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사상에서 개념의 지위와 인간의 태도


 

I. 들어가며

 

이 글은 공자 사상에서 개념이 갖는 지위와 의미,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검토해 보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공자 사상에서 은 인간사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표상된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모순혹은 부조리라 부른다. 현실의 모순은 현실을 합리적으로 파악하고 그것으로부터 정당한 행동 양식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철학 일반에서뿐만 아니라, 인격 수양을 통해 바른 정치를 구현하려던 공자의 사상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문제이다.

합리적으로 해석 가능한 현상의 문제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풀어나가면 충분한 반면, 그렇지 못한 문제는 그것을 마주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합리성뿐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한다. 예컨대 죽음의 문제, 과 악의 문제, 길흉화복吉凶禍福의 문제 등이 이런 것들이라 볼 수 있다. 이 문제들은 사마천에게서도 발견되는 바, 선한 사람이 가난과 불행과 요절에 고통 받는 반면 악한 사람이 부와 권력을 누리고 천수를 다하는 등 세대가 거듭되도록 변하지 않고 인류를 괴롭힌 문제라 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조차 이 문제들은 한 사회의 건전함을 평가하는 기준에서 빠지지 않는다.

이 글은 먼저 공자 사상에서 개념이 차지하는 위상을 검토할 것이다. 기본이 되는 텍스트는 󰡔논어󰡕이다. 그 안에서 이 등장하는 횟수를 살펴봄으로써 그 위상을 가늠해볼 것인데, 이는 기존 연구 성과를 수용하되 그 결점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양적인 통계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개념이 간접적으로 등장하는 횟수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주장이기도 하다. 그렇게 하였을 때에 개념의 의미와 그 등장 양상이 상호보완적으로 명료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 후 󰡔논어󰡕에서 등장하는 개념의 등장 양상을 열거하고 종류별로 구분한다. 이 분류를 통해 우리는 인간은 어떤 문제를 통제하고 해결할 수 있고, 어떤 것은 그럴 수 없는가에 대한 공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그 각각의 경우가 어떻게 인간사에서 모순 혹은 부조리로 드러나는지에 대해 서술한다. 끝으로, 그것들을 통해 공자가 을 대하는 태도를 추론해 보는 것으로 이 글은 마무리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자 시대의 종교적 배경이 참조되는데, 왜냐하면 전통적인 하늘[]’ 숭배의 퇴조가 공자 사상에 미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일관되는 문제의식은 종교적 색채를 지우기 힘든 내지는 천명이 공자의 인문주의 사상과 어떻게 정합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공자 사상은 흔히 인간 사회의 문제를 초월적 힘에 의지하지 않고 인간의 주체적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사상으로 이해된다.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가 덕으로써 정치를 펴면 이상적인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는 그의 생각이 그 근거로 여겨진다. 이때, 초월적 존재인 천과 천명은 그의 사상에서 부수적인 것 혹은 과거 관습의 잔재 등으로 생각되곤 한다.

 

II. 󰡔논어󰡕에서 개념의 지위와 등장 양상

 

1. 󰡔논어󰡕에서 개념의 지위

 

이나 와 같은 개념과 달리 󰡔논어󰡕에 자주 등장하지는 않는다. 표면적으로 해석할 때 우리는 공자의 사상 체계에서 명이 이나 에 비해 중요하지 않은 개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논어󰡕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구절은 지명知命지례知禮’, ‘지언知言을 같은 선에 놓으면서, ‘지명을 군자 됨의 필수 요건으로 두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명을 아는 것이 군자 됨의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개념의 무게감만으로 단순히 명 개념이 공자 사상에서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주장하기는 힘들다. 󰡔논어󰡕에 명에 대한 언급이 드문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공자가 실제로 명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인지, 혹은 실제 언급은 자주 하였으나 󰡔논어󰡕 기자에 의해 소수를 제외한 것들이 누락된 것인지 알아야 한다. 이때, 󰡔논어󰡕 󰡔자한편에 있는 한 가지 구절을 참조해볼 필요가 있다. , “子罕言利與命與仁(자한).”

이에 대한 고전적인 해석은 공자가 세 가지 모두를 적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택용은 󰡔논어󰡕 전체에서 각각 10, 15 등장한 데 비해 이 압도적으로 109회 등장한 점을 들어 이 해석을 반박한다. 그는 공자가 를 드물게 말했지만 은 허여했다는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그는 비록 에 비해 󰡔논어󰡕에서 더 많이 언급되지 않았으나, 대신 과 관련된 사태에 대한 언급이 많다는 점, 또한 가치를 인정하다로 새길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이를 정당화한다.

자한편의 위 구절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이 비록 그 구체적인 내용에서 상이할지언정 동등한 지위에서 서술되고 있다는 느낌을 반영한다. 그러나 󰡔논어󰡕에 각 개념이 등장하는 횟수를 따져보았을 때, ‘의 비중이 다른 두 개념보다 더 크기에 세 개념이 같은 선상에서 단순 비교될 수 없으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물론 어떤 개념이 󰡔논어󰡕에 더 자주 등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만큼 더 중요한 개념이라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단순한 수치상의 차이일지라도 그것을 의미 있게 서술하기 위해 우리는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일 있다.

먼저, 위의 주장에 대한 직접적인 동의나 반대에 앞서 우리는 단순한 통계적 견지에서 에 대해 접근하는 것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접근은 󰡔논어󰡕에 등장하는 이 모두 동질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예컨대 리인편에 등장하는 仁者安仁 知者利仁의 경우, ‘의 목적어로 쓰인 仁德으로 해석하는 것보다 사람내지는 타인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인덕을 평안케 한다거나 인덕을 이롭게 한다는 해석은 그 자체로 모호하여 정확히 어떤 사태를 가리키는지 불분명할 뿐 아니라, ‘󰡔논어󰡕 전체 맥락에서 상극을 이루는 개념이라는 점도 고려할 수 있다. 또한 위 구절에서 사람으로 해석하였을 때 공야장편에서 공자가 자신이 품은 뜻을 말한 老者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라는 구절과도 정합성을 이룰 수 있다.

우리의 논의에서는 자가 모두 윤리적 덕목으로서 仁德을 의미했는지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위에서 논의하였듯 󰡔논어󰡕에 등장하는 모든 이 같은 뜻을 갖고 있다고 단언하기 힘들며, 만약 서로 다른 뜻이 한 글자로 통용되어 문맥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졌을 경우, ‘’, ‘’, ‘의 등장횟수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논어󰡕에서 각각의 개념이 갖는 중요성을 가늠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남규는, 어원적으로 볼 때, ‘두 사람을 의미하던 글자였으며 과 종종 혼용되었고, 󰡔논어󰡕에서 등장하는 仁德의 뜻을 함께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논어󰡕에서 이 쓰인 구문을 분석하면서 그것이 으로 대체될 수 없는 경우는 57번 등장한다고 결론 내렸다.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경우를 제외하기보다 대체될 수 없는 경우를 세는 까닭은, 전자의 결과가 모두 仁德으로 수렴되는지 확언할 수 없을뿐더러 후자의 결과가 더 엄밀하게 신뢰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위에서 이택용의 논지의 근거로 활용되었던 통계는 조금 수정될 필요가 있다.

한편 공자가 말한 내용 가운데, ‘과 관련된 사태 중 직접적으로 이 언급되지 않는 경우는 󰡔논어󰡕28번 등장한다. 공자가 에 대해 언급했다내지는 가치를 인정했다고 할 때, 그것이 과 관련된 사태를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면 에 대해 간접적으로 언급하였던 경우도 위의 통계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공자가 실제로 에 대하여 적게 언급했다고 단언하기 힘들다. 󰡔논어󰡕의 기자들이 공자의 언행 가운데 특정 개념을 선호하지 않고 균형 있게 기록하였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공자가 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43, ‘인덕에 대해 57번 언급하였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논어󰡕에서 에 버금가는 비중으로 등장한다는 것을 확인했으며, 나아가 그것이 공자 사상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가늠해볼 수 있다. 이때, 하나의 반론이 존재할 수 있다. , ‘드물게 말했다언급했다/가치를 인정했다는 상반되는 뜻이기에 기초적인 한문 문법 상 子罕言利與命與仁子罕言利與命與仁(강조는 논자)”이 되어야 위의 해석이 자연스럽게 성립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또한 이 경우에도 을 빈어賓語로 받는 을 받는 가 각각 허여하다그리고의 뜻으로 쓰인 점도 지적될 수 있다. 한 문장 내에서 같은 글자가 서로 다른 뜻으로 쓰인 것이다.

이런 주장은 분명 유효하다. 그러나 󰡔논어󰡕 단편의 곳곳에서는 서로 상반되는 의미의 용언이 나올 때 없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으며, 비슷한 위상의 용언이 병치될 때에도 그런 경우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논어󰡕의 단편들이 형성될 때에 공자의 구어체 문장을 그대로 옮기려 한 데에서 비롯된 듯하다. 텍스트에서 가 쓰이거나 생략되는 정확한 원리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이 들어가거나 생략됨으로써 문장이 말의 리듬에 부합하는지 여부가 주목된다. 둘째로 의 경우 학이편의 단편에서 한 단어가 서로 다른 뜻으로 쓰인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 자금이 자공에게 묻는 바, “夫子至於是邦也 必聞其政 求之抑與之(강조는 논자)”에서 밑줄 친 부분은 의문사로서 쓰인 반면, ‘다음에 쓰인 는 본용언으로서 기능한다.

앞서 논의한 바, ‘󰡔논어󰡕에서 다루어진 경우가 실제로 비대칭적이기에 이런 사실을 효과적으로 해석하려 할 때는 위와 같은 해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비록 이는 텍스트 내적인 분석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만약 알려지지 않은 초기 파편들이 더 많이 발굴되어 공자 생전에 ’, ‘’, ‘이 실제로 동등하게 적게 언급되었다는 것이 밝혀지지 않는 한, 우리는 잠정적으로 위의 해석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게 하였을 때 우리는 개념이 공자에 있어 개념에 비견할 수 있을 만큼의 무게와 중요성을 갖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3. 󰡔논어󰡕에서 개념의 등장 양상

 

󰡔논어󰡕에서 개념이 직접 등장하는 경우를 유사한 의미 별로 분류하여 열거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A. 정치권력과 관련된 의미

A-1. “可以寄百里之命” (태백)

A-2. “君召命 不俟駕 行矣” (향당)

A-3. “使於四方 不辱君命” (자로)

A-4. “陪臣執國命” (계손)

A-5. “舜亦以命禹” (요왈)

 

B. 생사生死와 관련된 의미

B-1. “亡之 命矣夫 斯人也而有斯疾也” (옹야)

B-2.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선진)

B-3. “死生有命 富貴在天” (안연)

B-4. “見危致命 見得思義” (자장)

 

C. 운명運命과 관련된 의미

C-1. “五十而知天命” (위정)

C-2. “子罕言利與命與仁” (자한)

C-3. “賜 不受命而貨殖焉 億則屢中” (선진)

C-4. “道之將行也與 命也 道之將廢也與 命也 公伯寮 其如命何” (헌문)

C-5. “君子有三畏 畏天命 畏大人 畏聖人之言” (계씨)

C-6. “不知命無以爲君子也” (요왈)

 

이는 앞서 제시한 이택용의 통계와는 차이가 있는데, 이는 앞선 논자가 인간이 주체가 되는 의 경우를 빼고 센 데에 비해, 여기서는 국정이 연루되지 않은 단순한 심부름이나 외침의 경우를 뺀 나머지는 모두 목록에 포함시킨 데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爲命裨諶 草創之(헌문)”와 같은 경우에 외교문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에 따를 경우, 결론을 앞서 말하자면 위계적 관계에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무엇을 시키다라는 뜻과 멀어지게 되므로 이 논의와는 관련성이 적어지게 된다. 따라서 󰡔논어󰡕에서 의 등장 양상에 대한 논의는 위의 인용문에 한정한다.

은 본래 입[]으로 명령[]하다라는 뜻이다. ,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명령을 내린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는 위의 인용문 묶음 A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 , 등을 포함하는 초월자가 인간에게 명령을 내린다는 뜻 역시 있다. 이때, 의 구체적 내용은 인간의 노력과 의지를 벗어나 있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인용문 묶음 B생사C운명이 이에 속한다. 이는 특히 인용문 C-4에 잘 드러나 있다. 나라에 도가 행해지는 것도, 행해지지 않는 것도 공자는 모두 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특히 나라의 정치에 대한 공자의 태도는 의미심장한데, 그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노력으로 정치가 나아질 수 있다고 본 반면, ‘가 행해지는 것은 그 노력을 넘어선 무언가가 작용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한편, 개인의 노력을 넘어선 어쩔 수 없는 것의 영역이 󰡔논어󰡕에는 더 보인다. 이는 그러한 사태에 대한 공자의 태도에서도 유추해볼 수 있다. 예컨대 인용문 B-2에서 공자는 안회의 이른 죽음을 그의 명이 짧은 탓으로 보면서 그것에 대해 한편으로는 하늘을 원망하면서도 어느 정도 담담히 수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 ‘에 의한 사태는 노력으로서 바꾸고 개선해야할 문제라기보다는, 그것에 처했을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죽음과 운명뿐 아니라 부귀의 문제와 명예의 문제가 이에 해당한다. 모두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D. 부귀富貴와 관련된 사태

D-1.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可如 子曰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학이)

D-2. "不仁者 不可以久處約 不可以長處樂“ (리인)

D-3. “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居也” (리인)

D-4. “放於利而行 多怨” (리인)

D-5. “賢哉 回也 一簞食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 回也” (옹야)

D-6. “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吾從所好” (술이)

D-7.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술이)

D-8. “貧而無怨 難 富而無驕 易” (헌문)

D-9. “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위령공)

D-10. “君子謀道不謀食 (중략) 君子憂道 不憂貧” (위령공)

C-3. “賜 不受命而貨殖焉 億則屢中” (선진; 중복되는 인용문)

 

E. 명예[人之知己]와 관련된 사태

E-1.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학이)

E-2.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학이)

E-3. “不患莫己知 求爲可知也” (리인)

E-4. “夫聞也者 色取仁而行違 居之不疑” (안연)

E-5. “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 其天乎” (헌문)

E-6. “君子病無能焉 不病人之不己知也” (위령공)

E-7. “君子疾沒世而名不稱焉” (위령공)

E-8. “年四十而見惡焉 其終也已” (양화)

 

이를 통해 볼 때, 우리는 󰡔논어󰡕에서 직접 언급된 사례 이외에도 공자가 과 관련된 사태에 대해 말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공자는 인용문 묶음 B, C의 경우 이라는 단어를 직접 언급한 반면, 묶음 D, E의 경우는 그와 관련된 사태만을 말하였을까. 한 가지 기준을 제시해보자면, 묶음 B, C는 군자 됨의 과정에 본질적인 것이고, 묶음 DE는 그것에 부수적인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는 인용문 D-10E-6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때, ‘부수적이라 함은 그것이 군자 됨의 과정에 핵심적인 덕목은 아니지만, 군자로서 살아가기 위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임을 뜻한다.

부귀의 경우, 군자는 부당한 방법으로 부를 좇지 않으나 부유함에 처했을 때 그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하며, 가난에 처했을 때 역시 그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 어떤 행위가 특정 상황에 맞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인용문 D-9에 보면 소인은 곤궁함에 처했을 때 지나침[]이 있다고 말했는데, 이를 통해 볼 때 군자는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중용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 그 구체적 덕목은 인용문 D-1D-8에도 나와 있듯, 가난에 처했을 때에 (사람이나 하늘을) 원망하거나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첨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며, 부유할 때에 교만하지 않고 예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즐거움과 예는 모두 가난함이나 부유함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자신을 되돌아보았을 때에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부유함과 가난함, 즉 생계의 문제는 인간을 옭아매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공자는 생계의 문제에 너무 주의를 기울일 경우 그것에 매몰되어 옳지 못한 행동을 범하기 쉽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한 걸음 떨어져 자신을 돌아보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였을 때 오히려 가난 속에서도 지나치게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으며, 부유함 속에서도 지나치게 사치를 부리거나 부를 잃을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부터 군자다운 행동을 도모하지 않고 그것을 부정하거나 그것에 매몰될 경우 도리어 그는 가난 속에서 무너지고 부를 쉽게 잃을 수 있다(D-2).

남이 자신을 알아주는 것의 문제는 부귀의 문제와는 결을 달리 한다. 인용문 E-4에서 보듯 공자는 남에게 알려지는 것이 마치 교언영색巧言令色하는 사람의 이야기인 것처럼 말한다. 공자는 오히려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오히려 자신이 남을 몰라주는 것을 걱정하며(E-2), 차라리 행동을 능히 하지 못함을 걱정하라고 말한다(E-6). 이것만 보면 공자가 명예의 문제를 군자의 길과는 완전히 무관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인용문 E-78의 내용은 이와 대비된다. 한편 공자는 󰡔논어󰡕 곳곳에서, 훌륭한 인격으로서 주변 사람을 감화시키는 것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이 세 가지를 종합해 보았을 때 공자에게 남이 자신을 알아준다는 것은 자신의 인격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아준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훌륭한 인격을 지닌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그의 인격에 감화되어 그의 이름을 높여줄 수 있으나 모든 상황이 꼭 그런 것은 아니며, 오히려 지극한 군자가 이름을 알리지 못하고 지극한 소인이 명예로워질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 공자가 그의 삶에서 체험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사람의 인격이 그의 말과 행동에서 은은히 배어나온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널리 인정하고 높이 여겨주는 것은 개인의 노력을 떠난 일이라고 보았다.

그런 어쩔 수 없는사태에 직면하여 개인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소극적으로 남의 미움을 사지 않도록 스스로를 단속하는 일(E-8), 그리고 타인의 평가에 연연하여 스스로 가야 할 길에 소홀해지지 않는 것이다. 비록 공자 자신의 말로 전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군자의 길, 의 길은 삶 안에서 끝나리라 생각할 수 없는 것이며, 그 점에서 우리는 생전의 평가보다 사후에 남겨질 이름이 더 중대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E-7). 생전의 평가는 그 사람을 둘러싼 정치적 환경과 여건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반면, 사후의 평가는 그것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옳음으로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III. 공자 사상에서 에 대한 인간의 태도

 

1. 부조리한

 

전통적으로 하늘의 명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 여겨졌다. 󰡔논어󰡕에서 우리는 인간의 목숨과 운명, 그리고 부귀와 명예가 의 영역에 속하는 것임을 확인했다. 공자 사상에서 은 인간의 윤리적, 인격적, 존재론적 경지의 완성이라는 모티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의 군자학의 목표 가운데 하나인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이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때, 인격적 완성은 한 순간의 초월transcendence, 황홀경ecstasy, 내지는 종교적 신성 체험과는 관련 없이, 오랜 시간 동안 예악禮樂과 시를 익히고 체화하는 과정 끝에 도달하는 경지이다. 이 점에서 공자의 사상은 종교적이라기보다 인문적이다.

이 점에서 을 대하는 공자의 태도는 춘추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종교적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 서주시대까지 사회통합의 기능을 수행했던 천에 대한 신앙이 기울고, 천의 탈인격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흐름에서 실제 종교적 기능을 수행했던 의례는 공자 사상에서 한편으로는 인격 수양의 과정으로 흡수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민간인을 대상으로는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만이 중시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당연한 정의 발로라는 점 이외에도 사회통합의 기능을 가진 점에서 주목되었다. 한편 상제의 대상이 되는 귀신鬼神에 관하여 공자는 공경하되 멀리하라는 대답을 내놓았다(옹야). 이런 식으로 공자는 과거 천에 대한 신앙을 구성하던 요소들을 인간의 일로, 또한 인간의 일을 위하여 필요한 일로 전이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논어󰡕에서 은 문맥 상 자주 등장하는 데 비해, 그 전통적인 짝이었던 이 드물게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런 노력의 반영이다.

그럼에도 󰡔논어󰡕에서 드물지 언급되지 않을뿐더러 공자 사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나 과 같은 초월자의 개념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 개념에 귀속되었던 현실적 사태는 여전히 발생한다. 공자가 인문적 견지에서 인간의 관할로 옮겼던 사태들은 그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에 의한 사태는 인간의 노력으로 가까워질 수는 있지만 닿을 수는 없는, 노력의 영역을 초월한 것들이다. 공자는 바른 정치, 백성의 안정적인 삶, 그리고 사회 통합 등 사회·정치적인 것들을 천의 영역에서 성공적으로 분리해 내었다. 그러나 그것이 앞서 다룬 죽음과 운명의 문제이다.

앞서 언급한 부귀와 명예의 문제는 사회·정치적인 것인 동시에 개인의 노력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을 갖고 있는 모호한 영역이다. 노력하는 자가 부유해지기도 하는 반면 자공처럼 상업이 자신의 천직이 아님에도 (시세의 차이에 대한) 단순한 추측으로 부를 쌓기도 하고(인용문 C-3), 아첨하는 자가 명예로워지는 반면 공자 자신처럼 올곧은 자가 기용起用되지 못하기도 한다. 이런 모순은 마치 명과 떼어낼 수 없는 것인 양 환영처럼 등장한다.

죽음과 운명과 관련된 사태들에서 이러한 모순은 극대화된다. 안회와 같은 덕망 있는 인물은 왜 오래 살지 못하고 일찍 횡사橫死했으며(인용문 B-2), 백우伯牛와 같은 인물은 중병에 걸려 사망했는가(인용문 B-1). 이는 사마천에게서도 발견되는 중대한 문제이다. 백이伯夷·숙제叔齊와 같은 인물은 수양산首陽山에 숨어 고사리로 연명하다가 굶어죽고, 도척盜蹠과 같은 악인은 천수를 누렸는가. 이는 선한 자가 좋은 결과를 받고 악한 자가 나쁜 결과를 받는다는 기존의 천 주체의 정의 인식과는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한 천 사상이 만연하였던 때에 사람들은 위와 같은 일들이 예외적인 사례에 속한다거나, 성경의 욥기에서와 같이 새로운 논리를 개발하여 신을 옹호했다. 그러나 이는 모순 혹은 부조리 그 자체를 합리적으로 해결하거나 삶의 논리로 흡수하고 극복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부조리를 은폐하고 망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운명의 문제를 다룰 때에 우리는, 비록 운명이라는 명칭은 필자가 자의적으로 붙인 것이지만, 그것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먼저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논어󰡕의 구절들에서 그 구체적 내용을 추론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앞선 인용문 C-3은 이에 대해 한 가지 비스듬한 빛을 던져주는 구절이다. , 자공은 명을 받지 않았음에도재화를 불렸다. (시세의 차이에 대해) 단순한 추측이 잘 맞아떨어지는 일이 많았다. 여기서 不受命이라는 표현이 주목된다. , 자공이 상업에 대해 명을 받지 않았다면 그의 추측이 잘 맞아떨어지는 일은 예외적이고 비상非常한 일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보면, 사람이 하늘이 그에게 명한 일을 한다면 그 일은 비상한 요행僥倖 없이도 이루어질 것이다. 인간중심적 언어로 표현한다면, 천명을 실천한다는 것은 인간에 내재된 본질을 실현하는 것이며, 이는 즉 자기실현의 과정이다. 인간이 자신이 세상에서 해야 할 바의 것, 능히 할 수 있는 바의 것을 할 때에 그는 마치 하늘이 도운 것처럼 그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의 부조리는 그것이 인간의 의식적 선택 내지는 결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결단 이전에 이미 주어진 것이라는 점에 있다. 그것은 인간에게 명에 따를 것인가 혹은 따르지 않을 것인가라는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보이지 않는 주체성으로 존재한다.

이 두 가지의 명이 서로 얽혀 새로운 부조리를 만들기도 한다. 하늘이 인간에게 세상에서 이루어야 할 일을 주면서도 그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기 전에 그의 목숨을 가져가는 일이 존재한다. 공자에게는 안회의 경우가 정확히 그러한 일이다.

한편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운명 또한 󰡔논어󰡕에 등장한다. 인용문 C-4의 경우가 그러하다. 이 인용문의 앞선 문맥은 헌문편에 등장하는데, 인용문은 공백료를 자신의 힘으로 제거하려는 자복경백에 대한 공자의 반응이다. 공자는 자복경백에게 도가 실현되는 것도 실현되지 않는 것도 명에 의한 것일 뿐이니 괜한 움직임을 자제하라고 하는 것이다. 이때, 도가 실현된다 함은 자로를 참소한 공백료에게 벌이 내려지고 자로의 결백이 입증되는 것을 뜻한다. 공자는 이 일이 비단 공백료 개인에게 한정된 일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법칙에 따라 흘러갈 일이라고 본 것이다.

이 때의 은 개인을 넘어선 사회 내지는 역사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을 앞서 언급한 개인에게 주어진 본질로서의 운명과 대비하여 사태의 추이라고 이름 해볼 수 있겠다. 개인을 초월한 거대한 차원에서 역사를 이끌어 가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에 부합할 때에 우리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고, 그것에 부합하지 않거나 반할 때에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이 역시 인간에게 부조리를 던져준다.

 

2. ‘지명知命의 의미

 

앞서 논의한 바, ‘과 관련된 사태들의 의미를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목숨, 인간 내면적 본질, 사태의 추이(이것과 앞의 항을 묶어 운명이라 칭하였다.), 부귀, 명예[人之知己]. 우리는 이것들이 공통적으로 인간 개인의 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들은 그 앞에 처한 인간들에게 어떤 모순 내지는 부조리를 보여주는데, 이는 개인의 힘으로 해결해 버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부조리에 당하여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가장 원초적인 반응은 누군가를 탓하는 일이다. 인용문 E-1, 2를 비롯하여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공자가 남을 탓하지 말라고 경계하는 이유는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원초적인 반응이기 때문이다. 부귀와 명예의 문제는 그 탓을 사람에게 돌릴 수 있다고 할 때, 죽음과 운명의 문제에 직면하여 사람들은 하늘을 원망한다. 그러나 하늘을 원망하는 것 자체는 부조리한 사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 그것 역시 문제를 덮어두는 일이다.

물론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사람들의 목숨이 위협받고 운명이 바뀌는 일은 분명 인간의 힘으로 극복해야 할 것이다. 공자가 바른 정치를 주장하는 배경에는, 그렇게 함으로써 전쟁을 막고 사람들의 평화로운 삶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노력을 넘어선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해, 그 사태들을 단순히 합리화하거나 원망하지 않으면서도 반대로 그것들을 삶의 논리로 포용할 때, 우리는 더 건강하고 완성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부유함이나 가난함에 처하여 공자는 그것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즐거움을 찾으라고 말하고, 남이 알아주지 않음에 처하여서는 그것을 통해 자신의 말과 행동을 반성하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사람은 자기 자신의 시각에 갇히지 않고 그것을 넘어 더 넓게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때에 우리는 貧而無諂 富而無驕(인용문 D-1)”하거나 不患人之不己知(E-2)”한 소극적 태도에 머무르지 않고 貧而樂 富而好禮하고 患不知人한 적극적 윤리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러한 적극적 윤리는 己欲立而立人(옹야)”하는, 지극히 인간적이어서 부조리하기까지 한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다.

죽음의 문제는 한 편의 짧은 글에서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앞으로의 논의 과제로 미뤄두는 편이 낫겠다.

한편, 어떤 길이 자신에게 맞지 않다고 생각될 때에, 셀 수 없는 노력을 바쳐 해온 일이 자신의 길이 아닌 것 같을 때에, 우리는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가? 있다면, 어떻게 하면 그것을 더 나은 삶을 위한 양분으로 흡수해 낼 수 있을까? 공자는 생애 여러 번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고, 그럼에도 그 길을 좇다가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도 사람인 이상 자신의 길에 회의를 느끼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대화가 주목된다.

 

F-1. “子畏於匡 曰 文王旣沒 文不在玆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 不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 (자한)

F-2. “子曰 天生德於予, 桓魋 其如予何” (술이)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첫째, 공자는 자신의 길에 대해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요, 둘째, 그 신념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파악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김성기에 따르면 공자가 처했던 시대적 배경은 점복을 통한 受命의 패러다임에서 인간의 주체적인 知命의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전자는 인간이 하늘로부터 특정한 명을 수동적으로 받아서 실천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하늘에 대한 신앙이 약해진 상황에서의 사태로서 인간이 스스로의 본질을 주체적으로 찾아가는 것에 가깝다. 전자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늘의 이념을 현실화시킬 한 사람이 선택되는 것이라면, 후자는 누구든 자신에 내재된 가능성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을 통해 본다면, 지명知命은 곧 지기知己이다. 내가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하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의 자기-앎은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직관적이며, 사변적이라기보다는 경험적이다. 그것이 직관적인 까닭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앎의 최종근거는 직관적 느낌이기 때문이다. 이 누구-물음에 대한 단순한 외면상의 파악은 정답이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행위와 나의 존재의 공명 내지는 일치를 반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불일치는 현상적으로 마음의 꺼림, 집중執中의 소실消失 등이 될 것이다. 이는 󰡔중용󰡕에서 개념을 참조해 볼 수 있다.

지명이 경험적 판단인 까닭은 앞서 말한 행위와 존재의 일치가 경험적인 사태인 까닭이다. 공자 자신도 이것저것 많은 일을 해보았지만, ‘사문斯文의 계승자로서 배우고 그것을 가르치는 일 이외의 것들은 잔재주에 머무를 뿐이었다. 또한 공자가 오십 세에 이르러 지천명했다는 말을 본다면 그것은 어떤 직관이되 한 순간의 섬광 같은 직관이 아니라 오랜 경험의 축적 위에 세워진 직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이런 주관적 확신이 흔들리지 않고 유지될 수 있는 근거는 때를 앎에 있다. 앞서 사태의 추이로서의 운명을 살펴본 바 있다. 그것은 인간 집단의 힘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이지도 않으며, 또한 온전히 개인적인 것도 아니다. 역사의 흐름은 그저 그러한 것[自然]으로 주어질 따름이다. 여기에 대해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실현하려는 뜻이 그 흐름과 일치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나아가 그것이 일치하는 때가 언제이며 그렇지 않은 때는 언제인가 하는 것이다. 태백편의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와 같은 문장에서 우리는 이러한 태도를 읽을 수 있다.

때를 안다는 것은 직관적이면서도 논리적인 것이다. 직관적이라 함은 사태의 추이라는 것은 인간사의 영역을 넘어선 무엇이기에 단지 어렴풋한 느낌으로 알 수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그런 것이고, 논리적이라 함은 그럼에도 크고 작은 사건들의 연관성이 그 사태의 추이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때를 알고 그것에 맞추어 처신하기 위해서 사람은 당대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정확히 읽을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파악된 사태의 추이가 자신의 뜻을 실현시켜 주기에 적합하지 않다면, 그는 숨거나[] 드러나는 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그것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공자의 경우가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다.

공자 사상에서 지명지기이며, 다시 그것은 주관적 확신이다. 이것은 과거 수명受命패러다임에서의 주관적 확신과는 달리 인간의 주체성이 짙게 반영된 것이며, 따라서 그 이상의 존재에 호소할 곳이 없는 운명이다. 명을 아는 자는 단순히 명을 받은 자와는 달리 세상의 부조리를 당하여도 그것을 자신 안으로 끌어들이며 따라서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不怨天 不尤人).” 나아가 자신의 길에 대한 확신은 좀 더 적극적인 방향으로 우리를 이끄는데, 공자 사상에서 그 경지를 이라는 상태로 이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바, 인격의 완성 혹은 자기 본질의 완전한 실현의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는 심지어 천과 인을 모두 배제한 고독solitude의 상태를 전제하는 것으로서 군자의 길은 결국 자기 자신에로 돌아와야 비로소 완성을 맞이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IV. 맺으며

이상 우리는 󰡔논어󰡕에서 개념의 위상과 등장 양상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따져 명에 대한 공자 사상에서 인간의 태도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논의하였다. “不知命無以爲君子也와 같은 표현에서 보듯이 공자 사상에서 개념이 갖는 무게감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인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우리는 󰡔논어󰡕에서 개념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살펴보았다. ‘󰡔논어󰡕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에 비해 명시적으로 많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아닌 인덕仁德’, ‘인정仁政등을 뜻하는 경우에 한정하고, ‘이 간접적으로 등장한 사례까지 함께 고려한다면 우리는 에 비해 결코 적은 비중을 차지하는 개념이라 말할 수 없다.

은 기본적으로 초월적 권위를 가진 등이 인간에게 명령을 내린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가리키는 사태나 상황 등이 개인 혹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을 유추했다. 이렇게 보았을 때, 󰡔논어󰡕에서 과 관련된 사태로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죽음과 운명의 문제이고, 간접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부귀와 명예의 문제라는 결론을 내었다. 이때, 전자와 후자의 구분은 공자 사상이 목표로 하는 바 군자-됨의 길에 그것이 핵심적인가 부수적인가를 기준으로 한다.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뜻에 비추어 이 과거 종교적 함의를 띠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그런데 신앙이 쇠퇴하였던 공자의 시대에 명은 다른 함의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공자 역시 어느 정도 종교적인 인물이었을 것으로 미루어지나, 그는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정치의 문제로 명확히 구분하였고, 종교의례 또한 인간의 보편적 삶에 봉사하는 방향으로 조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개인의 노력이나 정치로도 완전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공자는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을 모색하기보다는 그것을 대하는 태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궁구하였다. 위의 네 가지 문제를 대함에 있어 공자에게서 보이는 태도는 공통적으로 자기로의 회귀내지는 자기화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운명의 문제를 다루면서 우리는 그것을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 보았다. 첫째는 개인에 내재된 인간적 본질로서의 운명이고, 다른 하나는 사태의 추이 즉, 사회, 정치, 역사의 거대한 흐름으로서의 운명이다. 전자는 이 과거 가졌던 의미 가운데 하나인, 이 세상에서 개인이 지니는 사명使命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공자 자신에게는 그렇다. 그런데 공자 개인의 삶을 살펴보았을 때, 그 사명의 실현은 번번이 좌절되고 실패할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공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의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이를 보고 단순히 공자가 하늘의 사명에 대한 종교적 믿음에 경도된 것이었다고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점에서 앞서 인용한 요왈편의 구절에 등장하는 지명知命의 의미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즉 지기知己이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파악하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또 무엇을 잘 하는지에 대해 아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과거 수명受命의 패러다임에서 탈종교적인 새로운 사고 체계로의 이행이라고도 해석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탈신비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기-앎은 직관적이고, 경험을 필요로 하지만 여전히 부정적 판단만을 허할 뿐 긍정적 판단을 허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운명의 두 번째 의미에 대한 앎을 동반하지 않은 단순한 자기 확신은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과 하늘을, 자신과 인간 세상을 대립시켜 후자를 원망하고 매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그러한 남 탓, 또 반대로 하늘과 세상을 정당화하고 자신을 비난하는 자기 탓도 아닌 새로운 건전한 길을 모색하였다. 그것이 바로 때를 앎이다. 자신의 뜻을 세상에 펴기 위해 사람은 사회 혹은 역사와 관계할 수밖에 없는데, 사회와 역사 역시 그 자신의 고유한 흐름을 갖는 존재라고 보는 것이다. 그 흐름을 운명이라, 혹은 때[]라고 부를 수 있다.

공자에게 군자의 길은 때를 읽고 그것을 앎으로써, 자신의 뜻과 때가 맞지 않을 때에는 은거하는 한편 말을 조심하고 행동을 대범히 하며, 그것이 맞을 때에는 밖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게 하였을 때 군자는 혹은 인격적 완성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공자 사상의 목적은 그 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從心所慾不踰矩내지는 중용中庸의 상태라고 추측해볼 수는 있겠으나, 자세한 논의는 다음으로 미룬다.

에 대한 공자의 태도는 인간적이고 또한 주체적이다. 이는 세계의 부조리에 마주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완성된 태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비록 공자 자신의 사상에 천착하면서 󰡔논어󰡕만을 그 분석 대상으로 놓아 다소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유가 사상 일반이 아닌 공자 개인의 사상에 조금 더 집중해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발전시켜볼 수 있는 논의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두겠다.

 

 

V. 참고 문헌

 

󰡔논어󰡕

 

김성기, 선진유학의 본질을 어떻게 재해석할 것인가, 한국유교학회, 󰡔유교사상문화연구󰡕 29, 2007.8, 5-63.

宋寅昌, 孔子天命思想에 대한 檢討, 한국유교학회, 󰡔유교사상문화연구󰡕 3, 1988.2, 159-206.

李澤龍, 「󰡔논어󰡕에서의 命論의 함의와 그 위상에 대한 고찰, 한국유교학회, 󰡔유교사상문화연구󰡕 47, 2012.3, 195-231.

최남규, 「≪論語자에 대한 再考(언어학적 연구방법을 통해), 중국인문학회, 󰡔중국인문과학󰡕 26, 2003.6, 45-72.

Leave a Comment

2014학년도 가을, 인식론Epistemology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 2장에 드러난 은유의 문제

 

1. 도전과 응전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뉴턴 가버·이승종, 1994, 이승종·조성우 역, 2010, 동연)2장인 "구조와 은유" 장에서 저자들은 은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를 인용하면서, 은유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를 다루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 은유는 한 사물에 다른 사물의 이름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어떤 규칙을 어기고있으며, 따라서 논리적으로 볼 때 그것은 거짓된 문장을 구성한다(34-35).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두 번째 통찰에 따르면, 은유는 무능력이나 실수, 기만이 아닌 천재성의 소산이다(35). 저자들은 이 두 가지가 어떻게 함께 설명될 수 있을 것인지 질문한다.

우리가 흔히 받아들이고 있는 소박한 실재론naïve realism에서는 우리가 경험하는 사실의 세계만을 인정한다. 여기서 은유와 같이 사실의 연관에 위반되는 명제들은 모두 거짓이 된다. 그러나 이 거짓 명제 가운데에서 우리에게 여전히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들이 있다. 이에 대해 저자들은 우리의 세계 안에 의미의 기준과 진리의 기준이 있으며, 그 각각을 규칙과 사실이라고 부른다(42).

그러나 여전히, 여러 가지의 규칙이 하나의 의미를 결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규칙을 말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43). 여기서 저자들이 말하는 규칙은 기하학에서 도형을 수많은 방식으로 정의하는 것처럼, 하나의 의미에 관여하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규칙인 것 같다. 뒤에서 저자들은 우리가 느끼는 가장 소박한 경험적 사실, 즉 의미를 규정하는 규칙이 세계 내의 관습과 제도 안에서 성립되는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후자의 규칙은 경험적이고 어떤 관습체계 내에서 고유한singular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구조주의가 등장한다. 구조주의는 의미의 체계를 차이가 지배하는 부정적 실재성negative reality으로, 진리의 체계를 사실이 지배하는 긍정적 실재성positive reality으로 구분한다(53). 이런 설명의 강점은, 구조 안의 차이의 고유성을 인정함으로써 우리의 관습과 제도를 이론에 담으면서 동시에 구조와 경험적 사실의 분리를 통해 유의미한 거짓 명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61-62쪽에 등장하는 것과 같이 동일한 음소구성, 동일한 낱말로 이루어져 있지만 경우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른 말에 대해 구조주의는 해결책을 제시하기 어렵다.

저자들은 이런 은유의 도전을 회피하거나 부정하는 몇 가지 방식들을 소개한 뒤, 이 도전에 정면으로 응전하는 길을 선택한다. , 언어가 갖는 의미의 다섯 가지 다른 측면을 고려함으로써 은유를 둘러싼 기존의 혼란된 문제들을 정연하게 분류하면서 은유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을 제시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첫째 문법적 측면은 낱말의 형식이 문장 구조 내에서 갖는 위치에 주목하며, 둘째 정의적 측면은 낱말의 쓰임이 관습 내에서 갖는 위치에 주목한다. 셋째 지시적 측면은 실재론적 발상의 결과로 보이는데, 이는 구조주의가 간과했던 점, 즉 어떤 의미는 부정적 실재성을 참고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통찰을 포괄하고 있다. 넷째 범주적 측면은 은유를 구성하는 주어와 술어 사이의 적절한 대응adequate respondence이 유의미성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입장이다. 마지막 상황적 측면은 하나의 발화를 둘러싼 상황이 유의미성 판단의 장field을 여는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74-79).

이런 통찰은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 다섯 가지 기준을 통해 저자들은 은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음소, 낱말, 문장 등을 아우르는 여러 층위를 함께 고려해야 하며, 은유의 진리값을 결정하는 내부적 요인과 외부적 요인 역시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나아가 저자들은 은유가 텍스트일 뿐 아니라 제스처라고 지적하며(83), 은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말을 넘어선 것, 즉 사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은유를 둘러싼 전통적인 논의들은 사실상 사람의 체취를 배제한 차가운 담론에 불과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저자들은 이에 대해 그간 언어와 유리되었던 삶의 지위를 복권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논리 철학 논고>에 드러난 비트겐슈타인의 태도와도 일치한다. 은유를 삶과 분리된 과학Wissenschaft’의 문제로 다루는 것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해결되건 간에 삶의 문제에 전혀 대답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논고>, 6.52).

 

2. 원거리 사수

나는 이 논의가 시작되었던 최초의 지점으로 돌아가 보고 싶다. 왜냐하면 저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정의했던 은유는 한 사물에 다른 사물의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었던 반면, 논의가 진행되면서 언급된 은유의 사례는 이 정의에 완전히 포섭되지는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는 제유 혹은 환유를 설명하기에 적합하다.

첫 번째 인용구에서 나는 사물의 이름을 옮기는 것 자체보다는 그 이름들 사이의 연관에 주목했다. 은유는 일차적으로 서로 다른 것 사이의 연관이다. “시인은 펭귄이다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일단 시인과 펭귄 사이의 연관을 가능하게 하는 그 무엇을 먼저 찾으려 한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가 은유를 언급하는 두 번째 인용구에서 천재성을 언급하는 것은 흥미롭다. 이에 대한 실마리는 "수면 속의 예언On Prophecy in Sleep"이라는 짧은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멜랑콜리커들은 격렬성으로 인해 원거리 사수처럼 정확하게 활을 쏜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에 급변할 수 있는 그들의 태도로 인해 그들 앞에는 연속해서 그 다음 이미지가 급속도로 다가온다.[각주:1]

 

여기서 멜랑콜리커란, 서양 고대의 4체액설 가운데 검은 담즙의 성향이 뚜렷한 사람들 일컫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 정치, , 예술 등 창작을 하는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들이 하나같이 멜랑콜리커라는 사실에 주목하기도 하였다.[각주:2] 어쨌든 주목할 만한 것은, 뛰어난 창조성을 증명하는 천재적 은유가 탄생하는 과정이 마치 원거리 사수가 멀리 떨어진 과녁을 정확하게 맞히는 것과 유사하다는 그의 통찰이다.

주목할 것은 원거리정확함이다. 은유는 겉보기에 서로 유사해 보이지 않는 사물들을 엮어내어 의미를 창출한다. 그러나 사수가 쏜 모든 화살이 과녁에 명중하지 않듯,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과녁을 빗겨간 은유도 있을 수 있다. 예컨대 피자는 빈대떡이다라는 식의 비유는 그 둘 사이의 유사성을 쉽게 찾을 수 있기에 비교적 안정적인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지는 못한다. 반면 시인은 펭귄이다라는 말은 조금 더 위험을 감수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은유의 이러한 성공실패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마치 과녁이 10점부터 2점까지의 스펙트럼으로 구성되어 있듯이, 어떤 은유는 유의미하지만 다른 은유보다는 못한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다. 죽은 은유, 혹은 닳은 은유들이 그렇다. 예컨대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는 말은 연장extension을 갖지 않는 기분이라는 개념을 날아갈 수 있는 무엇에 빗댄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예컨대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기형도, "오래된 서적")” 같은 종류의 시구를 보았을 때 느끼는 감탄을 똑같이 느끼지는 않는다. 혹은, “내 마음은 호수요,/그대 노저어 오오,(김동명, "내 마음은")”라는 시구는 잔잔한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그 강렬함은 낯선 훌륭한 은유를 접했을 때만 못하다. 요컨대 은유의 유의미함과 무의미함은 본질적 차이가 아니다.

 

3. 사유의 모험

한 번 더, 연관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이름과 이름이 만날 때, 실제로 우리 머릿속에서는 무엇이 만나는가?이미지. 자신 이외의 다른 것에 의해 정의define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 형태가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개념과는 달리, 이미지는 서로 구별되지만distinct 그 자체는 여전히 모호obscure하다. 개념이 원circle이라면, 이미지는 엷은 구름 뒤에서 자신을 은밀히 내비치는 보름달이다. 이미지는 느낌이다. 브람스의 음악을 들을 때에 느껴지는 견고함과 장중함은 다시 얼마든지 다른 말을 써서 표현될 수 있지만, 그 어느 것도 결코 나의 근원적 느낌original feeling을 완전히 표현해 낼 수는 없다.

이미지는 단신으로 만나지 않는다. 이미지는 늘 자신의 주변에 가까운 다른 이미지들을 몰고 다닌다. 그래서 확장된 은유extended metaphor가 가능해진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러니 호수에 배를 띄우듯이 그대는 내 마음에 노저어오시오, 한다. 확장된 은유는 진부한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우리 일상의 위트나 지적인 농담들은 대개 닳고 닳은 은유를 기우고 덧대서 새 생명을 준 경우가 많다.

개념 사이에 난 길을 규칙이라 한다면, 이미지의 길은 질서이다. 전자가 식물세포와 같이 단단한 벽을 삼투해야만 겨우 지나다닐 수 있다면, 후자는 동물세포와 같아서 세포 자체가 움직여 다른 이미지에 다다를 수 있다. 하지만 질서는 관습과 제도의 한계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호수에서 뱃전에 다다르기는 쉽지만, ‘마음에 이르기는 어렵다. 은유metaphor는 질서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 넘나드는meta- 운동phora이다. 이미지의 자유연상을 통해 반성해보면, 머릿속에서는 외면상 비슷한 이미지들이 서로 가깝게 붙어있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원거리 사수의 은유는 산 넘고 물 건너 나의 반쪽을 찾으려는 사유의 모험이고, 그리하여 맺어진 유의미한 은유는 다른 은유에 비해 탁월한 것이 된다.

이렇게 이름들이 제 각기 자신의 질서를 이끌고 만나면, 그곳에 하나의 세계가 탄생한다. (앞선 자연주의의 세계를 자연세계라고 부름으로써 대별할 수 있겠다.) 옥타비오 파스가 훌륭한 예를 들고 있듯이, ‘태양과 만나 이 되며, 다시 태양은 빛나는 음식이 된다.[각주:3] 이것은 의 질서와 태양의 질서 각각 혹은 그것의 단순한 합으로는 나타나지 않는 새로운 의미의 출현emergence이다. 이렇게 질서와 질서는 서로 융합되고 보완하기도 하지만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예컨대 삶은 불치의 병이다라고 해보자. 이때, ‘이 갖고 있는 생명의 이미지와 이 가진 죽음의 이미지가 상충한다. 만약 후자가 강하다면 이 은유는 염세적인 말로 읽힐 수 있지만, 전자가 강하다면, 삶은 스캔들과 같고 고통으로 찼지만 오히려 그 고통 때문에 아름다워지는 그 무엇(폐병 때문에 아름다워진 서시처럼)이 될 것이다.

 

4. 하늘과 바다 사이

은유가 멀리 떨어진 이미지의 결합으로 유동적인 유의미성을 갖고,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다면, 이때 그 진리값은 어떻게 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본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우리 시대의 지배적 견해는 자연주의이다. 즉 의미는 자연 세계라는 단 하나의 세계의 일부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의미의 기준과 참의 기준을 모두 찾아야 한다는 것(42, 강조는 원문)

 

지금까지의 나의 논의와 자연주의의 강령doctrine이 모순됨을 나는 느끼지 못한다. 여전히 은유의 세계는 자연이라는 큰 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때, 은유의 세계가 둘 이상의 원소로 이루어진 집합이라면, 자연세계는 그것의 멱집합power set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제 자연세계는 은유의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 그리고 이 세계들이 서로 마주치고 충돌하고 또 결합하는 장으로서 존재하고 기능하게 될 것이다.

물론 수정의 여지는 있다. 저 강령에서 의미는 자연세계라는 집합에 속한 원소로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의미의 의미론적, 진리적 근거가 자연세계에서 직접 찾아져야 한다. 전자의 문제는 다음 절에서 다루기로 하고 후자에 집중해 보자. 의미의 진리성의 근거가 자연세계에서 찾아져야 한다면, 두 가지 대안이 가능하다. , 하나는 각각의 의미가 자연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그것을 결정하는 구조주의적 방법이다. 이는 2은유의 도전절에서 그 난점을 드러냈다. 다른 하나는 각각의 의미가 자연세계에 직접 대응하는 것인데, 이런 소박한 실재론 역시 거짓 명제의 도전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이 두 문제는 의미를 은유의 세계에 속한 것으로 볼 때 해결될 수 있다. 은유는 자연세계에 다리를 내린 공중의 성이다.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 은유와 그 결합된 이미지에서 뻗어나간 다른 가지들의 체계 안에서 새로운 은유는 그 결합의 적합성을 판단 받을 수 있다(의미의 범주적 측면). 이는 은유의 세계 안에서 은유들이, 혹은 언명들이 갖는 부정적 실재성과 긍정적 실재성 모두를 고려해야 한다.

61-62쪽 장면 1에서 커밍스는 시인은 펭귄이다라고 말하면서 그 증거로 펭귄의 날개는 날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영을 하기 위해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 은유의 세계 안에서 이 증거는 실재 세계에 직접 손을 뻗는 것이라기보다는 은유의 확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때 시인 : 펭귄 = ? : 날개라는 관계가 성립한다. 이를 성립하게 하는 것은 구조이다. 한편 ‘?’의 정체는 날개가 가진 실재적 특성을 참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펭귄의 날개는 하늘을 날 수 없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시인은 자유로운 상상력을 통해 날 수 있는 에 비유되어 이해되었다(이 세계가 선별적으로 취한 기존의 관습). 이 관계를 통해 우리는 시인과 펭귄의 관계가 ‘?’날개의 관계에 대응되는 것이 적법하다는 사실을 이끌어낼 수 있다. , 이 세계 안에서 시인은 펭귄이다라는 언명은 참이다.

 

5. 너의 의미

어쩌면 장면 1에 제시된 은유의 세계를 만들어낸 최초의 이미지를 추측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펭귄의 날개에 대응하는 시인의 ‘?’를 통해 말할 수 있겠다. , 장면 1을 만들어낸 근원적 은유는 시인은 (더 이상) 날 수 없다.”에 가깝지 않을까? 그것의 표현 방식이 어찌되었든, 우리는 이와 비슷한 이미지로부터 커밍스의 파격적인 주장(!)이 성립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언명의 진리성 혹은 의미는 어떻게 결정되는 것인가? 세계를 보는 눈은 세계 바깥에 있다. 따라서 세계 내의 논리로는 그 관점 자체를 정당화할 수 없다. 그것은 결과를 들어 원인을 설명하려는 오류이다.

분명 그것은 세계 내의 논리로는 파악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그 발화자(혹은 발상자)인 커밍스 자신이 처했던 상황이나 그의 사상의 맥락을 이해함으로써 그것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 하나의 은유의 세계를 가능하게 만든 근원적 이미지는 자연세계에서 그 근거와 의미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점이다. 이는 앞서 제시한 집합의 비유와도 얼추 맞아 보인다. 은유의 세계가 집합이라면, 자연세계는 멱집합이다. 멱집합에서는 본래 집합의 원소들을 아무리 조합해도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 하나 드러난다. , 공집합ø이다.[각주:4]

비유를 조금 더 밀고 나가면, 오직 자연세계만을 염두에 둘 때, 의미의 의미근거가 찾아질 수 없는 이유는 ZFC 공리계의 두 번째 공리인 정칙 공리axiom of regularity[각주:5], 즉 자기 자신을 원소로 갖는 집합은 존재할 수 없다는 원리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다. 의미의 의미근거 역시 공집합에 호소해야 하는 것이다.

공집합은 그러나 어떠한 신비적인, 혹은 자연세계에 외적인 존재자가 아니다. 앞서 커밍스의 예에서 살펴보았듯, 또한 이 책 2장의 뒷부분에서 제시되고 있듯, 그것은 사람이다. 은유의 세계에 속하거나 그 세계 자체가 아니면서 그것의 의미를 가능하게 하는 무엇은 바로 사람인 것이다. 사람에 대한 고려 없이 은유의 세계는 주인 없이 하늘을 떠다니는 헬륨 풍선과 다르지 않게 된다. 한 번 보고 예쁘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서 어떤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이제 은유의 문제는 해석학의 문제로 이어진다. 물론 이때의 해석학은 딜타이 이후의 삶의 해석학이다. 삶의 체험과 표현의 이해를 중심 문제의식으로 삼는 이 해석학은 은유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딜타이 해석학이 갖는 객관주의적인 분위기를 떨쳐내기 위해 다음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 첫째는 이해의 대상이 되는 것은 나와 관련 없는 제 3자인 그 누군가가 아니라, 내가 지대한 관심을 쏟는 내 앞에 선 여야 한다는 점이다. 이때 은유는 의 세계의 가까운 정도에 따라 그 유의미성의 정도를 가질 것이다. 둘째로 의 제스처는 의 관점에서 우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각주:6] 왜냐하면 은유의 진리성은 그것이 속한 세계 안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6. 매듭짓기

나는 저자들이 은유의 문제를 통해 다다르고자 한 지점에 대한 개인적 이해를 통해 이 글을 구성해 보았다. 내가 파악한 바로 저자들은, 첫째 은유가 철학에 유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참이며 또한 불가피하다는 점, 둘째 이를 통해 삶의 생명성과 에너지를 철학에 담아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이는 책 전반에서도 드러난 점이기도 하다. 소박한 경험적 사실에서 출발하여 우리가 가진 자유와 판단의 권리를 철학적으로 옹호하려는 이러한 움직임에 나 자신도 매우 동조하고 있다. 하지만 그 방법에서 조금 차이가 있긴 한데,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난 지점이 바로 은유의 문제였다. 저자들은 소박한 자연주의의 입장에서 우리의 경험적 삶을 하나의 거대한 세계 안에 위치시켜 논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은유의 문제에 접근하는 데에 꽤 많은 우회로를 지나야 했고, 단순함을 추구했던 논의가 언어의 복잡성을 시인하는 데에 이르렀다.

이 논의가 본래 영미권의 독자들을 위해 쓰인 점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 책의 논의가 갖는 효과는 어떤 파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은유에 대한 언어 분석이라는 지점에 집중하느라 그 이상, 즉 삶의 문제를 다루는 데에서 부족함이 느껴졌다. 은유의 문제를 둘러싼 이 두 가지는 사실상 동등한 권리를 지니는 날개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은유가 창조하는 세계를 자연세계 안에 위치시킴으로써 이 문제에 접근하고자 했다. 세계라는 이미지를 통해 우리의 경험은 자연세계에 산발된 것 혹은 관습과 제도에 종속적인 것이 아니라 그 나름대로 견고하게 조직된 자율적 운동이라는 점을 부각했다. 오히려 이 세계는 관습과 제도를 자신의 관심에 따라 선택적으로 취하며, 때로는 그것을 위반하며 새로운 의미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 운동의 근원을 따진다면, 우리는 몸의 느낌-이미지()와 상상의 운동(별자리를 만드는 것)과 마주칠 것이다.

이 상상을 통해 개인의 세계는 그 자체의 완결성과 진리성을 갖는 것으로서 정당화될 수 있으리라 본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의 말을 참으로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표현하는 세계를 인정하는 것이 곧 그 사람의 고유한 삶과 실존을 인정하고 자연세계의 다양성을 보존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광인에게 태양은 폭력이다. 실제로 우리는 객관 혹은 객관성의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사람의 생각은 과학적으로 실증되어야 하며, 사람의 가치는 점수와 자격증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자신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다는 느낌 속에 살아야 한다. 나아가 그 누군가의 목소리가 나를 지배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사실의 문제가 의미의 문제에 앞서며 오히려 그것을 무화無化하는 세상에서 인간의 고유한 실존은 설 자리를 잃는다.

한편, 미처 해결하지 못한 문제도 있다. 61-62쪽에 등장하는 장면 1과 장면 2의 차이에 대한 논의가 그것인데, 사실 장면 2의 경우 나는 상징symbol’ 개념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장면 1에서 시인펭귄은 둘 다 추상적 이미지로서 기능하는 반면, 장면 2에서 시인펭귄이라는 구체적 대상과 관계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상징은 질서가 하나의 이름에 압축되어 다른 세계에 들어간 뒤, 그 다음부터 활동을 시작한다. 장면 2에서 시인은 우선 펭귄을 지시하는 말로 인식된 뒤에, 그 의미를 드러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시인과 펭귄의 관계는 은유적인 관계와는 다르다고 나는 보았다.

이 문제뿐 아니라 다른 여러 주제들도 이 글이 이 책 2장의 내용을 온전히 담아냈다고 말할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일로 남겨두고, 이만 이 글을 줄이고자 한다.


  1. Aristoteles, On Prophecy in Sleep(in; Parva Naturalia), in; The Loeb Classical Library, trans. by W. S. Hett, London and Cambridge, 1964. 464a33-464b6 이하, 김동규, "멜랑콜리 – 이미지 창작의 원동력", <철학탐구> 제 25집, 2009, 119-149, 143쪽에서 재인용. 한국어 번역은 김동규. [본문으로]
  2. 김동규, 위의 논문, 127쪽 참조. [본문으로]
  3. Octavio Paz, The Bow and the Lyre, trans. by Ruth L. C. Simms. Austin and London: University of Texas Press, 1973. p. 24 [본문으로]
  4. 집합론을 활용하는 이런 발상의 근거를 알랭 바디우, <존재와 사건>, 조형준 역, 새물결, 2013에서 발견하고 배운 것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본문으로]
  5. ZF2. 기초 공리axiom of foundation이라고도 불리며, 다음과 같이 형식화된다. . 즉, 자기 자신과 서로소disjoint인 원소만을 자신의 원소로 삼을 수 있다는 말인데, 뒤집어 말하면 자기 자신은 자신의 원소로 삼을 수 없다는 말과 동치이다. [본문으로]
  6. 이해의 관점의 문제에 관해서는 이승종, 「여성, 진리, 사회 -새로운 관계 정립을 위한 철학적 시론-」, 『철학연구』 Vol. 33, 2007 참조. [본문으로]

Leave a Comment

2014학년도 1학기 서양철학의이해 9차 보고서: 사회(Society)

J. M. Bochenski, PHILOSOPHY: An Introduction

 

I. 주제: 사회

철학자가 사회에 대해 던지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사회의 실재에 관한 것이다. 어떤 것이 사회 속에서 실재하여 어느 정도로 그러한가? 인간의 존엄성이나 자유, 혹은 사회적 행동의 목적과 같은 문제는 이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것들이다.

개인에게 사회는 먼저 외적인 강제력으로 현상한다. 즉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그대로 행동할 수 없으며, 어떤 지배적인 방식fashion에 따라 행동하게 되어 있고, 또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 가장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라고 이러한 강제력은 반드시 존재한다. 둘째로 사회는 내적인 영역에까지 작용한다. 사회는 우리의 사유와 느낌을 결정하며 나아가 정신적 삶까지 규정하기까지 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전적으로 사회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회의 실체를 관찰할 수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오로지 사회를 이루고 있는 개개인뿐이다. 가족 역시 어머니, 아버지, 자식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독일 민족도 마찬가지이다. 사회는 우리에게 실재적인 힘으로 다가옴에도, 개인을 떠난 어떤 실체로서의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사회란 오로지 개인의 합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등장한다. , 사회라는 것은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이름에 불과하며, 실존하는 것은 개인들이다. 또 사회의 힘이란, 힘을 행사하는 개인에서 비롯된 환상이거나 개인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개인들 간의 상호작용은 비실재적인 것이 되며 사회는 단순한 개인의 합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런 입장은 실재한 것이 모두 구체적인 실체를 가진 것이어야만 한다는 점을 전제한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우리의 실제적 삶과는 유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사회는 개인에 대해 어떤 힘과 권리를 갖는데, 비실재적인 것이 실재하는 것에 대해 권리를 갖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회를 실재적인 것으로 상정하는 논의가 더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존재론적으로 볼 때 이런 주장은 두 부류가 있다. 첫째, 개인주의와 같이 실체를 가진 것만이 실재한다는 점을 전제하지만, 실체를 개인이 아닌 사회에서 찾는 주장이 있다. 즉 개인은 완전한 실재성을 갖지 않으며, 오로지 사회의 부분으로서만 실재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주장은 관계만이 실재한다는 것이다. 모든 개인은 그들이 속한 관계 안에서만 참되게 존재한다. 이는 헤겔이 말한 바, “참된 것은 전체이다.” 이에 따르면 개인은 사회의 변증법적 계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 역시 중대한 문제를 일으키는데, 개인의 권리는 어디에 근거를 두는가에 관한 것이다. 사회만이 참된 실재이고, 개인은 사회에 의해 그리고 사회를 위해 존재한다면 개인은 사회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철학적 이율배반이 발생한다. 참된 실재는 오로지 개인인 것인가 아니면 사회인 것인가? 둘 중 어느 하나를 고르더라도 그것은 다른 하나를 희생시킴으로써 현실과 멀어질 수 있다. 그러나 상식적인 지성은 둘 모두를 인정한다. 개인은 그의 고유한 권리를 가지며, 또한 사회에 대한 의무도 갖기 때문이다. 철학적으로 이런 입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를 통해 정당화될 수 있다. 그는 개별적 실체가 실재하면서 그것들의 관계 역시 실재한다고 말한다. 관계라는 것은 실체에 붙어 있는것으로서 실체도 아니고 사물도 아니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첫째 사회 안에서 완전한 실체를 갖는 것은 개인이다. 하지만 둘째로, 사회가 개인의 총합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공동의 목적을 향한 개인들의 관계 역시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다른 방법으로도 정당화될 수 있다. 개인들 간의 관계는 사물처럼 실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 안에 그 근거를 갖는다. 그 근거란 개인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공동의 목적, 말하자면 공동선이다. 이에 따르면 개인이야말로 모든 사회적 행동의 최종 목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목적은 오로지 사회의 실재를 인정했을 때에만 성립한다. 사회적 의무 역시 실재하는 것이며, 그것은 개인의 복지를 위해서 수단으로 존재할 뿐이다.

 

II. 헤겔의 전체와 개체

근대 사회계약 이론 이후로 사람들은 개인을 절대적이고 자유로운 주체로 보기 시작하였다. 이는 타자의 자유와는 상충하는 것으로, 결과적으로는 공동체의 삶과 질서와는 모순적인 관계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국가의 제도와 법은 개인의 무한한자유를 제한하는 것으로서 부정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는데, 이에 따라 국가는 개인의 자유에 봉사하는 도구적 의미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 주체성은 개별자의 주관적 관점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극단적으로는 주관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 헤겔은 그리스 폴리스에서 얻은 인륜성에 대한 통찰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

그리스 폴리스에서는 개인과 사회가 분리되어 생각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개별과 보편이 충돌하지 않았다. 그러나 헤겔은 이러한 직접적 통일, 이미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고 그 전제 위에 성립한 근대사회에서는 부적합하다고 판단했다. 헤겔은 대신 인륜성의 이념을 매개적으로 통일하고자 하였으며, 그가 제시하는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국가는 이런 인륜성이 최고 단계로 실현된 것으로서 개별과 보편이 매개적으로 통일된 공동체이다. 여기에서 국가는 특수성이 배제된 추상적 보편도 아니고 보편을 사상시킨 특수한 것들의 총합에 지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개념적으로 보자면, 헤겔은 개별과 보편이 특수를 통해 매개된다고 보았다. 개별이란, 존재자들의 존재 단위로써, 하나로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편은 개별적인 것을 공통적으로 묶은 것으로, 개별적인 것에 구현된다. 이 때, 이 둘을 매개하는 것이 특수성이다. 특수는 개별자가 보편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각각의 국면마다 활동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개별적인 각각의 밤나무는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고 서로 다른 과정의 국면에 속해 있다. 그러나 이 서로 다른 개별적 밤나무들은 밤나무라는 보편적 형상을 구현하며 활동하고 있고, 이 보편은 서로 다른 개별적 밤나무들 다시 말해 특수한 밤나무들 안에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개인과 사회는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라는 보편이 개별자로서의 개인을 통해 구현되는 것이며, 각각의 개별자는 특수한 주체로서 사회와 모순되지 않고 활동한다.

이렇게 보면 보헨스키는 헤겔에 대해 상당한 오해를 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 그에 따르면 헤겔은 개인을 사회의 계기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헤겔은 근대 시민사회의 이념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것의 부정적인 측면을 인륜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보완하고자 하였다. 헤겔에 따르면 주체성은 인륜성에 의해 근거 지워지며, ‘순수한주체성은 인륜성의 계기이다. 달리 말하면, 사회계약론에서 등장하고 정초된 주체성은 개인의 무한한 자유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즉 공동체를 이차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순수하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앞서 언급하였듯, 극단적으로는 주관주의로 흘러 스스로 파멸할 수 있다. 따라서 욕망의 체계로서의 시민사회보다 한 차원 고양된 인륜성인 국가에서 주체성은 전적으로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만 부정되어야 한다.

이 근거는 법철학 강요265절에 드러난다. “이러한 제도들이 헌법을, 즉 전개되고 실현된 이성성을 특수자 속에서 구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제도들은 국가의 확고한 기초이자, 국가에 대한 개인의 신뢰와 성품의 확고한 기초이며, 공적인 자유의 버팀목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제도들 속에서 특수한 자유는 실현되어 이성적으로 존재하며, 제도들 자체에 자유와 필연성의 통합이 즉자적으로 현존하기 때문이다.” 주목할 것은 마지막 문장이다. 헤겔에게 관습과 제도는 국가를 이루는 두 본질이다. 불문적 관습은 그것의 국가의 주관적 측면이고, 성문화된 제도는 객관적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제도는 특수한 개별자의 자유를 보장하며, 개인은 제도를 통하여 자신의 자유를 추구할 때에만 이성적인 상태에 머무를 수 있다. 예컨대 사회계약론에서 정립된 근대적 주체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 생명과 재산을 침해하는 경지에 충분히 이를 수 있다. 이것은 비이성적이다. 왜냐하면 근대사회는 모든사람의 주체적 자유를 보편언명으로써 선언했음에도, 그 계기를 이루는 특수한 개별자가 다른 개별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논리적으로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개인과 사회에 대한 헤겔의 입장은 보헨스키가 개인주의와 전체주의의 철학적 이율배반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한 두 가지 주장을 함께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 사회는 개별자의 자유를 향한 활동으로 완전히 환원되는 것도 아니고, 그것과 유리된 추상적 보편도 아니다. 그러나 이 보편은 다시 개별자의 자유를 향해 있다. 개인들이 권리를 지니는 한에서만 국가에 대한 의무도 지니는것이다.

Leave a Comment

2014학년도 1학기 서양철학의이해 8차 보고서: 존재(Being)

J. M. Bochenski, PHILOSOPHY: An Introduction

 

I. 주제: 존재

존재론은 존재하는 것 일반에 대한 탐구이다. 이는 매우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분야이다. 그러나 두 가지 전통, 즉 실증주의와 인식론적 관념론은 이러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첫째로 존재론이 가능한가를 물어야 하고, 그것이 가능할 때에 존재에 대해 탐구해야 할 것이다.

먼저 존재존재자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존재자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들 모두를 일컫는다. 존재는 존재자에서 추상된 개념이다. 그런데 이 논의에서는 추상의 영역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무의미를 피하기 위해 구체적인 존재자를 대상으로 한다.

존재자에 대한 이론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은 인식론적 관념론에서 처음 제기되었다.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지식은 이미 개별 과학이 탐구해 놓았기 때문에 철학의 문제는 그것들을 어떻게 명료하게 인식할 것인가에 국한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존재론자들은 가능성 일반, 범주 등에 대한 탐구는 개별 과학이 다루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사유 일반조차 존재하는 어떤 것이기 때문에 관념론적 탐구는 사유와 존재라는 두 가지 존재자를 가정해야만 가능해지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이것은 명백히 존재론의 영역이다.

존재론을 부정하는 것은 둘째로 실증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실증주의자들은 어떠한 언표에 대해, 중요한 것은 그 언표의 대상이 아니라 쓰임일 뿐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실체라는 말은 실재에 대해 어떠한 말도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언표의 문법적 쓰임이다. 따라서 그들에 따르면 존재론은 일반 문법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 그런데 존재론자들은 실증주의자들이 문제시하는 일반화의 정도가 비합리적이라고 한다. 즉 그들은 육식 동물에 대해 말할 수 있고, 포유류, 척추동물, 동물 일반, 생명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다음에 그들은 바로 언어로 비약한다. 존재론자들에 따르면 모든 개별 과학은 수학적 의미론이라고 불리는 영역으로 환원될 수 있다. 예컨대 우리가 생명 일반을 동물과 식물로 나눌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일반적 영역으로 내려갈 수 있을 것이고 생물학을 넘어 존재론의 영역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논의는 존재론의 가능성을 넘어 그것이 다루는 영역으로 옮겨간다. 먼저, 무가 있다. 무엇인가 있는 것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다. 달리 말해 무가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무가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함을 암시한다. 무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무가 어떤 대상임을 말하는 것이고, 따라서 무는 존재하는 것이다. 무라는 것은 있으면서 없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이러한 모순이 무를 실체화한 것에서 비롯된 오류라고 한다. 그들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나눈 후, 무를 후자에 포함시킨다. 즉 무는 인간이 생각한 것이며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무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의 결핍이다. 그런데 현실적 존재자는 모두 결핍을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제한된 것이고 한정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정식화하듯, 모든 규정은 부정이다. 다시 말해 모든 유한한, 즉 한정된 것은 결여된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예컨대 어린이는 철학자가 될 가능성이 있지만, 의자는 아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의 인식이나 관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즉 실재에 속한다. 실재는 현실적인 것과 가능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겠다. 이에 대해 파르메니데스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르트만이나 사르트르는 현실태와 가능태가 기본적으로 같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이런 구분을 거부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학파는 이 둘을 분명하게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 번째 문제는 범주에 관한 것이다. 세계는 특정한 속성을 갖고 또 서로의 관계 속에 있는 것들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이를 통해 볼 때 존재자하는 개별자를 세 측면으로 나누어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특정한 속성들과, 그것을 담지하는 실체 그리고 그것들의 관계이다. 이러한 구분은 현실/가능의 구분이나 물질/정신의 구분과는 무관하다. 이 셋에 대한 철학자들의 입장은 서로 다르다. 먼저 라이프니츠의 경우 실체, 속성은 인정했지만 관계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고, 반대로 헤겔은 실체는 관계의 집합이며 속성은 관계의 표현이라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셋 모두를 인정했다.

이를 통해 볼 때 두 가지 중요한 존재론적 문제가 떠오른다. 그것들은 본질과 내적 관계에 대한 것이다. , 현실적 존재자는 속성과 관계의 집합일 뿐인가, 아니면 그것들을 밑에서 받치는 실체가 있고 속성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한가? 많은 철학자들은 본질이란 것은 주관적 관점에 의존한다고 본다. 둘째, 존재자의 모든 관계는 그것의 내적 관계인가, 아니면 실체가 우선하고 본질적 관계와 비본질적 관계가 나누어지는가? 이는 사회철학에서도 중요한 문제이다.

 

II.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시아ousia, 즉 참으로 존재하는 것을 현실적으로 혹은 가능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개별적 존재라고 보았다. 예컨대 분필, 자동차, 위스키 등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특수한 존재자들 모두가 참된 실재이다. 그런데 이러한 실체들은 그것들을 서로 구별해주는 특질들을 갖고 있다. 예컨대 분필은 흰 색이고 딱딱하며, 길고, 그것을 사용하여 칠판에 글씨를 쓸 수 있다. 이것들은 모두 분필 안에 있는 것들이다. 또한 이런 특질들은 분필에 대한 술어로 등장한다. 예컨대 분필은 하얗다, 분필은 딱딱하다, 분필은 칠판에 글씨를 쓸 수 있게 한다 등.

그런데 주어인 분필과 술어들인 특질들은 서로 있음의 방식이 다르다. 하얌, , 딱딱함 등은 홀로 있을 수 없다. 즉 하얗다는 것은 반드시 어떤 것이 하얗다는 식으로 존재하고 생각되어야 하지, 모든 개별적 존재자와 분리된 하얀 것 그 자체가 있을 수는 없다. 달리 말해 하얀 것, 긴 것, 딱딱한 것 등은 분필이라는 어떤 것의존해야만 실재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속성이라고 부른다. 속성 중에는 우연적인 것도 있고 필연적인 것도 있다. 개별적 분필은 그것이 하얀 색이어도 분필이고, 노란 색이어도 여전히 분필인 반면, 그것이 칠판에 글씨를 쓸 수 있는 속성을 잃고 종이에 글씨를 쓸 수 있다는 속성을 얻으면 그것은 더 이상 분필이 아니게 된다. 이 필연적 속성을 본질, 즉 어떤 것이 바로 그것이게 만드는 속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개별적 속성들은 한편 더 높은 층위의 술어에 속한다. 예컨대 하얀 것은 색깔이다. 이렇게 속성들의 일반적인 층위를 추적하다 보면 몇 가지 최고 유가 존재하게 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총 10가지로 제시한다. 실체를 제외하면 9가지가 남는데, 그것은 양, , 관계, 장소, 시간, 위치, 상태, 능동, 수동이다. 이것들은 의존적으로 실재하는 것들의 최고 유이며, 이보다 더 일반적인 유는 없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한편 이러한 속성들은 어디에 의존하고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기체hypokeimenon라고 한다. 기체는 여러 가지 속성들이 그것에 귀속되지만, 자신은 다른 어떤 것에 귀속되지 않는다. , 홀로 서 있다. 그런데 이 기체는 어떤 것인가? 어떤 존재자에서 여러 실재적 속성들을 제거하고 남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무규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순수 질료가 무규정적인 것이기에 기체가 곧 질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이내 이를 반박하는데, 기체는 분리되어 있으면서, ‘어떤 이것tode ti’이어야 한다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질료는 형상을 떠나서는 가능적으로만 존재할 뿐이고 형상 또한 마찬가지이므로 기체는 형상과 질료를 모두 가져야 한다. 한편 어떤 이것이라는 것은 개별적 존재자의 개별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이것이라는 조건은 실체가 그것의 속성이나 관계들의 집합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을 암시한다. , 교재에서 언급된 바 헤겔의 주장과는 반대가 된다. 즉 어떤 개별자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인 조건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는 유적 본질이다. 그것이 바로 그것인 바라는 표현은 전통적으로 본질을 정의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예컨대 소크라테스는 머리가 작아도 소크라테스이고 훤칠하게 생겼어도 소크라테스이지만, 이성을 갖지 않는다면 그를 소크라테스라고 부르기는 힘들다. 이런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이성을 본질로 갖는다. 그런데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점에서 인간이라는 본질을 지녔지만, 그것은 여전히 보편자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티마이오스가 아닌 바로 소크라테스인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두 번째 의미에서 어떤 이것은 개별자의 개별적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다른 어떤 사람이 뚱뚱하고 머리가 크고 지적이며 다른 사람과 논쟁하기를 즐겨한다고 해도 그가 소크라테스의 어떤 이것을 결여하고 있다면 그는 결코 소크라테스가 될 수 없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떨어질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후자의 개별적 측면을 강조해서 그것을 1차 실체라고 하고, 전자의 유적 측면은 2차 실체라고 한다. 존재론적으로 존재자의 보편성보다는 개별성이 우선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라이프니츠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속성의 필연성의 측면에서 다르다. 라이프니츠의 경우 개별자가 그보다 더 작은실체인 모나드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활동하는 힘인 모나드는 서로 독립해 있으며 그 안에 모든 속성(빈위)을 갖고 있다. 모나드의 활동은 자기실현의 과정이며, 모든 과거와 모든 미래는 모나드 안에 있다. 이 때, 서로 독립된 실체인 모나드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나란히 활동할 수 있는 것은 신이 보장한 예정 조화pre-established harmony 때문이다. 여기에서 실체가 갖는 모든 속성들은 본질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연적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모나드 안에 필연적으로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르다.

Leave a Comment

2014학년도 1학기 서양철학의이해 7차 보고서: 인간(Man)

J. M. Bochenski, PHILOSOPHY: An Introduction

 

I. 주제: 인간

저자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분명한 두 가지 특징은 인간은 동물이라는 사실이며, 그 중에서도 아주 특이하고 독특한 동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여타 동물과는 다른 생물학적으로 뛰어난 특질을 가져서 자연에서 살아남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추위, 더위, 맹수 등의 위험에서 살아남기에는 너무 약하다. 그럼에도 인간이 자연 속에서 살아남고 나아가 다른 생물을 멸종시키거나 하는 힘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인간이 가진 이성reason 때문이다. 물론 유인원이나 고양이도 지성을 사용할 줄 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중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며, 인간만이 가진 지성적 특성도 있다. , 기술, 전통, 진보, 다른 동물과는 달리 생각할 수 있는 능력, 반성의 다섯 가지이다.

유인원 등도 도구를 사용할 줄 알지만, 섬세하고 시간을 들여야 만들 수 있는 도구를 제작하는 것은 오직 인간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개인의 특성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것에서 근거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전통이라는 방식을 통해 기술을 발전시킨다. 인간은 생물학적 진화와는 무관하게, 사회를 통해 기술을 배우고 또 혁신함으로써 진보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 가지 특징은 모두 인간이 다른 동물과는 다른 사유 능력, 즉 추상 능력을 갖는다는 데에서 비롯된다. 과학과 종교는 그 두 가지 특징으로 들 수 있는데, 이는 어떠한 실용적 목적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경제적이거나 생물학적인 법칙에 종속되지 않는 이러한 특성들은 나아가 인간이 스스로 자유롭다는 자각을 갖게 만드는 데에 이른다. 이를 통해 인간의 다섯 번째 특징, 즉 반성 능력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인간은 외부세계뿐 아니라 자신의 내면 또한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플라톤은 인간이 자연과는 달리 영혼을 가진 존재라고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정신은 그 신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뇌에 생기는 작은 손상은 사고를 마비시킬 수 있다. 이 때, 정신과 신체의 연관에 관련된 의문이 떠오른다. 몇 가지 답이 있다. 첫째, 인간은 오로지 물질적 요소들의 기계적 움직임으로 이루어졌을 뿐, 정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극단적 유물론이 있겠다. 한편 의식의 존재는 인정하나 그것은 오직 신체의 기능일 뿐이라는 물질주의적 주장이 있겠다. 셋째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 따르면 정신적 기능을 신체와 단순히 대비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인간은 하나의 전체로서 순수하게 물리적인 기능과 식물적, 동물적, 그리고 정신적 기능을 갖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플라톤주의자들은 인간은 기계적인 신체에 깃들어 사는 정신적 존재라고 생각한다. 순수한 정신으로서 인간은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신체와는 전혀 별개의 존재인 것이다.

 

II. 정신과 신체의 관계와 과학적 물질주의: 인간 영혼에 대하여

물질주의란 정신과 신체의 관계에서 신체를 우선적으로 보는 철학적 입장이다. 어떤 면에서 우선한다고 말하는가? 두 가지 차원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존재의 차원이고, 둘째는 의미의 차원이다. 존재의 차원에서 물질의 운동은 정신적 현상에 선행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신체의 자극과 뇌 물질의 전달이 그것에 상응하는 감각과 정서, 느낌 등을 초래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니까, 이러한 물질적 운동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정신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미의 차원에서, 즉 정신적 세계 안에서 정신은 물질적 신체와 독립된 존재인 것처럼 보인다. , 감정이나 사유, 느낌과 같은 것들은 그것을 이루고 있는, 또는 그것을 초래한 물질적 조건들로 환원했을 때 사라져버리는 것들이다. 물 분자 하나는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로 분해할 수 있지만, 그렇게 환원된 물질은 물의 성질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때, 정신적 영역은 독자적인 관계망과 체계를 갖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인간의 근원적인 공감 능력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인큐베이터에 누운 아기가 옆에 누운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자신도 따라 우는 것을 볼 수 있다. 분명 여기서 찾을 수 있는 물질적 운동은 한 아이의 울음 소리가 공기 중에 전파되어 다른 아이가 그것을 감각한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어떠한 뇌 물질이 그 소리를 들은 아이에게 울음을 촉발한 것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타인의 울음소리를 듣고 항상 따라서 우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어떤 특별한 작용이 있는 것처럼 보이며, 의미의 차원에서 보자면 물질의 운동과는 독립된 것이 있어 보인다.

이렇게 보았을 때, 물질이 정신에 우선한다고 해도 그것은 두 갈래의 함의를 갖는다. 그러나 이 중 하나를 취하고 다른 하나를 도외시할 때 극단적 주장에 빠지게 된다. 존재의 차원만을 고집했을 때 극단적 유물론이 성립하며, 의미의 차원만을 고집했을 때 데카르트 식의 날카로운 이분법이 성립한다. 그러나 이 둘을 서로 평면적인 대립을 이루며 그 대립 가운데에 하나로 통일된 모순적 경향성으로 파악해서도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두 경향은 한 현상을 보는 서로 다른 두 관점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구분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신적인 현상으로 간주하는 것들조차 물질적인 요소만이 그것을 촉발하고 심화시키기 때문이다. 예컨대 뇌에 작용하는 세로토닌, 도파민, 코르티솔 등은 기분 좋음, 행복, 흥분, 스트레스, 슬픔 등등을 촉발시키는 물질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것들이 과잉되거나 부족할 때 사람들은 정신적인 문제를 겪는다. 따라서 의미의 차원으로 구분한 정신적 현상들조차 모두 물질로 환원될 수 있으므로 위의 구분 자체는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조심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신체가 어떤 통일된 경향을 지닌다는 사고를 전제한다. 그러나 유기체는 각각의 부분이 조화를 이루려 추구할, 현실적으로 항상 조화와 통일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우리는 가려움증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가려움증은 신체의 면역 체계와 피부라는 기관 사이에 발생하는 충돌이다. 신체에 위협적인 물질이 침투했을 때 몸은 그것에 대한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그것은 면역체계의 일이다. 그 결과로 몸 안에 있던 독이 몸 밖으로 배출되면서 피부를 자극한다. 신체는 다시 그 가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손발을 써서, 혹은 다른 환경을 이용해 피부를 긁는다. 이 때 가려움이 해소되는 쾌감이 주어지기도 하지만, 피부 조직이 상해 출혈을 일으킬 수도 있으며, 이를 통해 또 다른 유해물질이 몸 안으로 침투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신체가 항상 통일된 질서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생명 유지를 위한 활동 혹은 정신적 활동 모두 그것이 촉발되고 심화되는 과정은 물질의 운동에 의존하고 있다. 이것이 존재 차원에서 물질의 선행성이다. 그러나 이 모든 운동이 하나의 경향이나 질서를 위한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물질 대사에 관계하고, 어떤 것은 항상성 유지에 관계하고, 어떤 것은 생식에 관계하며, 어떤 것은 정신 활동에 관계한다. 따라서 신체 안에서 벌어지는 물질의 운동이 어떻게 기능하는가, 혹은 무엇에 의해 촉발되는가를 들여다보면 그 모든 것들은 서로 다른, 심지어 상반되기까지 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예컨대 가려움증을 두고, 우리의 신체가 모순된 운동을 하고 있다고 단언하는 것보다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경향들이 하나의 신체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더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이 때, 영혼의 문제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현대 서구적 문명에서 영혼이라는 개념은 매우 낡은, 따라서 무효한 개념으로 여겨진다. 또한 종교적 색채가 짙은 말로 굳어지면서 세속주의적 흐름에서 거부된다. 반면 서구 근대의 영향을 받지 않은 문명에서 영혼에 대한 말과 생각과 느낌은 여전히 유의미하다. 영혼은 우리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순수하고, 때에 따라서는 신비스러운 것으로 생각된다. 종종 마음이라는 말과 아주 같은 것으로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러 가지 쓰임에 비추어 볼 때 영혼은 마음과 같은 말이 아니다. 영혼의 문제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인간 개개인이 보편자들의 집합으로 풀어헤쳐지지 않게 담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극단적 유물론은 인간을 물질의 운동이라는 보편자로 환원해버리며, ‘이론적 반인간주의를 표방한 구조주의 철학은 인간을 사회 구조라는 보편자로 환원해버린다. 이는 인간관의 문제로서, 인간의 존엄성 문제나 나아가 사회와 역사에 대한 관점으로 연결될 수 있다. 예컨대 현대 매체가 자주 다루는 것들 중 하나인 인간 복제 문제가 이를 가장 핵심에서 찌르고 있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론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실체론에 따르면 인간 역시 있음으로서의 실체와 그것에 의존하는 여러 속성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인간을 규정하는 속성들은 모두 보편자이다. 예컨대 키가 크다, 살이 희다, 인간이다, 철학자다, 관념론자다 하는 규정성은 그에게만 고유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고유성은 그의 실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의 난점이 있다. 이 실체와 저 실체는 개념상 구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속성의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이 대상과 저 대상을 구분해주는 것은 실정적positive 규정인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스피노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든 개별적 사물에 부여한 실체라는 권리를 유일하고 무한한 실체인 신에게 모두 귀속시켰다. 이는 홉스가 자연 상태에서 개인들이 가진 정치적 권리를 단일하고 절대적인 권력, 즉 리바이어던에게 모두 양도하도록 한 것과 같다. 그러나 권리를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질 수 있는 고체와 같은 것으로 본 홉스의 관점이 권리의 실제와는 괴리가 있는 것처럼, 다시 말해, 인민들이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하고도 여전히 국민투표나 혁명 등을 통해 힘을 행사하는 것처럼, 실체 개념의 권리 역시 스피노자적 환원주의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스피노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를 부정한 것은 각각의 사물이 가진 고유성을 부정한 것이다.

조야한 유비추론에 빠지지 않기 위해 베르그송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베르그송은 물질과 생명으로 나누어진 존재자들이 존재의 관점에서는 하나라고 하였다. , 물질과 생명은 데카르트의 주장처럼 서로 독립적인 두 실체가 아니라 한 존재에 있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경향성이 각각 서로에 대해 우세해진 결과이다. 다시 말해 물질은 존재의 물질적 측면이 우세해진 결과이고, 생명은 반대로 물질적 경향에 비해 생성의 경향이 강해진 결과이다. 따라서 물질이나 생명이나 모두 생성한다. 다만 그 정도가 다를 뿐이다. 이 생성의 운동이 지속이다. 각각의 존재는 시간의 흐름 속에 놓여 있으며, 이 지속은 끊임없이 이질성을 생성한다. 그래서 외관상 같은 두 물체도 완전히 같다고 할 수 없다. 스피노자는 고유성을 가진 개별자가 생성의 단위임을 간과한 채 실체의 권리를 신에게 양도한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각각의 존재자가 생성하는 현존재라는 점이 곧 그것의 고유성을 담보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생성의 개념적 근거가 영혼이다.


---

시간에 쫓겨 쓰느라 뒷 부분이 흐지부지하다

Leave a Comment

2014학년도 1학기 서양철학의이해 5차 보고서: 사유(Thinking)

J. M. Bochenski, PHILOSOPHY: An Introduction

 

I. 주제: 사유

사유란 관념과 개념의 움직임(교재 49) 혹은 이행이다. 이 중 과학적 사유, 즉 학문적 사유란 보통의 사유와는 달리 어떤 지식을 목표로 하는 규율된 사유이다. 이 때 우리는 지식의 대상이 되는 것이 우리 앞에 현전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가정해볼 수 있다. 얼핏, 대상이 현전한 경우 우리는 단지 감각기관을 통해 그것을 지각하기만 하면 될 것이나, 대상이 없는 경우에 그것에 대해 감각하려 하거나 사유하려 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지식에 전혀 가까워지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유는 오히려 이 두 경우 모두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첫째로 대상이 현전한 경우, 우리의 감각은 그 대상의 무한히 많은 특성을 한 번에 잡아내어 인식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의 여러 측면을 각각 면밀히 관찰, 분석하고 그것들을 비교함으로써 그것에 대한 지식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활동은 모두 사유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의식에 주어진 현상을 분석, 종합하여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려 하는 현상학적 방법을 활용할 수 있다. 둘째로 대상이 현전하지 않은 경우에도 과학적 사유는 대상을 파악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부재한 대상을 파악하려는 시도를 추론reasoning이라고 부른다. 추론이란 현전한 대상에 대한 파악을 바탕으로 주어진 것에서 주어지지 않은 것으로 나아가는 사유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각과 추론, 이 외에 다른 사유 활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믿음이나 의지 혹은 자유의 도약(야스퍼스)”은 다만 사유의 전 단계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 지식의 원천은 될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추론은 두 종류가 있을 수 있다. 먼저 연역deduction은 하나 이상의 전제에서 결론을 도출해내는 사유의 활동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밀히 말해 지식을 확장해주지는 못할뿐더러 대부분의 추론은 연역이 아닌 귀납추리로 이루어져 있다. 귀납induction은 개별적 사실에서 출발하는 개연적 추론의 형식이다. 대부분의 과학적 추론은 귀납의 형태를 띠며 따라서 오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과학은 필연적 지식의 체계가 아닌 개연적 지식의 체계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과학은 첫째로 실용적 관점에서 볼 때 유용하며, 둘째로 이론적으로 볼 때에도 자연의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 적합하다. 셋째로, 인간적 권위, 예컨대 이데올로기와 과학이 대립할 수 있는데, 이데올로기와는 달리 과학은 항상 열린 체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 , 넷째로, 과학의 체계에 모순되는 자명한 명제가 등장할 경우, 그 이론은 폐기되거나 수정될 수 있다. 끝으로 과학은 오직 그것이 전제하는 영역 안에서만 설득력을 갖는다. 다시 말해 그것이 다루는 특수한 영역 바깥의 사태에 대해 과학은 설득력 있는 주장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예컨대 물질과학의 영역을 넘어선 영혼이나 신 등에 대해 과학은 어떠한 합리적인 설명도 제공하지 못할 것이며, 그것은 철학의 영역으로 남겨질 것이다. 이 마지막 특징을 어기고 과학이 그 자신의 영역을 넘어 철학화하려 할 때 그것은 권위주의적이며 위험한 것이 될 것이다.

 

II. 마르크스의 유물사관

마르크스는 두 가지 큰 전제에서 시작한다. 첫째, 물질적 생산력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달하는 경향을 보인다. 둘째, 경제적 구조의 본성은 생산력의 발달을 통해 이해할 수 있으며, 정치, 사법, 종교, 예술 등의 상부구조는 경제적 하부구조혹은 토대의 본성으로부터 설명될 수 있다. 마지막 전제에서 추론할 수 있는 바,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서 정치나 사법 혹은 종교의 모순은 일차적으로는 경제적인 구조의 모순을 반영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소외Entfremdung’ 개념을 통해 하부구조의 모순이 어떻게 상부구조의 모순을 낳는지 설명하려 한다.

먼저 소외란, 자기가 자신으로부터 낯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헤겔의 개념에서 빌려온 것인데, 헤겔에게서 의식은 자기정립과 자기소외의 두 계기를 통해 변증법적 운동을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에게서 자기소외는 인간이 자신의 인간성, 즉 유적 본질Gattungswesen을 상실하는 계기이다. 유적 본질이란, 개별자 안에서 특수한 방식으로 구현되는 보편성을 일컫는 것으로, 인간의 유적 본질은 인간이 외부의 대상과 관계 맺는 모든 활동을 포함한다.

사유재산 제도 내에서 일차적으로 일어나는 소외는 노동 주체의 상품으로부터의 소외이다. 노동하는 주체는 자신이 생산한 최종 결과인 상품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할 수 없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사유재산이 발생한 노예제에서부터 드러나는 것이다. 또한 근대 선대제 수공업에서 상품을 생산하는 장인은 자본가에게 돈을 미리 투자받는 대신 자신이 앞으로 생산할 상품의 소유권을 자본가에게 모두 넘기는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이후 여러 사람이 분업을 통해 생산에 참여하는 매뉴팩처 양식이 등장한 후 이러한 소외는 두 번째 단계로 심화되었다. 두 번째 소외는 상품의 생산과정에서의 소외이다. 이는 근대 공장제 매뉴팩처에서 잘 드러나는 것인데, 즉 생산과정에 참여하는 노동자는 그 자신이 수행하는 노동이 전체 상품 생산과정에서 어느 부분을 차지하는지에 대한 앎에서 소외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생산노동에서 각각의 생산 부문 혹은 생산 단계는 노동자의 인격적 보편성을 구현하는 것에서 멀어지게 된다.

세 번째는 인간의 유적 본질로부터의 소외이다. 위의 두 가지 계기로 인해 인간 개별자의 노동은 자신의 고유한 내적 능력을 외부의 객관적 형태로 구현하는, 즉 외화Entäußerung하는 인간적인노동에서 그 인간성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사유재산 이전에 인간의 유적 활동으로서의 노동은 이제 비인간적 노동으로 전락하였다. 그 인격성의 빈 자리를 이제는 화폐가 차지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격적인 특수성은 사장되며, 화페의 일반적 속성이 그 관계를 매개한다. 여기에서 네 번째 단계의 소외, 즉 인간의 인간으로부터의 소외가 나타난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개별자가 화폐에 대하여 맺는 관계에 따라 결정되며, 나아가 생산수단과 맺는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는 자본가로, 그렇지 않은 자는 임금 노동자로 분류되며,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사람들은 중간이 아닌 양 극단으로 몰리게 된다. 노동자는 오로지 노동자로서만, 자본가는 오로지 자본가로서만 사회적 관계에 참여한다.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더 많은 임금을 받기 위한 경쟁이 발생하며, 자본가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더 많은 이윤을 위한 경쟁이 발생한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는 억압과 투쟁이 지배한다.

이 네 단계는 앞의 두 계기인 경제 구조에서의 소외가 인간의 정신과 사회에서의 소외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때,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화폐이다. 소외의 과정을 거치면서 화폐는 상품과 상품을 매개하는 역할을 넘어 상품과 인간을 매개하고, 나중에는 인간과 인간을 매개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나아가 인간은 화폐를 통해 사랑, 명예, 용기 등의 덕목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옴으로써 자신이 원래 가진 속성과 다르거나 모순되는 속성을 지닐 수도 있게 된다. 예컨대 돈을 통해 대중매체에 비치는 자신의 이미지를 특정 방향으로 고착화하거나,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기념관을 만드는 식으로 개인은 화폐를 통해 특정한 이미지나 덕목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화폐가 모든 것을 매개할 수 있으며, 인간적 속성까지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믿음이 생겨난다. 이에 모든 욕망은 소유욕으로 변질되며, 나아가 화폐를 소유하려는 욕망으로 귀착된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화폐 물신이라고 부른다. 화폐 물신은 경제적 구조에서 발생한 모순이 상부구조로 드러난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여러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하여 만드는 생산물의 소유권을 소수의 혹은 한 사람의 자본가가 가지는 모순, 즉 사유재산 제도의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아가 마르크스는 이것을 역사의 일반적 원리로 확장한다. 화폐 물신이 발생한 배경에는 사유재산이 있다. 그런데 애초에 이러한 사유재산 제도는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그것은 사유재산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권력을 요청하지 않는가? 역사 속 한 계기로서의 자본주의는 그 이전 시대의 모순을 자신의 시작점으로 삼는다. 중세 봉건제 말기에는 상공업을 통해 재산을 축적한 시민계층이 이전에는 영주들이 살던 성 안으로 들어와 살 권리를 요구하게 되고, 몰락한 귀족에게서 귀족 신분을 사기도 하였다. 특히 프랑스 혁명의 경우 부르주아 출신의 신흥 귀족과, 더 이상 귀족 신분을 살 수 없게 된 부르주아가 하급 성직자를 끌어 들이며 기존의 사회 구조를 뒤바꾸어 놓았다. 이러한 변화의 근본에는 이미 발달한 생산력을 중세의 농노제가 수용할 수 없었던 이유가 놓여있다. 예컨대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과 같은 국가권력의 개입에 의한 자본의 최초의 축적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물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이러한 생산력의 발전이 논리적으로 앞서 있어야 그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이런 식으로 마르크스는 역사의 발전 단계를 원시 공동체 사회,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구획하고 각각의 시대가 다음 시대로 넘어가는 계기의 근본적 원인을 경제적 구조, 다시 말해 생산력의 발전과 생산관계의 변화에 두었다.

한편 그는 근대 자본주의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에 대한 탐구도 하였다. 공장제 매뉴팩처의 특징은 대규모의 기계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기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녹이 슬고 성능이 나빠지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기계를 구입한 후 최대한 빨리 그 효율을 뽑아내려고 한다. 이에 인간의 노동을 기계에 맞추려는 추동이 생긴다. 한편 자본가는 노동자를 고양하기보다는 성능이 좋은 기계를 구입하려는 경향이 크다. 사람보다는 기계가 비용 대비 효율이 높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공장 내 노동자 수는 줄어들고 기계의 비중이 커지게 된다. 이에 노동자들 간의 경쟁이 심화된다. 그런데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윤은 잉여가치에서 나오고, 잉여가치는 오직 노동에서만 발생한다. 이는 노동력이라는 특수한 상품의 특성에서 도출되는 것인데, 다시 말해 다른 상품이나 부품은 결과가 되는 최종 상품 안에 그대로 보존되지만, 노동력은 생산과정에서 소비되면서 동시에 상품에 어떤 특성을 더해주는 생산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장에서 사용되는 노동력이 줄면서 자본의 이윤율은 하락하는 경향을 보이고, 이에 따라 노동 조건이 악화된다.

여기에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과잉생산이 더해진다. 상품의 생산에서 시장에서의 교환과 최종 소비까지 복잡한 단계들이 존재하는데, 이 사이에서 끼어드는 변수들은 매우 많다. 운송 중에 파손되는 물품이 생길 수도 있고, 시장의 선호도에 따라 상품이 팔릴 수도, 팔리지 않을 수도 있다. 한 때 잘 팔렸던 상품이 어느 순간 인기가 식을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상품의 생산과 소비의 과정에는 무수히 많은 우연적 요소가 개입한다. 자본가들이 상품의 소비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얻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며, 자신들끼리의 생산에 관한 정보로 원활하게 교류되지 않는다. 따라서 자본가들은 호황기에 이윤을 늘리기 위해 기계에 투자하고 상품 생산을 늘린다. 그러나 이 경향이 과잉생산으로 접어들게 되면 오히려 과잉생산된 상품은 시장에서 팔리지 않고 창고에 쌓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윤율이 하락하면서 공황이 발생하고, 소자본가가 몰락하거나 전쟁이 발발해 활성화된 군수산업이 파급효과를 일으키면서 다시 공황이 극복된다. 이런 생산의 무정부성으로 인해 자본주의는 주기적인 공황을 겪게 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분석이다.

사유재산으로 인해 발생한 생산관계의 모순은 미시적으로는 화폐 물신을 통해 인간의 인간성을 박탈하고, 거시적으로는 생산의 무정부성으로 인한 주기적인 공황을 낳는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경향이 경제적 양극화를 가속하여 중간층이 몰락하고 결국 생산수단을 가진 부유한 부르주아지와 생산수단을 전혀 갖지 못한 프롤레타리아트만이 남아 대립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 때 프롤레타리아트는 생존을 제외한 모든 것을 박탈당한 존재로 그려지며, 그들의 해방이 곧 인간의 해방으로 이어진다고 주장된다. 마르크스는 이들이 혁명을 일으켜 새로운 사회를 열 것이라 보았다. 기계 그 자체는 자연력에 대한 인간의 승리이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었을 때에는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예속을 심화시킨다는 그의 말로 미루어보아, 이들은 발달된 생산력을 바탕으로 사유재산을 폐지하고 공동 생산, 공동 분배를 기초로 하는 사회를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사유재산 제도에서 모순을 낳았던 점은 상품의 생산은 여러 노동자가 참여하는 과정이나 그 결과의 소유가 소수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인데 생산력의 발달을 되돌릴 수는 없으므로, 생산의 방식을 사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재산의 방식을 사회적으로 바꾸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III. 결론

텍스트에서 저자 보헨스키는 사실적 지식을 추구하는 과학과 인간적 혹은 사회적 권위로서의 이데올로기가 대립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데올로기는 인간적, 사회적 권위에 호소하기 때문에 비합리적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 예로 든 것이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이다. 그러나 여기서 저자가 간과하고 있는 점이 있다. 어떠한 실천적인 관심을 배제한 순수한 앎을 위한 과학은 존재하기 힘들다는 것이며, 모든 이데올로기가 비합리적인 주장에 근거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 맥락에 앞서 저자가 과학의 특징을 말한 첫 부분은 바로 실생활에서의 유용성이다. 과학이란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유용하다는 것이었는데, 실용주의적 관점이란, 지식이 삶의 개선을 위한 실용적 쓰임새를 갖추어야만 참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관점이다. 여기에서는 과학의 실천적 특성을 제시해 놓고 뒤에 가서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또한 실증주의적인 과학 이해에서 볼 때, 과학은 주어진 현상을 설명하고 미래의 일을 예측하는 합리적인 탐구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권위에 호소하는 이데올로기라고 말하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이러한 과학관에 부합한다.

오히려 이 둘 사이에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체계의 개방성의 문제이다. 마르크스의 주장은 내적으로 매우 일관적이다. 이런 면에서 지식을 목표로 하는 규율된 사유에 속한다. 그런데 현실 경험과의 정합성은 여전히 개연적인 것에 머문다. 예컨대 공황에 대한 예견은 역사적으로 옳은 것으로 여겨지나, 공산 혁명에 관한 것은 아직 역사적으로 증명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 이론 자체의 존재가 그것이 대상으로 삼는 사회에 영향을 주고 있으므로 그로 인한 괴리 또한 발생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결정적 속성은 과학의 대상 또한 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관성과 정합성을 배제한 척도는 개방성일 수밖에 없다. 즉 참된 과학은, 그것의 체계에 모순되는 진실이 밝혀졌을 때 그것을 수정하거나 폐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 다시 말해 그러한 사실조차 자신의 체계 안에 포함하려 하다가 결국 내적인 모순을 범하게 되는 것은 참된 과학이라고 할 수 없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위와 같이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Leave a Comment

2014학년도 1학기 서양철학의이해 3차 보고서: 인식(Knowledge)

J. M. Bochenski, PHILOSOPHY: An Introduction

 

I. 주제: 인식

이 장은 고르기아스의 세 가지 명제에서 시작한다: 첫째,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무언가 있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셋째, 무언가 존재하고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다른 이에게 전달할 수 없다. 이러한 질문은 얼핏 보기에 우리의 삶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명제들을 납득하는 순간 삶의 모든 진지함과 세계는 다만 환상illusion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참된 인식의 가능성을 묻고자 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모든 감각적 지식은 의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직사각의 건물이 멀리서는 둥글게 보이고, 아픈 사람에게는 단 것도 쓰게 느껴지는 식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손과 발을 가졌다는 사실이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팔다리를 절단한 사람도 잘린 손과 발 부위에서 통증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편 수학적 지식조차도 완전한 참인 것은 아니다. 지성을 사용한 수학조차도 문제를 인지figuring하는 데에서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다. 데카르트는 감각이 자신을 속일지라도, 속고 있는 자신은 그에 앞서 확실하게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유하는 자아를 가장 확실한 지식의 근거로 놓았다. 그리고 다른 모든 지식 역시 그것에서 연역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생각의 자취를 따라 갔던 많은 철학자들은 그러한 결론이 부당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가 두 가지 서로 다른 것을 혼동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사유된 내용과 사유하는 자신이다. , 세계가 그곳에 있다고 아는 것은 사유된 내용에 대한 지각이다. 그러나 사유하는 자아cogito는 오직 사유함이 있다는 것 외에는 드러내지 않는다. 따라서 자아에서 세계를 연역하려는 시도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르기아스의 명제들에 대해 세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첫째, 고르기아스 자신이 논의 안에 모순을 갖고 있지 않은지, 둘째, 그의 가정이 경험과의 일치 여부를 통해 과연 확립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확정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고르기아스가 부정하는 모든 것이 경험적으로 명백한가를 검증할 수 있겠다.

저자는 이 중 세 번째 질문에 주목한다. 그는 세계는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을 다른 이에게 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명백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곧 세계가 우리가 인식하는 그대로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식은 어떻게 성립하는 것인가?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인식하는 자기 자신보다 더 확실한 존재는 없으며, 그것으로부터 다른 것을 추론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둔스 스코투스의 주장처럼, 세계는 오직 지성을 사용한 지식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 체험까지도 포함해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 역시 난점을 안고 있다. 분명한 것은 절대적 지식에 대한 가능성이 아주 적을지라도 그 가능성은 존재한다는 것이며, 회의주의와는 결코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II. 논의

1. 데카르트와 근대이성론

데카르트는 당대에 행해지던 연금술이나 점성술과 같은 유사과학들의 주장에서 벗어나서, 또 스콜라철학이 별다른 반성 없이 쓰던 형이상학적 개념과 명제들에서 벗어나서 확실한 근거를 가진 지식을 찾고자 했다. 그는 그가 기존에 배워 알고 있던 모든 지식의 확실성을 일단 의심했으며, 그로부터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명석·판명한clear and distinct 명제로부터 다른 모든 것을 연역해 내고자 했다.

첫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감각을 통해 경험하는 사실들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감각을 통해 우리는 자연과학적 지식을 얻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확실한 근거를 가진 인식은 아니라고 한다. 데카르트는 지성적intellectual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본유관념innate idea, 즉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가지며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관념을 근거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다음으로는 지성을 사용한 수학적 지식이 후보에 오른다. 하지만 그것들조차 확실한 지식이라고 하기엔 어렵다. 데카르트는 만약, 인간의 지성 전체를 속이는 악마가 있다고 한다면, 인간은 그에 속아 수학적 지식을 확실하다 믿겠지만 그 연역 체계 전체가 거짓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은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 수학적 연역 체계는 그 안에서 완결성을 지니는 것이지만, 그 체계 자체는 실재와의 어떠한 확실한 연관성도 없다는 것이다.

감각과 지성을 통한 모든 외부적 지식은 그 확실성을 의심받게 되었다. 데카르트는 여기서, 모든 인식 대상이 그 근거를 갖고 있지 않음에도, 그것들을 의심하는 인식 주체 자신은 모든 의심에 앞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의 비유를 이어가자면, 악한 신이 모든 거짓된 지식을 참이라 속일 때, 그 대상이 되는 자신이 없고서는 그러한 속임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이때의 생각하는 자아cogito를 데카르트는 모든 인식의 가장 확실한 근거이자 명석·판명한 존재라고 보았다.

그런데 자아는 인식론적으로는 가장 확실한 존재라고 할 수 있지만, 존재론적으로는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 안에서 명멸明滅하는 생각들은 그 바깥에서 다른 것을 원인으로 가져야 한다. 데카르트는 이 때, 결과가 되는 어떤 것의 원인은 그 결과보다 항상 큰 실재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자아에서 더 많은 실재성을 가지는 존재로 소급하다 보면 가장 완전한 존재, 즉 실재성을 본질로 갖는 신이 연역될 수 있다.

신은 모든 것의 원인이다. 다시 말해 신은 창조한다. 이 때, 세계에는 두 타협 불가능한 존재양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사유하는 자아를 포함하는 정신 실체이며, 다른 것은 연장extension을 본질로 갖는 물질 실체이다. 그러나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라는 뜻의 실체라는 표현과는 달리 정신과 물질은 신에 의존해 있다. 이런 면에서 신만이 유일하게 참된 실체라고 할 수도 있다. 시간적으로 신은 매 순간 창조에 개입한다. 사유하는 자아는 불완전한 존재인 자신 안에 갇혀 있다. 그것이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근거인 신이 역시 다음 순간에도 창조에 개입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연속창조론이라고 한다. 이 때, 객관적 지식의 근거즉 지식의 소통가능성의 근거는 신에게서 나온다.

근대 대륙이성론 철학자로 분류되는 스피노자Benedictus B. Spinoza와 라이프니츠Gottfried W. Leibniz 역시 데카르트의 인식 이론과 몇 가지 점을 공유하고 있다. 첫째로 인식은 순수하게 감각적인 경험만으로는 성립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해석하기 위한 선험적인 관념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고(본유관념Innate Idea), 둘째는 어떤 것의 원인은 항상 그 결과보다 더 많은 실재성을 지닌다는 것이다(충분이유율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

 

2. 둔스 스코투스와 주의주의

스코투스는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신 존재 증명이 연역적인 불완전성을 지녔다고 보았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식을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즉 감각적으로 혹은 지성에 직접 주어지는 개별 사물에서부터 그것의 운동, 능동, 필연성, 완전성, 목적 등의 원인을 역으로 추론하는 방식이다. 스코투스는 이것이 결과의 본성에서 원인의 본성을 추론하는 방식이라며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신의 의지는 동일한 본성을 상이한 결과 속에서 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스코투스는 아퀴나스의 이러한 자연주의적 추론이 신의 초월성과 인간의 자유를 훼손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 모든 사물은 신의 본성에서 필연적으로산출된 것이 아니라, 신의 의지에 따라 창조된 것이라는 것이다. 의지란 합리성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자기결정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오히려 지성에 비해 우위에 있는 능력이다. 스코투스에 따르면 지성은 자기결정성을 지니지 않기 때문에 합리성이란 의지의 활동에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그것의 본래적 의미에 충실한 것이라고 한다.

한편, 창조된 사물을 인식함에 있어 스코투스는 인간이 감각과 지성이라는 두 능력을 지녔다고 보았다. 먼저 감각은 물적material인 반면 지성은 비물질적immaterial이다. 지성이 물질적인 대상을 다루기 위해서는 그것의 이미지를 추출해 내는 과정이 필요하고 스코투스는 이것을 추상화abstraction라고 한다. 이 때, 지성이 사물을 추상하기 위해서는 보편개념이 필요하다. 지성은 보편개념 없이는 사물을 인식할 수 없다. 이 보편개념에 해당하는 것이 고대·중세 철학의 형상eidos 개념인데, 스코투스는 이것을 환영phantasm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추상적 인식abstract cognition은 인식되는 개별자들의 존재 양식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는다. 스코투스는 추상적 인식을 넘어서는 다른 형태의 인식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직관intuition이다. 직관은 보편개념을 매개로 하지 않는 인식 방법이다. 따라서 그것은 지금-여기에 주어진 개별적 사물의 전체성을 그대로 파악한다.

우리의 논의와 연관하여 보자면, 스코투스의 논의는 세계를 인식하는 데에서 지성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직관의 역할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 어떤 개별자의 유적인 특성을 아는 것은 지성을 통해 그것을 특정한 보편개념에 귀속시킴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 존재하는 그것을 전체적으로 아는 것은 그것을 그것으로서 받아들이는 직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직관은 무매개적 인식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예컨대 스피노자는 감각마저 초월하여 신--실체의 전체성을 이해하는 방식으로서의 직관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스코투스는 감각적으로 받아들인 사물을 보편개념의 매개 없이 인지하는 방법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3. 윌리엄 제임스와 실용주의

제임스William James는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를이 때의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는 근대 경험론과 근대 이성론에 제한되지 않는다포함한 전통 철학들이 자신들이 보일 수 있는 논리나 증거 이상의 명제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예컨대 로크, 버클리, 흄으로 이어지는 근대 경험론의 역사에서 그들은 이전 학자가 내세웠던 주장 중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것을 배제하면서 나름대로의 철학을 전개하였다. 그것은 지식의 객관성을 강조한 나머지 그것에 포착되지 않는 주관적 지식이나 감정 등을 배제한 결과이다.

그러나 철학은 순수한 이성과 논리의 산물이 아닌 인간에게서 나온 기질의 결과라고 제임스는 얘기한다. 그는 경험주의와 합리주의가 그 기질의 두 경향인데, 이 두 기질은 서로 모순적이다. 그런데 인간은 한편으로는 실증주의적 태도를 유지하려 하면서(경험주의) 동시에 종교적 가치를 추구하고자 한다(합리주의). 이러한 충돌 사이에서 제임스는 실용성utility을 기준으로 한 실용주의가 그 둘을 중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용주의자로 분류되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인간이 우연한 진화의 산물일 뿐이며, 플라톤이나 크리스트교가 주장하는 인간만의 특수한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만이 초월적인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비주의적 발언에 불과하다. 이로부터 실용주의의 진리론을 해명할 수 있을 것이다.

실용주의는 어떠한 명제 혹은 개념이 대립할 때에 그 중 하나가 참이라면 그것이 수용자에게 어떠한 실질적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이렇게 보면 관념 역시 경험의 일부가 된다. 경험으로서의 관념은 우리 경험의 다른 부분과 만족할 때 참true이 된다. 이 때, 참이란, 개개인의 사적 만족을 의미하는 말이 된다. 이 때, 인간의 객관적 만족이란 것은 없기 때문에, 진리truth란 건강이나 부와 같이 좋음good의 한 종류가 된다.

여기서 제임스는 의지적 인식론voluntaristic epistemology 혹은 주의주의적 인식론을 전개한다. , 인간은 초월적 진리에 대한 탐구가 아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마치 하늘의 수많은 별에서 별자리를 구성carve해내듯, 지식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무naught로부터 진리를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또한 인간성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 우리는 특정한 상황에 처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도구로서의 진리를 요청하며, 그를 통해 우리의 신념beliefs도 함께 성장을 하는 것이다.

 

 

4. 딜타이와 해석학

딜타이는 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삶을 다루기 위해서는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과는 다른 정신과학만의 독특한 해석 방식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것을 이해Verstehen라고 한다. 이 때 역사적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인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 칸트적 자기의식을 넘어 역사적으로 자신을 구성하는 헤겔식의 자기의식이 요구된다. 타자에 대한 이해는 외적으로 주어진 표현들을 자신 안으로 가져옴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먼저 딜타이가 주목하는 것은 삶 그 자체이다. 삶은 몇 가지 잘 정의된 개념과 그것들의 단순한 인과 작용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들은 물리적이 아니라 화학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러한 구조연관은 개체의 삶 속에서 생동적인 것이다. 타인의 삶은 자신의 삶 에 있는 이러한 구조연관을 이해한다면, 그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전이轉移함으로써 역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지성을 통해 대상을 설명하지만, 삶의 경우 우리의 모든 심정을 몰입하여 추후체험Nacherleben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딜타이는 정신과학에서도 객관적 인식을 수립할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삶이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이해되는 것이라는 주장의 배경에는 칸트의 시간론에 대한 딜타이의 비판이 숨어있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묶어 감성에서 주어진 잡다雜多를 범주화하는 선험적 형식이라고 하였다. 딜타이는 그것이 외적인 것을 끌어 내적인 범주로 만드는 것이라고 보았다. , 공간은 외적인 것이며 분할 가능한 것인데 비해 시간은 그와 같은 것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적인 것으로서 의식의 사실로 현실적인 것이다. 그것은 매 순간 질적인 것을 표상하며, 따라서 추상적인 단위로서는 파악될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은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체계이다.

이러한 참여, 즉 체험Erlebnis은 외적인 형식을 갖춰 표현Ausdruck된다. 이 때, 일상적인 삶의 표현양식은 순간적으로 지나가버리기 때문에 다만 직관적으로만 포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 순간의 해석은 다른 순간과 비교될 수 없다. 이에 반해 학문적 표현양식, 즉 작품이나 행위는 지속성을 가지고 주관적인 파악의 조건에서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에 더 넓은 연관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특히 언어를 통해 고정된 삶의 외화는 인간의 내면을 가장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 다른 표현양식에 비해 우위를 지닌다. 해석학은 이렇게 외적으로 끌어내어진 표현에서 다시 체험을 통해 개별자의 내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편 표현으로부터의 체험에 대한 이해는 인간 전반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즉 그의 객관화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는 것이며, 이러한 객관화는 종교, 예술, 학문, 정치 등의 인간의 문화체계를 구성한다. 물론 객관화된 정신을 이해한다는 것이 고정된 점으로서의 삶을 표상하는 것은 아니다. 생동하는 삶과 객관화된 표현 사이에는 끊임없는 순환 작용이 있다. 이렇게 딜타이에게서 삶에 대한 객관적 지식의 확립은 객관화된 문화체계, 즉 역사적 세계상과 그것을 통한 추후체험을 통해 가능해지는 것이다.

 

III. 맺는말

이상으로 인식의 가능성과 방법에 대한 네 가지 견해를 살펴보았다. 먼저 데카르트와 스코투스는 인식의 가능성을 개별적 인간이 아닌 초월적 존재인 신에서 찾는다. 반면, 윌리엄 제임스와 딜타이는 비록 제임스가 개개인의 유용성에서, 딜타이가 개인의 체험이 외화된 객관적 역사 세계에서 인식을 수립할 수 있다고 한 점에서 차이가 생기나 둘 모두 세계 내재적인 척도를 갖는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라고 할 것이다. 이 때, 데카르트와 스코투스 모두 세계에 대한 신의 의지를 강조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인식 역시 그것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특기할 만하다. 데카르트는 가장 확실한 지식의 근거를 사유하는 자아에서 찾기는 하였으나, 그로부터 연역된 실체인 신이 매 순간 창조에 관여하지 않는 이상 인식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하였다.

Leave a Comment

2014학년도 봄학기 정치철학 중간과제

 

역사 기억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정치적 문제와 광주 5·18 묘역

 

 

죽은 자의 묘를 파내어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을 일러 이장移葬이라 한다. 이장은 비교적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그 앞에 높은 첨탑을 세우고 애국가를 틀고, 사람들이 모여 묵념을 하고 연설을 듣는 일은 특별하다. 그것은 거기에 묻힌 자들이 국가 정부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가장 분명하게 선언하는 일일 것이다. 내가 아는 바로는 국내에서 위와 같은 시설을 하는 곳은 두 군데가 있다. 하나는 현충원이고, 다른 하나는 국립묘역이다. 국가 정부의 유지와 발전에 공로가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의 묘이다.

19805월 전국적으로 일련의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군사정부는 계엄령을 확대 적용하고 광주 지역에 군사를 파견하여 유혈진압을 단행하였다. 이에 맞서 무장을 하고 시청을 점령했던 시민군은 결과적으로 전멸하였고, 언론은 이들을 반국가적 무장 폭도로 보도하였다.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 정부는 이들을 국가에 공이 있는 자들로 인정하여 그들을 투박한 구묘역에서 번지르르한 신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이 아이러니 뒤에는 정치적 구도와 역관계가 숨어 있다.

먼저, 정부가 광주 5·18 희생자들을 유공자로 지정한 데에서 끝내지 않고 그들을 신묘역으로 이장한 것에는, 역사가 기억되는 양태를 바꾸어 보려는 정부의 의도가 들어 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 놓은 구묘역은 그 투박함이 민중성을 상징하는 듯하며, 정부의 폭력에 맞서 싸웠던 이들을 잊지 않으려는 의지가 담겨 있는 듯하다. 그곳을 찾는 이들은, 비록 1980년 당시와 현재 정부의 성격이 크게 달라졌지만, 정부의 폭력에 맞서 민중의 삶을 지키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를 계승하고자 한다. 그러나 정부가 조성한 말끔한 신묘역은 인민의 의식에 존재하는 그러한 정부와 민중의 대립을 완화하거나 혹은 은폐한다.

이런 완화 혹은 은폐는 다시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겠다. 한 가지는 정부가 정치적으로 민중과 뜻을 달리 하지 않는다는 암시적 주장을 신묘역 조성을 통해 상징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의 정부가 1980년의 정부와는 완전히 다른 정부이며 과거와 달리 지금의 정부는, 적어도 5월의 광주 사건에 대해서는 민중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일 것이다. 두 가지는 그 표면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정부라는 기관의 본질적인 폭력성을 은폐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리고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의 문제를 두고 그러한 은폐를 시도한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에 따르자면, 이러한 시도는 정부가 이데올로기를 통해 인민의 의식을 지배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알튀세르는 전통적 맑스주의 국가론에 구조주의를 도입하여 사유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먼저 그는 전통적 맑스주의 국가론에서 상부구조superstructure-하부구조infrastructure 이론을 받아들인다. , 정치, 사회, 문화, 예술과 같은 정신적 활동은 경제적인 하부구조에 의해 결정determine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결정이라는 말은 그러나 철저하게 환원주의적인 입장을 띠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에 의해 그 성격이 정해지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결정되지 않는 상대적 자율성을 갖는 것이다.

그의 유명한 논문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서 알튀세르는 이 상대적 자율성을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Ideological State Apparatuses’에 대한 논의로 구체화한다. 전통적 맑스주의 국가론에서와 같이 알튀세르에게도 국가는 추상적인 국가권력과 구체적인 국가장치로 나뉘며, 국가장치는 지배계급의 폭력적인 지배수단이다. 전통적으로 국가장치는 경찰, 사법 등 물리적인 제재수단과 동일시되어 이해되었다. 알튀세르는 그것을 폭압적 국가장치Repressive State Apparatus라고 부른다. 그러나 국가는 물리적인 폭력만으로 인민을 지배하지 않는다. 이런 RSA와는 달리 학교, 종교, 가족, 정치, 문화, 커뮤니케이션 등 비교적 사적인 영역에서 인민의 의식을 지배하는 더 섬세한subtle 방법을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ISAs)라고 부른다. ISAs가 억압적 사회구조를, 다시 말해 무산 노동자 계급을 생산·재생산하는 것이라면, RSA는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들을 물리적으로 제재하는 수단인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데올로기는 어떤 활동성을 가졌다는 점이다. 개인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족, 학교, 종교 등의 국가장치를 통해 기성 구조 안으로 편입되는데, 이 때, 무의식에 잠재하고 있던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의식으로 떠오른다. 개인은 이데올로기를 그의 의식 안에서 합리화하면서 이데올로기의 투사鬪士가 되는데, 이를 두고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주체로 호명한다라고 말한다.

5월 광주와 연관지어 살펴보자면, 1980년의 한국 정부는 물리적 폭력으로 시위를 진압했다. 이는 국가가 RSA를 활용한 것이다. 반면, 현재의 한국 정부는 이들을 국가 유공자로 지정하여 다루고 있다. 얼핏 보면 RSA에서 ISAs를 이용한 방법으로 통치 방식이 바뀌는 것이 자연스럽고, 그에 따라 정부가 이데올로기적으로 5월의 광주를 부정적으로 묘사해야 할 것 같다. 여기에 묘한 점이 있다. 정부는 이 사건을 폭동으로 규정하는 대신 일종의 혁명 내지는 민주화 운동으로 묘사함으로써 상식적인 ISAs 활용의 방향과는 반대로 가고 있는데, 이로써 정부는 자신이 마치 통치를 위해 폭력적 수단을 가리지 않고 사용하던 1980년의 정부와는 모든 면에서 구별된다(RSAISAs의 면에서)고 주장하는 듯하다.

현실적 원인. 결과적으로 한국에서는 1987년 민중의 민주화 운동의 성과로 인해 정부의 성격이 크게 바뀌게 되었으며, 따라서 정부는 군사정권 시기에 벌어진 모든 정부 주도의 폭력적 행위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폭력적 행위에 주목하자. 이를 통해 현재 정부는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지 않는 평화로운 정부이고, 따라서 모든 민주화 과정이 달성되었다는 이데올로기를 새로이 만들어낼 수 있다. , 이전 정부와 RSA의 면에서만 구별되는 그 차이점을 폭력적 행위에 대한 적대라는 속임을 통해서, RSAISAs를 포함한 모든 국가장치를 민중에 적대적인 방식으로 쓰지 않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첫째로, 현실적인 측면에서 정부는 인민에 대해 본질적인 폭력성을 지니고 있다. 둘째로,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지배는 일부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정부가 민주적 정부라는 이데올로기의 투사들은 집권당뿐만 아니라 흔히 보수적이라고 불리는 많은 민간단체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러한 투사들의 과도한 활동은 그들이 수호하는 이데올로기에 어떤 결함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듯하다.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국가란 구조의 구조라고 말한다. 어떤 하나의 규정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개인들을 특정한 계급, 혹은 헤겔의 용어를 빌리자면, 특정한 직업신분으로 구조화하는 작용을 하나로 셈하기라고 한다면, 국가란 그 셈하기의 셈하기라는 것이다. 바꿔 말해, 국가는 구조화된 집단들의 체계를 마련하고 관리하는 상위 존재인 것이다. 이 때, 국가가 관심 있는 것은 고유한 개개인이 아니라 어떤 집단의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이다. 이는 경험적으로 미루어 보아 분명하다. 이러한 메타구조화 작용을 통해 국가가 목표로 하는 것은 바로 기성 구조의 보존과 재생산이다. 이 때, 국가는 필연적으로 민중에 대해 폭력적인 수단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맨 처음에 전제로 한 바, 모든 개인은 특정한 하나의 규정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그러니까 모든 구조화 작용에는 그것이 포착할 수 없는 어떤 틈, 바디우의 용어를 빌리자면 공백vide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 공백의 존재는 언제나 구조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진다.

국가는 메타구조화를 통해 이러한 틈을 색출하여 원천적으로 차단하려고 하는데, 그럼에도 그러한 공백이 분출되는 사건들이 존재하게 된다. 혁명이 대표적인 예이다. 국가는 사건을 한시적인 스캔들로 규정해버리려 한다. ‘폭동’, ‘반란이라는 규정이 사건에는 늘 따라붙는다. 바디우는 이러한 사건이 본래 폭력적인 구조화 작용의 사각死角에서 발생하였다는 점, 다시 말해 존재의 가장 근원적 부분에서 분출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진리를 요청한다. 사건은 진리의 표출이다. 마치 프랑스 혁명에서 제시되었던 자유와 평등의 이념이 당시에는 커다란 스캔들이었으나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사건을 통해 분출된 진리를 충실하게 수행함으로써 우리는 구조화를 넘어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는 낙관론이다.

다시 ISAs로 돌아오자면, 5월의 광주는 단지 평면적으로 무장 폭동민주화 혁명이라 바꿔 이름함으로써 결말 지어질 사건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개명된 그럴싸함 뒤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으며, 여전히 정부는 인민에 대하여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름에 속지 않는 것이다. 광주 신묘역은 성지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탈을 빌려 교묘히 송곳니를 감추려는 정부의 시도이다.

정부가 인민에 대해 본질적인 폭력성을 지니는 이상, 타협적인 방안은 해결책이 되기 힘들다. 바디우의 철학은, 비록 현상을 분석하는 날카로움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기는 하나, 이론 철학(존재론)과 실천 철학을 하나의 체계 안에 결합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살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실천론은, 사건을 통해 드러난 진리를 구조 안으로 가져옴으로써 구조를 변혁한다는 타협론으로 귀착된다. 오히려 광주 신묘역과 한국 정부의 정치적 역관계에 대한 해결은 역사 속에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굳이 1945년 해방 정국에서 중앙 정부 대신 미군정이 대리 통치를 하려 할 때, 민중들이 스스로 만들었던 자치 기구를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19805월의 광주에서는 계엄군이 잠시 철수한 며칠 간 오직 시민들에 의해서 치안이 유지되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시민들은 돌아가며 경찰업무를 수행했고, 사람들은 밥을 지어 나누어 먹었다. 그 분위기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예로 당시 은행 강도가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곤 한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러한 순진한naive 낙관론에 빠지지는 말자. 중요한 것은, 폭력적 통치에 반대했던 사람들이 잠든 묘역을 정부가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메커니즘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미묘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부가 본질적으로 폭력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비민주적이여야 할 필요는 없다. 민주주의는 정부가 스스로의 본질적 폭력성을 인지하고 인민들의 소위 민중성과 그것을 대립시키는 긴장 속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 정부는 신묘역에 대해 단지 형식적인 권한만을 가져야 한다. , 그곳의 조성과 관리는 민간단체에 맡기고 정부는 신규 이장 대상자 선정 등에 대해서만 승인권을 가져야 한다. 5월 광주의 정신적 계승자들이 그곳을 돌볼 것이다.

Leave a Comment

2014학년도 1학기 서양철학의이해 2차 보고서: 철학(Philosophy)

J. M. Bochenski, PHILOSOPHY: An Introduction

 

I. 주제: 철학

저자 보헨스키는 철학philosophy’이라는 단어가 가진 중의성에 주목하여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가리키는지 분명히 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먼저 다른 철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한다. 첫째로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을 비롯한 실증주의자positivists들에 따르면 철학이란 과학적으로 탐구될 수 없는 것들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다.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현대의 분과 과학들에서 다루는 것들이 모두 철학이라는 학문 아래 다루어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의학, 물리학, 심리학, 논리학 등이 철학에서 분리되어 독립된 영역을 가지게 되었듯, 철학의 고유한 대상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가지 반박이 있다. 위 주장에 따르면 현대의 철학은 과거에 비해 더 협소한 영역의 문제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 지금의 철학은 오히려 과거에 비해 더 많은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시간의 흐름을 통해 여러 분과학문이 철학에서 독립하였지만, 동시에 그와 나란한 철학 분야가 생겨났다. 과학철학, 심리철학이나 논리철학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에 대한 두 번째 견해. 이는 여러 분과학문들이 철학에서 독립하였어도 철학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철학은 지성의 한계 혹은 그 너머에 있는 초-합리적인superrational , 개념으로 포착할 수 없는ungraspable 것들을 다룬다. 실존주의자로 불리는 일군의 철학자들이 이러한 견해를 펼치는데, 그들은 철학과 시poetry의 본질적 차이는 없다(장 발; Jean Wahl)거나 철학이란 과학science과 음악의 경계에서 사유하는 것(잔느 헤르쉬; Jeanne Hersch)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철학자는 그의 감정, 의지, 상상 등을 통해 철학을 하며, 철학의 기본적 요소들은 지성이 접근하여 파악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그렇다면 철학에 남겨진 것은 지성의 한계 위에 혹은 그 너머에 있는 것들이 되겠다.

이에 대해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을 비롯한 철학자들은 지성을 사용하지 않은 감정 경험 등은 인식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무언가를 파악하여 지식으로 만드는 것은 항상 인간 지성의 개념화conceptualization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성을 거치지 않은 자료들은 사실 명제, 즉 검증 가능한 경험과학적 명제로 불릴 수 없다.

여기서 저자는 철학사를 통하여 철학자들이 언제나 추구하였던 목표를 환기한다. 그것은 즉 지성의 도움을 통해 실재reality를 합리적으로 해석interpret rationally하고 세계와 삶 속에 명료함clarity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철학은 항상 엄밀한 의미의 학문(science; Wissenschaft, 지성을 통해 대상을 설명하려는 시도)’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철학이라는 학문의 대상이 의문시된다. 철학은 무엇을 탐구하는 학문인가?

크게 네 가지 답이 제시된다. 첫째, 철학은 지식 그 자체의 가능성과 한계를 탐구한다(인식론). 둘째, 다른 분과과학이 있는 것을 탐구할 때 철학은 있어야 하는 것을 탐구한다(가치론). 셋째, 철학은 자연과학natural science과 정신과학moral science가 간과하는 바, 실재 세계의 조건과 근거로서의 인간을 탐구한다(실존주의적 인간학). 마지막으로, 철학은 여타 학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구조를 탐구한다(논리 실증주의). 저자는 각각의 주장을 옹호하는 철학자들이 서로에 대해 배타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네 개의 영역, 혹은 그 밖의 특수한 분과학문에서 독점할 수 없는 문제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예컨대 법칙과 같은 주제가 그에 해당한다. 비단 개별적 주제뿐 아니라 하나의 학문이 그러한 경우도 있다. 예컨대 존재론은 특정한 개별자를 대상으로 취하지 않으며 존재 자체, 실존, 존재하는 것들의 질 등을 탐구한다. 여기서 저자는 크게 세 가지로 철학의 특징을 정리하고자 한다. , 철학은 그 대상의 영역과 탐구 방법에서 제약이 없으며, 관점이 여타의 학문과는 달리 좀 더 근본적이라는 것이다.

 

II. 논의

1. 러셀과 논리실증주의

러셀은 물리학과 같은 실증과학의 명제와 일상 언어의 차이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일상 언어는 충분히 추상적이지 않기 때문에not sufficiently abstract 물리학이 제공하는 것과 같은 엄밀한 설명에 부적합unsuited하다. 이에 러셀은 논리학을 도구로 하여 세계를 더 명료하게 그려내고자 한다. 그는 논리적 이상 언어logically ideal language가 자연 언어와는 달리, 세계의 본성을 오류의 가능성 없이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세계의 사태들state of affairs이 더 작은 단위인 분자적 사태, 나아가 원자적 사태로 쪼개질 수 있다고 보았다. 어떤 물질의 성질을 가진 최소의 단위를 분자, 그것을 이루는 더 기초적인 단위를 원자라고 하듯이 세계의 사태 또한 그것을 이루는 더 작은 단위로 분해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사태에 대응하여 명제 또한 가장 작은 부분인 원자적 명제들의 복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때, 원자적 사태와 원자적 명제는 정확하게 대응한다. 이상 언어는 원자적 사태들과 그것들의 관계를 기초로 하여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논리적 원자론logical atomism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분석의 재료가 되는 사태는 감각 경험으로 주어지는 감각 자료sense data이다. 이 점에서 러셀은 경험론 전통에 서있다고 볼 수 있다. 로크, 흄 등에서 감각 경험이 단순 관념과 그것들의 연합인 복합 관념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러셀은 원자적 사태들이 모여 복합적인 사태물리학의 유비를 이어나간다면, 분자적 사태를 이룬다고 보았다. 세계에 대한 탐구는 이러한 감각 자료를 더 분명한 작은 사태로 쪼개어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때, 철학의 대상이 되는 지식은 어떤 종류로 제한되어 있다. 러셀을 지식을 두 종류로 구분한다. 직접적이고, 직관적이며, 분명하고 오류가능성 없는 지식과 이와는 반대로 간접적이고indirect, 파생적derivative이며, 불분명하고 오류가능성 있는 지식이 그것이다. 전자의 지식은 후자에 비해 더 자명하다self-evident. 따라서 전자의 지식은 상대적으로 근본적fundamental이며, 후자의 지식은 전자에서 파생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러셀은 전자를 앎에 의한 지식knowledge by acquaintance, 혹은 직접지라고, 후자를 기술에 의한 지식knowledge by description, 혹은 간접지라고 부른다. 이 둘은 모두 사물에 대한 지식knowledge of things을 포함하고 있지만 오로지 전자만이 감각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참을 포함한다.

특기할만한 점은, 근대 이성론에서는 경험 이전에 존재하는 본유 관념innate idea이 명석·판명한, 즉 자명한 것이었던 데에 반해 러셀에게는 감각적으로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자명한 것으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이 감각적으로 자명한 것이 실증과학의 대상이다. 이런 면에서 러셀은 실증주의positivism의 전통 위에 서 있다. 여기에서 대상 자체에 대한 지식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것은 간접지의 영역으로 물러나게 된다.

이상을 정리했을 때,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학문의 목표가 진리 추구라는 전제를 더했을 때, 그 대상은 참인 명제에 대한 탐구가 될 것이다. 러셀에 따르면, 참인 명제는 감각적으로 직접 경험될 수 있는 것에 한정된다. 이는 다시 논리적 원자로 환원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복잡한 사태를 그 존재의 특성이 더욱 잘 알려진 작은 단위로부터 추론함으로써 정확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철학의 과제는 각각의 실증과학이 탐구하는 명제들 자체를 검증하는 것에 있다. 왜냐하면 전통 형이상학의 대상들과 같이 감각을 떠나있는 것들은 간접지에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실증주의적logical positivist 입장에서 철학은 그 고유한 영역을 갖지 않는다. 다만 실증과학들이 감각 경험을 해석하는 방식에 오류가 없는지를 판단하는 방법론methodology로서의 가치를 지닐 뿐인 것이다.

 

2. 키에르케고르와 실존주의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지성뿐 아니라 불안, 공포, 절망 등의 정서에 영향을 크게 받으며, 오히려 그것이 인간의 존재 이해에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인간의 실존 양식을 세 단계로 나누었는데: 심미적aesthetic 실존, 윤리적 ethical 실존, 종교적religious 실존이 그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정신적 존재로서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만남 사이에서 자유의지를 갖고 자신의 존재 양태를 결정한다고 보았다. 이 때, 정신이 오로지 시간적인 것에만 머물 때, 인간은 쾌/불쾌에 근거하여 행복을 추구하는 심미적 실존의 단계에 머문다. 그러나 그 결과는 끝없는 불안과 권태, 절망이다. 심미적 실존은 결국 쾌를 추구하지만 결과적으로 불쾌의 상태에 빠지게 되는 모순을 안고 있다.

윤리적 실존 상태에서 정신은 이와 반대로 자신을 영원한 것과 동일시한다. 여기에서의 윤리는 헤겔의 인륜성Sittlichkeit과 유사한 것으로써, 사회적 표준social norm과 관계되는데, 이 점에서 윤리보다는 도덕이 더 적확한 단어일 수 있겠다. 그러나 윤리적 실존 역시 모순을 안고 있다. 여기에서는 개인의 쾌/불쾌를 너머 선과 악의 문제가 제기되며, 사회적인 도덕이 그 표준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는 사회와 국가를 절대시한 나머지 개인을 파괴해버릴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자신으로 돌아와 참된 실존을 찾게 된다.

종교적 실존은 신앙의 역설paradox of faith에서 시작한다. 키에르케고르는 구약의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논리를 전개한다. 아브라함Abraham은 늙은 나이에 신앙에 의해 아들을 얻으리라 믿었고, 아들 이삭Isaac을 얻었다. 그러나 야훼는 아들을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는 순간 신은 이삭을 숫염소로 바꾸어 놓았으며 아브라함의 신앙을 확인하였다. 신을 위해 아들을 죽이는 행위는 윤리적으로는 살인에 불과하지만, 종교적으로는 헌신에 해당한다. 이러한 부조리가 종교적 실존을 가능하게 한다. , 좀 더 높은 가치를 위해 윤리적인 판단을 중지하는 신앙적 용기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인간은 절대적인 것과의 절대적인 관계 속에서, 즉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주체로 서게 된다. 이 단계에서 인간은 윤리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고 상대적으로 파악하게 된다. 다시 말해, 윤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종교적으로 초월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절대적 방편을 통해서 자기 내면 존재에 대한 고유결단을 내리기 때문에 보편윤리를 초월하게 된다.

실존Existenz이란 인간의 고유한 존재방식으로, 자신의 존재 양태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을 이른다. 여기에서 스스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존재 양태의 결정권이 자신 안에 고유하게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결단의 판단 근거가 자신 안에 있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 이후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사르트르Jean P. Sartre 등에 의해 전개된 실존주의는 두 가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지만, 키에르케고르에게는 첫 번째 의미의 고유성만이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 사르트르에게 실존의 과정은 큰 틀에서 같다. 먼저, 인간을 지배하는 정서는 불안Angst이다. 그는 절대적인 것과 마주한다. 그 대면을 통해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 보편적인 것을 극복하고 스스로의 실존을 결정하게 된다. 다만 그 절대적인 것을 키에르케고르는 신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