는 식의 낡은 구분은 무너지는 것이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분명해졌다. 나는 나만의 현실에서 겪는 문제들을 내 고유한 방식으로 풀어가면 되는 것이다. 나의 글은 그 기록이 될 것이며, 또한 잠언이 되고, 예언이 될 것이다. 글투가 굳이 애써 진지해지지 않아도 되고 또 논리가 애써 엄밀하지 않아도 된다. 은유를 써도 되고, 상징을 써도 된다. 때론 이야기를 풀어 써도 괜찮다. 나는 부족하지 않다. 누군가 나에게 논리와 엄숙을 강요하는 자에겐 아침처럼 상쾌한 비웃음을 선사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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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 때리고 있는데 갑자기, 이데올로기의 재생산과 바이러스의 일생 주기가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점을 깨닫고 소름이 돋았다.

1.
바이러스의 일생. 특히 HIV 같은 바이러스는 숙주 세포에 침투한 뒤, 숙주의 DNA에 자기 유전 정보를 끼워넣어서 숙주가 DNA를 복제할 때 자신의 유전 정보도 함께 복제되도록 한다. 이 때, 숙주 세포의 생명활동에는 지장이 없다. 그러다가 일정 자극이 주어지면 숙주 세포를 깨고 나와 다른 세포를 감염시킨다.

2.
이데올로기의 활동. 알튀세르의 통찰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가족, 학교, 미디어, 종교, 사법, 정치 등을 통해 개인의 내부로 침투한다. 그 가운데 그가 강조하는 것은 가족, 학교, 종교를 통한 이데올로기이다.

내 개인적인 경험에 따르면, 학교에서는 특히 어린 아이들을 두고 질서에 따르는 법, 다른 사람들과 문제 없이 지내는 법 등을 가르치면서(이것은 긍정적인 면일 것이다), 동시에 '숫자로 불리는 법'을 가르친다. 즉, 학교에서 나는 고유한 나가 아니며 오직 '1학년 3반 30번'이라든지 '도서부 부원 A' 같은 식으로만 식별된다. 잘 안 와닿으면, 행정실에서 과연 나를 이름으로 식별하는지 반 번호로 식별하는지 생각해보면 될 것 같다. 또한 시험 결과(점수나 등수)를 통해 나를 파악하려는 시도를 많이 경험할 수 있다. 초등학생 때 한 번은 수업에서 출석을 부르는 선생님한테 나를 번호로 부르지 말고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다가 혼쭐이 난 적이 있다. 학교는 그런 곳이다.

이것은 급식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고, 다른 모든 집단적 활동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대체 가능한 '자원' 내지는 '물건'으로 파악하는 시선에 익숙해지다 보면, 스스로도 자신의 고유한 특성이나 성격, 자질 같은 것에 관심이 없어진다. 이런 맹목적인 평등주의 속에서 살다보면, 어느 순간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것도 나보다 잘난 것도 없어 보이는 누군가가 선생님의 주목을 받는다든지, 혹은 다른 일로 '튀게' 되는 경우에 이상한 분노가 생긴다. 왜 나는 인정받지 못하지! 이런 상황에서 자신도 돋보이고 싶어서 더 노력을 한다면 그나마 나은 경우겠지만, 반대로 튀는 사람을 찍어눌러서 평등한 '우리'와 같게 만든다면, 그것이야말로 이데올로기적인 결과인 것이다.

이것을 두고 전적으로 인간의 '본성'의 악함을 탓할 수 있을까? 그 나쁜 짓을 한 아이들도 알고 보면 심성이 곱고 칭찬 한 번에 신이 나서 열의를 보인다. 그렇다면 순간의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미숙함이 문제일까?  사실 이런 질문이 문제다. 모든 것을 개인의 탓으로 돌려버리는 사고방식! 만약 그렇다면 이런 일들은 거의 모든 곳에서 동등한 빈도로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학교폭력의 경우만 보더라도, 전국적으로 빈도의 편차가 크다. 구조의 문제를 덮어두고 개인의 탓만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인데, 여기서의 구조는 바로 평등주의 이데올로기, 혹은 사람에 대한 양적 환원주의이다.

3.
학교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이데올로기도 마찬가지다. 당장 학교 앞에 '예수천국 불신지옥' 피켓 들고 계신 분들만 보아도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다. 문제는 경제적인 이데올로기,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지금의 관심이 아니므로 미뤄두고, 이데올로기들이 어떻게 활동하는지 보자.

나의 생각은 이렇다: 이데올로기는 사람의 행동 자체를 바꾸지 않고, 대신 그 행동의 동기motive를 바꿔놓는다.

솔직히 초중딩들끼리 싸우고 때리는 것은 과거로부터 있어왔다. 그런데 왜 최근에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된 것일까? 지금의 어른들은 회고하기를, 예전에는 싸우는 애들끼리만 싸우고 자기들끼리 서열을 세우는 것에 관심이 있었지, 지금처럼 약한 애들, 튀는 애들을 괴롭히는 데 관심이 있지 않았다고 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폭력의 동기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말하자면, 저 친구가 나보다 낮은 서열에 있으면서도 내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에 응징하는 것이었다면(이것도 충분히 나쁘기는 하다), 요즘은 저 친구가 동질적인 '우리'에 섞이지 않기 때문에 때리는 것이다.

나도 학교 다닐 때 뒤통수 맞아 봤는데(literally), 생각해 보면 그 이유는 후자보다는 전자에 가까웠다. (싸움에 관심 없는 모든 사람은 그들에게 아웃카스트out-Caste 이다. 흔한 말로 불가촉천민. 천민은 아닌데...) 내가 아무리 학교에서 이상한 짓하면서 다니고 외떨어진 무리에서 놀아도, 말로 괴롭힘 당한 적은 있어도 맞고 다니진 않았다.

어쨌든, 흠흠, 이렇게 사람들의 행위의 동기가 이데올로기에 물들면, 어느 순간에는 마치 레트로 바이러스가 숙주 세포를 깨고 나오듯, 전에는 관찰할 수 없던 이상현상들이 발생하게 된다. 예컨대 병역 기피자에 대한 사람들의 비난 같은 것이 그렇다. 양측의 입장 모두 이해는 할 수 있지만, 특히 비난하는 사람들의 논리의 부실함이나 얕은 분노, 원한심 같은 것은 좀 지나친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들의 논리를 보면, 의무와 권리는 대칭이 되어야 한다든지, 너가 나고자란 평화의 시간들은 모두 누군가 군복무를 했기 때문에 있었다든지, 특히 외국으로 날은 사람들에게는 겁쟁이, 도망자의 호칭을 부여한다든지 등등... 몇 가지 패턴으로 압축될 수 있다.

이것은 사람들의 사고 수준이 저급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반성 없이 타인의 목소리를 흉내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북한,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이 호시탐탐 우리나라를 노리고 있다는 식의 말을 하는 사람들이 한국 군대가 그들을 모두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희망한다.) 여기까지는 양반이다. 다음 단계가 남아 있다.

그것은 알튀세르가 지적한 바: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주체로 호명한다.

이제 이들은 자신이 품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비판받았을 때, 스스로 논리를 만들어 대응하거나, 직접 행동으로써 스스로를 증명한다. 기독교 단체가 하는 활동을 비판했더니 성경에 없는 내용을 근거로 대응하는 사람이나, 정부 정책을 비판했더니 이상한 통계를 들고 나오는 사람들 등등을 이런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단지 이데올로기에 '감염'되어 있을 때는 조용한 (그러나 고유한 얼굴이 지워진) '개인'이던 사람들이, 어떤 자극을 받으면 스스로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며 '주체'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근래에 이슈 되고 있는 일베나 어버이연합, 또 최근에 사제폭탄을 제조했던 19살 누구 등등... 이전 시대에는 인종주의 테러단체, 혹은 서북청년단, 혹은 (문화혁명기의) 홍위병, 마녀사냥에 앞장 섰던 하급 사제 등등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이와 관련한 기사: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1341)

이들은 스스로 정당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이데올로기의 호명을 받아 홀린 사람들처럼 일제히 박수치고 또 요동친다. 그것은 다른 누구의 비판으로써 무너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활동하는 그들의 뒤에는 활동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4.
뭐 대한민국 군대가 없으면 우리는 벌써 사회주의에 점령되어서 평생 조모임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논리는 우습다 쳐도, 팩트와 논리로 무장한 사람들은 좀 고급화된 형태에 속한다. 위 기사를 보면, 이들의 주 동기 중 하나는 무임승차에 대한 분노이다.

솔직히 무임승차에 대한 분노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가지는 도덕감정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도덕감정이 적용될 수 있는 곳이 있고 아닌 곳이 있는데, 그들에게는 이런 구분조차 흐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복지 문제의 경우, 정말로 무임승차 하는 사람을 그렇게 못하게 해야 하는 것이지 복지를 없앤다고 되는 문제는 아니다. 군 문제의 경우, 멀쩡한 사람이 안 가는 것을 막아야 하는 문제지, 군에 부적합한 사람까지 다 집어넣는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고보니, 한 세대 전만 해도 지금처럼 현역 입대율이 95%에 이르는 이상한 사태는 없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자연스러운 도덕감정이 부적절한 곳에 사용되었을 때 일어나는 참사를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는 말이다. 평등에 대한 관념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많을 때 줄 서고 세치기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점수로 줄세워지고, 고유한 이름이 지워지는 식의 평등주의는 옳지 않다. 점수로는 세치기를 못하니까 괜찮다는 논리인가?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가 필요하지 않은 것을 숙고하지 않고 사거나 먹고난 다음에 오는 불만족스러운 기분이 싫어서 돈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돈을 아껴서 자본을 축적해야 미래를 대비할 수 있다는 식의 설교를 늘어놓는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돈이 있어도 쓰고 싶어도 안 쓰고 꽁꽁 싸맨 다음, 무덤에 갖고 가지도 못할 그 돈에 매여 산다.


5.
이것이 사람다운 삶인가? 이것이 세상을 사람 살 만하게 만드는가? 이데올로기는 이미 우리 안에 있다. 그것이 잠복하고 있건 아니면 이미 활동하고 있건 간에 누구든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알튀세르의 한계는 그 극복 가능성을 차단한 데에 있다. 사실 나조차도 어떻게 이것을 극복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스스로의 행동 동기를 잘 반성하지 않는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데올로기의 투사(鬪士)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당장에, 높은 성적을 거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으로 이 대학에 입학한 이유가 무엇인가, 왜 돈을 더 벌고 싶은가, 왜 저항하면 안되는가 등의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공부하지 말라, 돈 벌지 말라, 순응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 동기를 잘 성찰하라는 것이다. 10년 뒤에, 아니 그보다 더 뒤일지도 모르는 그 어느 때에 나 자신이 추한 무리에 속해있고 싶지 않다면, 생각해야 할 것이다.


모든 고귀한 것은 드물고 또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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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부터 헤브라이즘을 거쳐 현대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서양 사상(이 글에서 사상이라는 단어는 예술, 철학, 종교를 가리킨다; 헤겔의 절대정신)의 일관된 주제를 꼽으라면 하나는 고독한 주체의 철학이고(여기서 주체는 주체 일반이 아니라 "고독한" 주체를 가리킨다. 프랑스 철학자였다면 "대문자 주체"라고 표현했을 테다), 다른 하나는 상실과 회복의 역사일 것이다. 이것이 서양 사상의 주된 흐름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상당히 비역사적이다. 과연 3000년이 넘는 서양 사상의 역사 내내 같은 주제가 되풀이되기만 했다는 것인가? 오히려 이러한 주제들은 어떠한 실체화된 것이라기보다도, 서양 사상들의 수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희미하게나마 역사를 통틀어 공통적으로 보이는 경향성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러한 경향성이 서양의 모든 사상을 지배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거기에는 주류에 반대하는, 은밀한, 억압된, 그러나 면면히 이어져온 또다른 전통이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그것에 대해 스케치해 보려고 한다.


§ 고독한 주체의 철학

서양 사상의 주체는 고독하다. 먼저 자기가 바로 선 다음에야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 한다. 달리 말하면, 타인과 함께 함으로써 자신을 세우려 들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라는 모티프는 굉장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대화라는 것은 이미 스스로 선 주체들끼리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에게 논파당하는 것에 괴로워하는 이유는, 그들이 바로 그렇게 세워놓은 자신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고르기아스』 편에서 등장하는 바, 소크라테스에게 논파당한 자는 논리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동원하여 자신을 지키려는 몸부림을 보인다. 정의가 강한 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시마코스의 말을 부정하면서, 진리를 강한 자인 자신의 편으로 끌어온다. 그러나 예컨대 선문답에서 스님들은 결코 논파하거나 논파당하지도 않을 뿐더러 자신이 무너지는 것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말'이 무너지는 것과 '자신'이 무너지는 것을 구분한다) 그것은 서양의 주체가 바로 고독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종교에서 그들은 원칙적으로 '혼자' 신과 대면한다.  제도적으로는 평신도가 랍비나 신부를 통해 신과 만나지만, 그들이 눈을 감고 기도할 때, 그리고 특히 루터 이후 성경을 정독할 때 그들은 홀로 신과 마주한다. "신 앞에 선 단독자"다. 또한 기독교에서는 종교적 결단을 중시한다. 개인의 윤리를, 사회의 도덕을 뒤로 하고 신의 말씀을 첫째로 따를 결단을 요구한다. 예컨대 아브라함은 늦게 얻은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는 신의 음성을 듣고는 고뇌 끝에 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 때 신이 아들 대신 염소를 제물로 바치게 하였다.


16.말씀하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내 자신으로 말미암아 맹세하노니 네가 이 일을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 즉 17.내가 네게 정녕 복을 주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들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하리니 네 자손이 그 원수들의 성물을 차지하리라 18.또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백성이 복을 얻으리니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한 연고니라 하셨다 하니라


『창세기』 22장 16-18절.


이렇게 성경에 나타난 종교적 주체는 모든 것을 물리치고 신의 음성과 자신, 이렇게 둘만을 마주세운다. 한편 예수는 어떠한가? 그 또한 고독한 영웅이 아니던가. 다른 모든 비극의 영웅들도 그렇다. 가장 주체적인 인물들이 가장 고독하며 가장 비장하고 가장 비극적이다. '진리'을 자처하였지만 '진실'과 마주서게 된 오이디푸스, 인륜성을 대표하며 차가운 법과 마주선 안티고네, 불의를 상징하는 클로디어스에게 복수하려는 햄릿, 적극적으로 모비 딕에게 모든 악을 부여한 뒤 그와 맞서는 에이해브 선장 등.


§ 상실과 회복의 역사

플라톤; 영혼은 육체와 결합하기 이전에 완전한 원본의 세계인 이데아 계에 있었다. 그러나 육체로 전락하면서 망각의 강 레테를 건넌다. 육체에 갇힌 영혼은 본래의 모습을 찾기 위해 기억 속 희미하게 남아 있는 이데아를 회복하기 위해 분투한다(aletheia). 영혼이 육체를 탈옥하는 방법은 아름다움을 획득하는 것(eros)이다. 그리고 로고스를 사용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것, 이데아 중의 이데아는 선의 이데아 -여기서 진, 선, 미는 하나가 된다.


기독교; 낙원에 살던 최초의 인간은 선악과를 먹은 뒤(선악과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든), 낙원에서 추방당한다. 그의 자손들은 고통의 삶을 살며 죄의 값을 치룬다(cf. 현세를 지옥으로 보는 단테). 신의 아들이 나타나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 죽는다. 되찾은 낙원을 다시 얻기 위해 종교적 결단이 요구된다.


루소; 이제 그 낙원이 '자연'이라는 개념으로 내려온다. Nature는 자연이면서 동시에 본성이다. 최초의 상태이다. 가장 완전한 자연상태, 그러나 문명에 의해 파괴된 자연상태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바로 계몽이다.


마르크스; 자연상태의 이름을 '원시 공산제'라고 부른다. 자연상태를 파괴한 문명의 이름을 '사유재산'이라고 부른다. 사유재산을 극복하는 방법을 혁명이라 부른다. 그러나 자연상태가 몰락하는 원인arche에 대한 설명이 신비주의적이기 때문에 그 실천강령telos 또한 불명확하다. '혁명'이라는 단어는 어떤 것도 가리키지 않는다.


헤겔; 정신이 스스로를 상실한 뒤 다시 돌아가는 과정. 그것이 절대정신이며, 예술, 종교, 철학이다. 각각 미, 선, 진에 대응한다. 플라톤의 변주.


§ 은밀한 전통

상실과 회복은 아르케와 텔로스다. 아르케는 과거의 끝이고, 텔로스는 미래의 끝이다. 시간의 양 극단이다. 스피노자는 그 끝을 절단한다. "인간은 원인을 모르는 채 태어났다"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원인자로서의 아르케의 부정, "그들은 언제나 이루어진 것의 목적원인만을 알려고 한다"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목적으로서의 텔로스의 부정. 아르케와 텔로스가 부정된 그곳에는 평범한 원인과 평범한 목적이 남는다. 아르케와 텔로스는 어떤 것의 실제 결과를 원인의 자리에 갖다 놓으며, 원인을 결과의 자리에 갖다 놓는다. 예컨대 본질이라는 개념이 그렇다. 합리적 이성이 만들어낸 혼란. 그것들이 직조해 내는 공간이 바로 상상이다. 따라서 우리의 실천은 '참된 원인'을 앎으로써 그 상상을 벗어나는 자유를 얻는 것이다.


프로이트; 그 상상을 '나르시시즘'이라고 이름 붙인다. 나르시시즘은 원초적이다. 그것은 원인을 왜곡하고 결과를 은폐한다. 병리적 증상, 특히 정신의 병을 다루기 쉽지 않은 이유가 바로 '진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나르시시즘 때문이라고 프로이트는 진단한다. 성인이 된다는 것, 성장한다는 것은 그 나르시시즘의 장막을 걷어내는 일이다. 끊임없는 수행(프로이트의 용어로는 작업arbeit)의 길이다.


알튀세르; 사회적인 나르시시즘을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자본이 스스로를 재생산하기 위해 사람들을,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를 진실로부터 격리시키려는 움직임이다. 법으로, 정치로, 경찰력으로, 미디어로, 교육으로, 종교로 이데올로기를 무의식에 심는다. 가장 좋은 결과는, 개인이 그 이데올로기를 스스로의 의지로 믿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의 실천은 역시 스피노자의 반복이다.


아르케와 텔로스에 대한 부정은 필연성에 대한 부정으로 나아간다. 궁극적 원인이란 알 수 없는 것, 그러나 신비주의에 머물지는 않는다. 그것이 바로 우발성이라는 개념이다. 우연의, 마주침의, 응고의, 주어짐의 철학. 그러나 제기되자마자 즉각적으로 반박되고 매장된 철학(알튀세르). 그러나 은밀하게, 땅 밑을 흐르는 마르지 않는 지하수 같은 전통이다. 열차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열차에 몸을 싣는 자의 철학이다. 이방인의 철학이다.


나는 이 전통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형태를 띠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앞으로의 과제가 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참된 자유의 철학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Comments

  1. 네온하늘 2014.06.28 04:52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스케치보다는 크로키라는 말이 더 적합했을 것 같다. 아이디어찡, 날쌘돌이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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