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학년도 가을, 한국사학입문

 

금석문 연구와 상상력

-하일식 1996의 논리구조 분석을 통해 금석문 연구에서 상상력의 역할 보기-

 

 

이 글에서는 하일식 1996, 1997, 2003, 2005 네 논문을 검토한 뒤, 그것에 나타난 논리구조 분석을 통해 고대 금석문 연구에서 상상력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탐구할 것이다. 흔히 역사는 사실의 탐구이기 때문에 상상력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지만, 오히려 상상력 없이는 역사연구가 진행되기 어렵다. 하지만 상상력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환단고기> <규원사화>와 같은 책들의 주장까지 인정하게 되어 사실의 문제에 충실하기가 어렵다. 사실 탐구와 상상력은 서로 반대되는 듯하면서도 보완적인 관계인 것인데, 나는 상상력이 엄격한 사실 탐구의 과정과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보이기 위해 특히 논증 과정이 복잡하고 다채로운 하일식 1996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지면의 제한 상 네 논문을 다 다룰 수 없기에, 이 논문을 분석하면서 다른 세 논문에 나타난 사례를 덧붙이는 식으로 진행할 것임을 밝힌다.

우선 하일식 1996에 나타난 논리의 주요한 흐름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창녕 인양사비에는

 

(1) 다양한 해에, 다양한 사찰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작업들이 적혀 있다.

           1) 그 가운데 연대가 착오된 기록이 보인다.

                     (i) 작성자가 비문을 급하게 새겼을 것이다.

                                - ‘同年이라는 표현이 불규칙하게 사용된다. (뒷받침)

           2) 대부분의 기록은 인양사에서 행해진 작업을 새긴 것이다.

                     (i) 인양사비가 일종의 기념비일 수 있다.

                                - ‘기념과 무관한 사업도 발견된다. (반증)

                                - 굳이 771-810년만을 대상 삼을 이유가 불분명하다. (설명가능성)

                     (ii) 인양사의 재정지출을 적은 비일 수 있다.

                                - 이를 굳이 비석에 적을 필요는 없다. (배타성)

                                - 1)-(i)을 통해 비문에 앞선 저본이 있음을 확인했다. (정합성)

                                - 僧像 좌측면 존재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설명가능성)

(2) 비문 머리에 標題 있다.

           1) ‘順表□’는 사람의 이름일 것이다.

                     - 施食, 入食 등의 주체는 인양사가 아닌 제 3의 개인일 것이다.

                                - 본문에서當寺가 아닌인양사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뒷받침)

                     - 771-810년만 대상 삼은 것과 승상, 송의 존재가 해명된다. (설명가능성)

                     - (1)-1)-(i): 주인공이 入寂 뒤 급하게 비를 세운 것이다. (정합성)

∴ 창녕 인양사비는 인양사에 있으면서 많은 절에 佛事 등을 벌였던 상당한 재력의 소유자가 입적한 뒤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일 것이다.

 

저자는 비문 판독을 통해 얻어진 파편적인 정보들을 통해 그것이 나오게 된 배경을 하나하나 짚어보고 있다. 그 주요한 방식은 각각의 정보들로부터 그것이 포함된 더 넓은 상황적 배경을 추측해보고 그것을 검증하는 것이다. 첫째로, 추측은 제한된 가능성 안에서 이루어진다. (1) 2)에서 저자는 예컨대, 인양사비가 개인적인 기록을 목적으로 하였다든지 하는 추측을 배제하고 있다. 물론 이 예시가 너무 터무니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다시, 이것이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생각되는 까닭은 碑文 갖는 일반적 성격을 우리가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저자가 추측한 바, 인양사비가 기념비 혹은 재정지출기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비문의 일반적 성격이라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일식 1997 5-11쪽에서는 귀족, 왕족에 대한 포상 기사에 나타난 범위 내에서 所內 성격에 대한 추측이 이루어지고 있다. 하일식 2003 135-143쪽에서는 당대 비문에 인명이 기록되던 관행에 비추어 元千毛主 정체에 대한 추측이 이루어지고 있다. 하일식 2005 22-25쪽에서는 菁堤 왕 개인, 왕을 배출한 가문, 왕이라는 공적 지위 가운데 어느 것에 속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두 번째는 특히 원성왕을 기점으로 지증왕계가 내물왕계로 대체됐던 당대 신라 왕실의 계보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비문 혹은 어떤 지역이 처했던 상황에 대한 이해는 추측의 범위를 제한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창의적인 새로운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둘째로, 이 추측들은 여러 방법으로 검증되고 있다. 하일식 1996에 등장한 방법을 분류 해보면, 크게 반증, 설명가능성, 배타성, 정합성으로 나누어볼 수 있을 것이다. 반증이란 하나의 파편적 정보에서 출발한 추측이 다른 부분과 충돌할 때 그 추측을 기각하는 것이다. 설명가능성은 하나의 부분에서 출발한 추측이 다른 부분까지 설명할 수 있음/없음을 나타낸다. 배타성은 (1)-2)-(ii)에서 한 번 발견되는데, 재정지출기록은 비문이 아니라 종이에 기록하는 등 다른 방법으로도 수행될 수 있으므로, 인양사비가 재정기록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유보하는 것이다. 정합성은 하나의 추측과 다른 추측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하나의 체계 안에 공존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공존하게 된 추측들은 그것을 포괄하는 더 상위의 가설을 기다린다.

하일식 1997에서는 소내가 대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 그리고 보다 앞서 적히면서 더 많은 포상을 받았다는 점을 포괄하여 설명하기 위해 그것이 왕실 직할지였다는 소결론을 내놓고 있다. 하일식 2003에서는 元千 혹은 元千毛 관직명일 것이라는 추측을, 다른 비문에 나타난 관례와의 정합성을 통해 기각하고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이 관문성 명문석의 제작연대인데, 저자는 앞서 명문석에 나타난 자의 字形 다른 비문들에 나타나는 변화의 연속성 안에 있어야 한다(정합성)는 원칙을 통해 7세기 후반을 비정했다. 하일식 2005에서는 菁堤 536년 이전에도 왕실 직할지였다는 추측을, 병진명 뒤편의 정원명과의 정합성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금석문 연구에서 주로 사용되는 방법은 정합성과 설명가능성임을 알 수 있다.

하일식 1996은 이러한 추측과 검증의 방법을 통해 비문에 등장하는 모든 부분들을 포괄하여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을 골라내고 있다. 이 논문에서 최종적으로 도출된 가설은, 이 비문이 인양사에 있던 누군가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가설이 세워지고 나면 앞서 다소 추상적이고 모호하게 제시되었던 추측들이 구체적인 형태로 재조직된다. 예컨대 (1)-2)-(i)는 그저급하게라는 상황만을 강조하였지만, 이것이 (1)-2)-(i)의 두 번째 요소와 만나서 비문의 주인공이 입적한 직후의 상황으로 구체화되었다. 또한 (1)-2)에서는 비문에 기록된 많은 사업들이 상당한 재원을 필요로 한다고만 제시되었지만, 가설이 도출되고 난 후에는 비문의 주인공이 상당한 재력가라는 상황으로 구체화되었다. 여기에 더해 그가승려였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그 재산이 개인이 모은 것이라기보다는 선대의 유산일 가능성이 크다는 추측이 성립하였다. 하일식 2003에서는 元千毛 食邑主였다는 가설을 통해 서울과 지방 사이에 서로 다른 표기 관행의 차이( /受地 受作)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금석문 연구는 탁본 등의 방법을 통한 글자 판독 이후, 내용의 부분들로부터 추측을 던지고, 그것을 반증하거나 증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았다. 특히 사료가 처했던 구체적 상황에 대한 추측은 조금 더 추상적인 상황 이해에 의해 제한을 받지만, 과감한 추측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검증이란 추측에 대한 검증이기 때문에, 추측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오히려 추상적인 상황 이해로 인해 더 창의적인 추측이 가능해지기도 한다. 이는 앞서 보인 바와 같다. 검증의 과정은 이렇게 투사된 상상력의 결과를 논리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이는 반대로 실증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더 정합적이고 적용 가능한 가설이 도출될 수 있다. 얼핏 반대되어 보이는 상상력과 논리성 내지는 실증성이 실은 이렇게 주고받는 작용을 통해 더 유효한 학설을 내놓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도출된 역사상은 텍스트에 엄밀하게 충실한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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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애도, 역사

영화 「러브레터」를 보고

 

기억은 무서운 병이다. 그러나 오직 기억만이 그것을 치료할 있다.


문장을 해명하기 위해서 나는 조금 길을 돌아가고 싶다.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사랑하는 사람, 관심을 기울이던 대상, 혹은 그런 관념을 상실했을 사람들은 가지 정서적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1]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이라는 아픈 사태를 마주하여 고통스럽게 낙심하며 바깥 세상에 대해 관심을 끊는 것은 모두에게 공통적이지만, 어떤 이는 나아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마저 저버린 나머지 부끄러움 없이 자신을 비난하고 처벌한다는 것이다. 단순한 슬픔에 처한 사람들은 잃어버린 대상에 주었던 관심과 정신적 에너지를 다시 되찾아 새로운 대상을 사랑할 있게 된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애도작업(Trauerarbeit)이라고 부르는 과정에 실패하는 사람들은 우울증에 빠져서는 공허한, 사랑할 없는 자아를 끌어안고 고통에 허우적댄다.


실상 애도작업이란 잊어버리는 일이다. 사랑하는 이의 형상이 자꾸 떠올라 자신을 괴롭히는 일에서 벗어나고, 그를 잃어버린 것이 자신의 부도덕과 추함 때문이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극복해 내는 일이다. 그와 관련된 기억들을 다만 좋은 추억으로 묻어두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일이다. 그것은 장례(상례와 제례) 같이 어떤 특수한 의식(ritual) 통해서, 혹은 단테가 『신곡(La Divina Commedia)』을 쓰면서 그러했듯 사랑하는 이를 상상 속에서 기억하고 변형하고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킴으로써 할 수 있다. 조금 더 일상에 가깝게 생각해 보면, 친구들끼리 모여 헤어진 연인에 대한 자신의 애증을 이야기하면서 묵은 감정을 풀어내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사랑했던 대상을 특별한 방법으로 기억함으로써 그를 잊는 길들이다. 상실은 소통의 단절이다. 말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은, 할 수 없던 것들, 전하고 싶었지만 아직 품고 있던 감정은 상실이라는 사건 이후 내면에 고여 썩기 전에 내보내야 한다.


영화에서 이런 애도는 크게 세 갈래로 드러난다. 첫째는 주인공 와타나베 히로코가 죽은 연인 후지이 이츠키()을 마음 속에서 떠나 보내는 과정, 둘째는 후지이 이츠키()의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이츠키()를 병원으로 데려가며 폐렴으로 죽은 그녀의 아버지를 기억하고 화해하는 장면, 마지막으로 후지이 이츠키()가 히로코의 부탁으로 이츠키()의 옛 모습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아름답게 다시 기억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모든 계기에는 이츠키()가 중심에 있다.


영화 초반, 히로코가 죽은 이츠키() 두고 동시에 중학교 동창인 시게루 아키바와 가까워지는 사건은 히로코의 내면에 갈등을 유발한다. 아직 충분히 애도되지 않은 이츠키에 대한 책임감이 그녀를 붙잡았을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도 이츠키의 주소로 보낸 편지에 답장이 왔다. 그것은 이츠키의 중학교 동창이자 동명이인인 후지이 이츠키() 보낸 것이었는데, 이를 알고 히로코는 그녀에게 자신의 애인에 대한 기억을 공유해달라고 한다. 이를 통해 히로코는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그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자신이 알고 있던 그의 모습을 이츠키() 기억을 통해 확인함으로써 위안받는다. 결국 히로코는 아키바와 함께 이츠키() 조난을 당해 죽음을 맞이했던 산으로 가서 끝내 그에 대한 슬픔을 털어낸다. 이것이 유명한 오겡끼데스까( 지내나요)? 아타시와 겡끼데스(나는 지내요)!” 장면이다. 지내나요-나는 지내요를 반복함으로써 히로코는 자신 안에 쌓인 이츠키() 대한 묵은 감정을 해소한다. , 이츠키() 자신의 기억을 공유해준 것이 히로코에게 과거를 털어낼 용기를 것으로 보인다. 덧붙여, 마지막 장면의 장소에서 히로코와 아키바 일행은 이츠키() 조난될 당시 함께 있었던 3자인 중학교 동창의 집에서 하루를 묵는다. 아키바와 그가 이츠키() 마지막 순간에 불렀던 노래를 계속 흥얼거리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 이츠키를 기억하고 애도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겉으로 때에는 위에 적은 번째 갈래의 애도가 영화의 줄기를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번째 갈래의 애도, 과거에 대한 기억과 망각을 영화에서 읽을 있다고 본다. 이츠키() 자신의 중학교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등장한 책이 있다. 바로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다. 한 번은 두 이츠키가 도서부 활동을 할 때, 다른 한 번은 그녀가 아파서 학교에 못 나왔을 때 그가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 책을 한 권 준 장면에서 나왔다. 장면 구성의 비중으로 보았을 때 사실상 이 영화의 시간은 대부분 이츠키()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 할애되었다. 실제로 히로코의 부탁을 받아 자신의 중학교 시절을 회상하는 첫 장면에서 이츠키는 그 과거가 별 것 없다고 말했지만, 이후에 이어진 장면들은 그런 판단과는 상반된 것을 증명했다.


한 사람의 과거에서 유용한 일이 거의 없다는 말은 달리 말해 그 사람의 기억이 제대로 소화되지 못한 채 현재와 단절되어 있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이다. 어떤 시간의 기억이 현재의 나와는 단절된 채 있다면, 그것은 곧 내가 그 기억에서 어떠한 현재적 의미도 찾을 수 없으며 그 안에서 현재의 나를 이루는 어떤 전조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나는 서로 소통하지 않는 부분들로 분열되어 있으며, 이는 나 자신에 대한 슬픔과 애도를 불러 일으킨다. 이렇게 되면 삶의 희망은 별 쓸모가 없게 된다. 실제로 이츠키()는 잦은 감기에 시달리고 당장 아버지를 폐렴으로 잃었으면서도 병원에 가려는 의지를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보통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런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특별 처방은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먼저 서로의 가치를 조건 없이 인정함으로써 삶에 활력을 찾는다. 하지만 본격적인 애도는 그들이 서로 자신의 생각과 추억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서로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그럼으로써 사랑하는 이들은 자신의 과거가 자신에게 가치 있는, 어떤 큰 시간의 한 부분으로서 기억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에 이를 때 스스로에 대한 애도는 일단락된다. 비록 이츠키가 거친 과정은 직접적인 남녀 간의 사랑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는 개인의 차원에서도 그러하지만 역사의 차원에서도 유효한 같다. 역사는 기억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외른 뤼젠(Jörn Rüsen, 1938-현재) 브루크하르트(Jacob Burckhardt, 1818-1897)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을 분석하며 그것을 애도작업으로서의 역사라고 말한 있다.[2] 역사적 단절이 생기는 변화에는 항상 고통받는(suffering) 사람들이 생기기에 마련인데, 그들을 기억하고 역사라는 하나의 전체 속에서 그들을 포용하려는 노력이 진정한 인간성의 회복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뤼젠이 대표적인 예로 드는 것이 아우슈비츠의 기억이다. 실제로 독일인들은 기억을 처음엔 덮어두려 하다가 나중에는 그것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애도하며 극복해 나아가는 방식을 택했다. 이렇게 기억은 실천이 되고, 새로운 역사를 동력이 된다. 우리의 역사에서도 끊임없이 기억해야 부끄러움들이 있다. 친일파 문제, 전쟁성노예(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문제 기억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애도 없는 망각은 부끄러운 일이다. 기억은 오직 기억으로만 치료될 있다.



[1] 이하 문단의 논의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윤희기 ,「슬픔과 우울증」,『무의식에 대하여』, 열린책들, 1997, 247-270쪽을 참고하였음.

[2] 이하의 논의는 Jörn Rüsen, 2005 “Historical Thinking as Trauerarbeit”, History: Narration—Interpretation—Orientation, New York: Berghahn Books, pp. 147-162 참조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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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세기 동아시아와 조공-책봉의 실제

중국 남북조와 고구려·백제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I. 머리말

역사학에서 하나의 연구 단위로서의 동아시아를 처음 제기한 것은 1970년대 일본의 니시지마 사다오[西嶋 定生]였다. 그는 문화적으로 한자와 유교, 율령, 한역(漢譯) 불교를 공유하는 지역을 동아시아 문화권이라 불렀는데, 그 배경에는 책봉(冊封) 체제라는 정치적 요소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책봉 체제의 기원은 주()나라의 봉건제와 진()나라의 군현제에서 찾을 수 있다. 봉건제는 왕이 친족과 공신에게 일정 지역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제도로 간접 지배의 한 방식이었다. 반면, 군현제는 황제가 자신이 만든 법에 따라 지방관을 파견하는 직접 지배의 방식이었다. ()나라에서는 이 둘을 절충하여, 내신(內臣)에게는 국()이라는 봉토를 하사하면서 동시에 이민족의 수장과 군신 관계를 맺는 형식을 만들어냈다(이성시, 142).

한편 이성시에 따르면, 한 대(漢代)에는 책봉 체제에 대한 사상적 근거화가 이루어졌다. 하나는 새롭게 국교(國敎)의 지위를 획득한 유교(儒敎)의 예() 관념에 따른 화이사상(華夷思想)이었고, 다른 하나는 왕의 덕()을 통해 이상적 질서가 이()에까지 미치게 된다는 왕화(王化)사상이다. 책봉 체제는 왕화의 일환으로서, 이적(夷狄)으로 분류되는 여러 나라들이 중국의 예()를 받아들이는 통로의 역할을 하였다(이성시, 143).

이렇게 하여 전파된 중국의 문화가 하나의 문화권을 이루고(동아시아 문화권), 그것이 중국과 주변 민족의 정치적 관계(책봉 체제)에 의해 뒷받침되면서 형성되는 자기 완결적 구조를 니시지마는 동아시아 세계라고 불렀다. 그의 논의에서 동아시아 세계는 수(() 시기에 절정을 맞았다가 당 멸망 후 경제적 교역권의 성격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후 명(() 대에 부흥·확대된 동아시아 세계는 19세기 유럽의 침략을 맞아 붕괴하게 된다.

애초에 니시지마의 논의에서 중심이 된 것은 6~8세기의 중국 각 왕조와 동쪽 지역 나라들(고구려, 백제, 신라, , 발해)’의 관계였다. 위에 언급된 동아시아 문화권의 공통 요소 또한 당대에 정비·완성된 것임을 감안할 때, 그 이전 시기, 5~6세기 남북조시기의 국제 관계를 검토하는 것이 동아시아 세계 형성에 대해 알아보는 중요한 관문이 될 것이다. 또한 남북조시기에는 외신(外臣)와 내신(內臣)의 구분이 누그러드는 양상을 보여 책봉 체제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남북조시기의 책봉-조공 관계의 성격과 의미에 대해 다루려 한다.

 

II. 5~6세기 동아시아 각국의 정치 상황

중국의 통일 제국 후한(後漢)3세기 초 멸망을 맞게 된다. 이후 삼국시대를 조조의 위(, 220~265)가 통일하고, 서진(西晉, 265~317)시대를 거쳐 중국은 북쪽의 북방 민족 5민족이 세운 16개의 국가(516)와 남쪽의 동진(東晋)으로 나눠진다. 420년엔 유송(劉宋)이 동진을 멸망시키고 등장하였으며, 440년에 북위(北魏)가 화북을 통일함으로써 남조와 북조가 대립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북위는 534년 동·서로 분열되었다가 각각 북제, 북주로 계승된다.

한편 5세기 북방에서는 유목민족 유연(柔然)이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6세기 중반에는 돌궐(突厥)이 유연을 무너뜨리고 제 민족을 거느리는 등 전성기를 맞았다가 6세기 후반부터 쇠퇴하는 경향을 보인다.

중국 동쪽에서는 광개토왕이 391년 즉위하여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끌고 있었다. 뒤를 이은 장수왕(413~491)427년 평양 천도를 단행하여 한반도의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는 정책을 폈다. 백제는 475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수도를 웅진으로 옮기게 된다. 웅진 천도 후 백제는 남조 국가와의 교섭에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 가야의 관계 또한 중시하였다.

이제 중국의 남, 북조, 유연과 돌궐 그리고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 각 국가의 내부 사정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1. 북조

(1) 북위

북위 태조(太祖) 도무제(道武帝) 탁발규(拓跋珪)의 할아버지 십익건(十翼犍)은 탁발부(拓跋部)의 지도자로서 대()를 세워 강력한 국가조직을 세우고 한족 국가체제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전진(前秦) 부견의 침입으로 대국은 와해되었는데, 386년 탁발규가 대왕(代王)으로 추대되면서 분열은 수습된다. 그는 곧 흉노부(匈奴部), 고고부(高庫部), 유연부(柔然部), 고막부(庫莫部)를 정벌하고 중원의 후연(後燕)과 대치하게 된다. 탁발규는 내부 흉노의 반란을 진압하는 사이 후연의 공격을 받기도 하지만, 이내 후연왕 모용수(慕容垂)가 죽고 후연이 분열된 사이 후연을 멸망시킨다(398).

태조의 뒤를 이은 태종 명원제(明元帝; 재위 409~423)는 남연(南燕), 북연(北燕). 대하(大夏) 평정에 힘쓰면서 유연에 대한 북벌을 이어갔다. 내부적으로는 태조의 유업을 이어 한족 통치를 강화하였다. 3대 세조 태무제(太武帝; 재위 423~452)는 먼저 대하를 격파하고 북연을 멸망시켰다. 이후 후량을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한다(440).

그러나 태무제 말년에 행성(杏城)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최호가 주살되어 많은 한족 사망(士望)이 희생되는 혼란이 일어난다. 그 가운데 황제도 환관 종애(宗愛)에게 살해된다(452). 뒤를 이은 고종(高宗) 문성제(文成帝)가 요절한 후 현조(顯祖) 헌문제(獻文帝)가 즉위하였지만, 문명태후(文明太后)의 압박으로 양위하여 고조(高祖) 효문제(孝文帝; 재위 471~499)가 즉위한다.

효문제 즉위 기간의 대부분은 문명태후의 섭정 기간인데, 이 기간 동안 호족(胡族)과 한족(漢族) 공신들이 핵심을 차지하게 된다. 또한 문명태후는 녹봉제를 실시하여 관리들의 개인적인 수취에 따른 부패를 막았다. 더불어 한화 정책도 강력히 추진하는데, 이는 낙양 천도(490), 복제 개혁, 선비어 금지, 호족성() 금지 등의 개혁으로 드러난다. 이 때 황실의 성씨도 탁발에서 원()으로 바꾼다.

그러나 효문제 사후 5세기 말 6세기 초에 북위는 쇠락의 징조를 보인다. 세종(世宗) 선무제(宣武帝; 재위 499~515) 시기에는 호족 출신 장군인 우열(于烈)이 외척으로서의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선무제 즉위 초에는 효문제의 동생 6명이 황제를 보필하고 있었는데, 우열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그 한 명을 제거하고 선무제의 친정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또한 고조(高肇) 역시 외척의 지위를 이용하여 붕당을 만들고 정권을 천단하였다. 숙종(肅宗) 효명제(孝明帝; 재위 515~528) 기간에는 중·하층 호족(胡族)의 반발이 거세어졌다. 효문제의 한화 정책 이후로 한족 관료들이 득세하는 가운데 호족 출신은 그 상층부에게만 특권이 보장되었던 것이다. 519년에는 호족 출신으로 구성되었던 금위군(禁衛軍) 병사 우림병(羽林兵)이 폭동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수괴 8명만을 처형하고 병사들에 대한 대우를 개선해주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한다.

그런데 524년에는 중앙이 아닌 국경의 6()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진은 원래 북위가 정복한 지역에 설치했던 것으로, 북변과 서북변에만 남겨둔 것이었다. 건국 초기에 진은 호한 양가(良家)의 자제들로 구성되어, 이들에게 여러 특권을 보장하였다. 그러나 북위가 화북 평정을 마치고 수도를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이들에 대한 대우가 소홀해졌다. 용렬하고 착취하는 진장(鎭將) 아래 진병(鎭兵)들은 천민처럼 되어갔던 것이다. 이에 524년 옥야진에서 반란이 시작되어 525년에는 장성 지대 전역으로 반란이 번졌다. 초기에 반군은 중앙의 토벌군을 격파했지만, 곧 항호를 이끈 반란이 다시 일어났다. 한편 동쪽에서는 만사(萬俟)씨가 중심이 되어 반란을 지속하고 있었다.

이주영(爾朱榮)은 산서 북부지방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성장한 인물로, 528년 황제 독살사건을 계기로 낙양을 점거하고 정권을 쥔다. 이 때 이주영은 황제 독살의 책임을 물어 영태후와 세 살의 황제를 물에 빠뜨리고 조사(朝士) 2천 명을 학살했다(하음의 변). 그는 곧 서쪽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 유민 10만을 동원해 동쪽의 반란까지 모두 진압했다(530). 그러나 곧 이주씨와 북위 조정 사이의 대립이 전개된다. 경종(敬宗) 효장제(孝莊帝; 재위 528~530)를 중심으로 한 조신 일파가 이주영와 그 큰아들을 주살하자, 이주씨 세력은 약화되어 고환(高歡)에게 패퇴하고, 고환은 업()에서 효정제(孝靜帝)를 옹립하여 동위를 세운다(532). 한편 고환에게서 탈출한 효무제(孝武帝)를 맞아 우문태(宇文泰)는 서위를 세운다(534).

 

(2) 동위-북제(北齊)

고환의 둘째 아들 고양(高洋)이 선양 받아 문선제(文宣帝; 재위 550~559)가 됨으로써 동위가 망하고 북제가 세워진다. 문선제 즉위 초엔 한족 출신이 등용되었으며 돌궐과 거란을 토벌하였다. 또한 남조와 북주를 제압하지만, 말년에는 많은 종실, 공신, 관료를 주살하였다. 북제의 정치는 매관매작, 수뢰, 가렴주구 등으로 점철되었다. 단명한 숙종(肅宗) 효소제(孝昭帝; 재위 560~561) 뒤에 즉위한 세조(世祖) 무성제(武成帝; 재위 561~565)에 이르러서는 국가 재정이 고갈되었으나 부패가 더욱 만연한 양상을 보인다. 북제 말기에 이르러서는 은행(恩幸) 세력을 필두로 분열 상태에 빠져 결국 577년 북주의 공격을 받아 북제는 패망한다.

 

(3) 서위-북주(北周)

분열 후 동·서위는 자주 충돌하였는데, 537년에는 사원(沙苑)에서 동위의 고환을 격퇴하고, 546년에는 옥벽(玉璧)을 포위당했지만 겨우 승리한다.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556년 선양을 받아 북주 효민제(孝閔帝; 재위 557~559)로 등극한다. 북주는 북위 효문제 이래의 한화 정책에 반대하여 선비족 풍습을 되살리는 동시에 주례(周禮)에 의거한 정치체제를 만들어 냈다. 무제(武帝; 재위 560~578) 시기에는 우문태의 조카인 우문호()가 독재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572, 무제는 호를 주살하고 친정을 시작한다. 무제는 준비된 바에 따라 577년 북제를 멸망시키고 돌궐 정벌에 나섰다가 죽었다. 후를 이은 선제(宣帝)는 사치와 음일을 일삼아 즉위 1년 만에 양위하지만 곧 죽는다. 이 때 선제의 측근인 한인 출신 유방(劉昉)과 정역(鄭譯) 등이 위조(僞詔)를 작성하여 선제 양황후의 아버지 양견(楊堅)에게 권력을 몰아줌으로서 주·수 혁명을 가속화했다. 양견은 위지형(尉遲逈)과 사마초난(司馬肖難)의 반군을 각각 격파하고 581년 수() 문제(文帝)로 즉위한다.

 

2. 남조

(1) 유송(劉宋)

송 고조(高祖) 무제(武帝; 재위 420~422) 유유(劉裕)는 무력으로 수립한 권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토단(土斷)법을 실시하였다. 또한 군부의 통제권을 귀족이 아닌 왕족과 한족 출신 무인으로 옮겨오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어 즉위한 소제(少帝)가 폐위되고 즉위한 태조(太祖) 문제(文帝; 재위 424~453) 시기에는 소제를 페위시킨 세력을 제거하고 일류 문벌 출신들을 요직에 앉혀 문치의 기풍을 일으켰는데, 이를 원가(元嘉)의 치()’라 한다. 문제는 이어 사학(四學)을 세워 교육을 일으켰다. 그러나 선비족 탁발부의 남진에 맞선 북벌은 대부분 실패하였다.

이에 황태자와 그 동생이 문제를 시해했는데, 이 때 변방에 있던 셋째 아들 유준(駿)이 이들을 격파하고 제위에 올라 효무제(孝武帝; 재위 453~464)가 되었다. 효무제 시기에는 중앙집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군사력 증강이 추진되었고, 이에 따라 증세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도를 넘은 증세와 그 과정에서의 부패는 오히려 사회의 반발을 일으켰다. 뒤를 이은 전폐제(前廢帝) 유자업(劉子業)에 반한 쿠데타로 집권한 명제(明帝; 재위 465~472) 즉위 초에는 효무제의 여러 아들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양측에 광범한 지방호족이 참여했기 때문에 쉽게 진압되지 못하다가 1년 만에 진정되었다.

명제의 큰아들 욱(; 후폐제) 재위 시에는 종친 허공여(許公輿)가 난을 일으키는데, 이 때 성장한 소도성(蕭道成)은 날로 권세가 커져 478년 제위에 올랐다.

 

(2) 남제(南濟)

소도성이 재위 3년 만에 죽고 즉위한 세조(世祖) 무제(武帝)원가의 치의 재현을 표방했다. 무제는 세제를 개혁하여 지방관에게 임명했던 징수를 관이 관리하도록 하였다. 또한 호적 위조자에 대한 처벌도 강화했지만,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무제 사후에는 다시 내란이 펼쳐졌는데, 두 명의 황제가 폐위되고 즉위한 명제(明帝)5년 만에 죽고 동혼후(東昏候)가 즉위했다. 동혼후는 국권을 농단하고 사치를 즐기는 등 폭정을 했다. 이 때 반군을 일으킨 최혜경(崔慧景)을 진압한 소의(蕭懿)가 참언에 의해 주살되는 일이 일어난다. 소의의 동생 소연(蕭衍)은 군사를 일으켜 화제(和帝)의 선양을 받아 502년 즉위한다.

 

(3) ()

양 고조(高祖) 무제(武帝; 재위 502~549) 소연은 박학다재(博學多才)하고 문학에도 탁월하며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먼저 동혼후의 측근 41명을 주살하고 혼란한 제도를 바로잡았다. 특히 관제개혁에서 무제는 관속의 청탁(淸濁)의 구분을 타파하고자 하였다. 또한 귀족 문벌이 아닌 귀족적 교양을 가진 자를 등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학관(學館) 시험제도를 장려하였다. 또한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어 학문 진흥에 힘썼다. 무제 치세 간 남조는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후반에는 정치 부패와 종실, 귀족의 불법을 방임하는 부작용도 나타났다.

무제는 또한 군사에도 소홀했는데, 534년 북위가 분열했을 때도 북방의 항인(降人)을 이용하여 불로소득을 얻으려고만 하였다. 이에 후경(侯景)이 난을 일으키게 된다. 후경은 동위 고환 밑에 있던 자로, 고환 사후 동위 세력 균형이 깨지자 양에 항복했다. 직후 후경은 동위군의 토벌을 받는데, 이 때 양이 동위와 화친을 진행하자 548년 건강을 포위한다. 이 때, 문제 사후 여러 왕자들 사이에 대립이 심해져 있었다. 후경은 소릉왕(邵陵王) 소륜(蕭倫)이 차지하고 있던 무창(武昌)을 공격하는데, 상동왕(湘東王) 소역(蕭繹) 밑에 있던 왕승변(王僧辯)과 합류한 진패선(陳覇先)의 공격을 받아 포살되었다(552). 곧 역이 제위에 올라 세조(世祖) 효원제(孝元帝)가 된다. 효원제는 무릉왕(武陵王) 소기()가 점령한 촉을 공격했으나 서위가 이를 차지해 버린다. 서위의 남진에 대해 효원제는 화의를 청하는데, 서위는 악양왕(岳陽王) 소찰()을 양왕으로 삼아 괴뢰국 후량(後粱; 554~587)을 세운다(554).

한편 동쪽의 북제는 왕승변에게 동위의 포로가 된 소연명(蕭淵明)을 황제로 세우기를 강요하였는데, 서위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북제의 후원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왕승변은 이를 승낙한다. 그런데 이를 구실로 진패선이 왕승변을 죽이고 소방지(蕭方智; 梁 敬帝)를 옹립했다. 북제 세력을 등에 업은 장수들을 격파하고 북제의 군대마저 패퇴시킨 진패선은 557년 선양을 통해 진()을 세운다.

 

(4)

2대 문제(文帝; 재위 559~566) 시기에는 황제의 영향력이 건강 밖을 벗어나지 못했다. 진은 북주와 영토 투쟁을 벌이다가 569, 효선제(孝宣帝; 재위 569~582)가 즉위하는데, 효선제 즉위 초 북주군을 패퇴시킨다. 진은 북주가 북제를 정벌하는 사이 침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589년에는 수 문제의 공격을 받았지만 거의 무저항 상태로 건강이 함락된다.

 

3. 유목민족

(1) 유연

유연은 욱구려(郁久閭)를 성으로 삼으며, 십익건 시기에 대에 복속하였다가 십익건이 죽자 배반하였다. 4세기 말 5세기 초 북위 태조 도무제가 유연을 정벌하여 부락의 절반을 사로잡자 다시 항복하였다. 구두벌가한(丘豆伐可汗) 욱구려사륜(社倫; 재위 402~410) 시기에는 고차부를 점령하고 북위와 대립하였다. 구두벌가한은 흉노를 격파하고, 402년 북위가 후진(後秦)을 치러 간다는 말을 듣고 북위의 변경을 침략하였다. 그러나 410년 명원제의 추격을 피하는 중 죽었다. 10년 간 화평이 유지되다가 유연은 424년 북위를 침략하는데, 이에 대한 반격으로 태무제가 429년 출정하여 431년 유연의 조공을 받았다.

434년 북위는 유연의 칙련가한(敕連可汗) 욱구려오제(吳提; 재위 429~444)와 서해공주를 결혼시킨다. 그러나 유연이 436년 화친을 깨자 북위는 438년에서 458년에 걸쳐 북벌을 단행하였다. 수라부진가한(受羅部眞可汗) 욱구려여성(予成; 재위 450~485)475년 북위에 혼인 맺기를 요청하며 공물을 바쳤지만, ‘매년 조공을 끊지 않으면서도 화약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予成雖歲貢不絶 而款約不著 婚事亦停; 위서 역주 250p]’는 이유로 혼사가 중지된다.

520년에는 내란에서 패배한 칙련두병두벌가한(敕連頭兵豆伐可汗) 욱구려아나괴(阿那瓌; 재위 520~552)가 북위로 귀항하였으나 521년 본국으로 돌아가 532년 북위에 조공한다. 534년 동, 서위가 분열하였을 때 이들은 경쟁적으로 아나괴와 우호적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처음에 가한은 서위와 결혼 동맹을 맺고 동위와의 화친에는 성의를 다하지는 않았으나, 서위에 보낸 자신의 딸이 사망하자 동위에 귀부하였다. 그러나 552년 유연이 돌궐에게 패배하자 가한이 자살하였고, 553년 다시 돌궐의 공격을 받은 유연은 북제로 도망하였다. 554년에 동쪽으로 옮긴 유연은 북제를 치고자 하였다가 다음해 정벌되었다.

 

(2) 돌궐

6세기 중반 등장한 목간가한(木杆可汗) 아사나사근(阿史那俟斤)은 장성 밖 여러 민족을 평정했다. 561년에는 북주에 세 차례에 걸쳐 토산물을 바쳤다. 북주는 북제와의 싸움에 돌궐군을 포함시켰는데, 564년에는 북제를 공격했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돌궐이 중국을 약탈하고 돌아간 일이 일어났다. 북제와 북주는 서로 싸우는 가운데 돌궐의 침략을 피하기 위해 많은 양의 재물을 바쳤다. 수 문제 즉위 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을 약탈하고 한편으로는 토산물을 바쳤다.

 

4. 고구려와 백제

(1) 고구려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 재위 391~413)은 즉위 초 4년 간 백제, 거란 정벌에 힘쓴다. 그러나다 399년 후연에 조공하는데, 바로 다음달 예가 오만하다는 이유로 후연이 침공하였다. 403년에 광개토왕은 후연에게 반격을 가하는데, 404~405년에 걸친 후연의 공격을 막아낸다.

이어 즉위한 장수왕(長壽王; 재위 413~491)425년 북위에 조공했다. 427년에 수도를 남쪽 평양으로 옮기는데, 이후 북위와의 충돌을 피하면서 수차례 조공한다. 455년에는 남조 송에 조공하여 책봉 받는다. 472년 백제 개로왕(蓋鹵王)이 고구려를 치고자 북위에 군사원조를 요청했는데 거절당하고, 475년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한성을 함락하여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했다. 장수왕은 북조와 남조에 각각 조공하며 균형을 유지했는데, 480년에는 남제로 보내는 사신이 북위에 억류되기도 하였다.

문자왕(文咨王; 재위 491~519)이 즉위하자 북위에서 사신을 보내 축하하였다. 문자왕 재위 시에 부여가 항복하였으며, 신라와 연합한 백제(433년에 동맹이 체결됨)를 공격하였다. 양이 건국되자 양에도 사신을 보냈다. 고구려는 남북조 국가들과 우호적 관계를 지속하였다. 북위가 분열된 후로는 동위-북제에 사신을 보냈다.

 

(2)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375) 때에 기틀이 다져진 백제는 5세기 초 고구려, 신라 양국과 대립하였다. 433년에는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475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수도 한성이 함락되자 수도를 웅진으로 옮겼는데, 웅진에 수도하던 시기에는 남조 국가와 왜와의 교류를 중시하였다.

5세기 말에는 귀족 세력이 커져 정국이 불안했는데, 6세기 초 무령왕(武寧王; 재위 501~523)에 이르러서는 왕권이 안정되었고, 양나라에 조공하여 책봉 받았다. 538년에 성왕(聖王; 재위 523~554)이 수도를 사비로 옮겨 부흥을 꾀했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전사하자(554), 당시 성장하던 신라와의 동맹을 끊고 고구려와 화친하였다.

 

III. 남북조 시대 조공-책봉 관계의 특질

이상에서 5~6세기 중국과 주변 국가들의 정치 상황을 알아보았다. 이제는 5~6세기, 즉 남북조시기에 행해졌던 조공-책봉 관계의 특질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 편으로는 책봉을 하는 국가(책봉국)의 입장에서, 다른 한 편으로는 책봉을 받는 국가(조공국)의 입장에서 이 특성을 보려 한다. 책봉과 조공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서로 상보적으로 일치하는 관계라는 전제를 두겠다.

이와 관련하여 430년대 북연을 둘러싼 북위와 고구려의 대립이 주목된다.

 

1. 북연을 둘러싼 북위와 고구려의 대립

전술한 대로 북위는 화북에서 세력을 넓혀 440년에 화북 평정을 마무리 짓는다. 이 때 마지막으로 멸망시킨 나라가 북연인데, 430년대 북연은 매우 급박한 상황에 놓인다. 이에 북연은 435년에 남조 유송에 칭신을 했으며, 고구려에도 원병을 요청하고 고구려 영내 망명을 허락해줄 것을 요구했다. 노태돈(1999)에 따르면, 평양 천도(427) 직후 우호적이었던 북연을 공격해 오는 북위는 고구려에게 큰 위협이었다. 이에 435년 고구려와 북위는 조공과 책봉의 형식으로 서로의 의중을 살핀다. 그런데 북위가 유연과 고구려를 비롯한 국가들에게 외교적 압박을 주었음에도 436년 북연의 수도 화룡성(和龍城)에서 북위와 고구려군이 마주친다. 이 때 북연에서 친북위파와 친고구려파가 분열돼 있는 사이 고구려가 먼저 황제 풍홍(馮弘) 등을 이끌고 요동으로 온다. 북위에서는 고구려를 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낙평왕(樂平王) ()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 고구려를 치러 간 사이 유연이 후방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풍홍이 남조와 연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를 죽이고 송과의 갈등을 진정시킨다. 동시에 북위에도 사신을 보내 전쟁 고비를 넘겼다.

노태돈은 여기서 북연이 유연과 어떠한 형태로든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는 하-유연, 북량-유연의 관계를 볼 때도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북연 멸망 후에도 고구려와 유연의 관계가 각별했을 것인데, 이는 479년 양국이 유목민족 지두우(地豆于)를 분할하려 한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다. 북연을 둘러싼 북위와 고구려의 일시적 대립은 남북조 시대의 동아시아 국제 관계의 일면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 유연-남조-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연결이 북위의 팽창을 정교하게 견제하는 형세였던 것이다.

 

2. 책봉국의 입장에서 본 남북조 시대의 조공-책봉

위에서 살펴봤듯 남북조 시대 중국 각국의 내정은 오랜 기간 안정이 유지된 바가 없으며, 주변 민족이 강성했고, 또한 국제 관계가 매우 유동적이어서 중국의 국가가 일방적으로 성장하거나, 주변의 민족에게 강력한 통제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위에서 언급했듯 화이사상과 왕화사상을 바탕으로 만든 조공-책봉 관계를 지속할 만한 강력한 구심점이 없던 것이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중국측의 인식은 조공국에게 하사한 책봉호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김종완의 연구에 따르면, 남북조 시대에만 나타나는 조공-책봉 관계의 특질은 내신(內臣)와 외신(外臣)의 구분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남북조시기 중앙권력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했는데, 지방 반란의 진압을 위해서는 군현제의 변화뿐 아니라 지방 호족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었다. 이에 주()의 자사(刺史)에 유력 호족을 임명하여 그 지방을 간접 통치하는 방식이 널리 퍼졌는데, 이것이 국제 관계에서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한편, 중국의 전통적 권위를 버리고 주변국의 성장을 방관할 수만도 없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주변국에게 내린 책봉호는 첫째, 도독구(都督區)의 범위가 불분명하며, 둘째로 임의로 설정한 허주(虛州) 또는 피책봉국의 지배력 밖에 있는 지역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 지적된다. 특히 북방민족과의 관계에 있어 중국은 종주국으로서의 권위를 지키지 못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유연의 아나괴의 경우를 보아도 자신의 이익에 따라 중국에 복속했다가 독립하여 중국을 약탈하는 경우가 있고, ·서위에서 경쟁적으로 유연과 화친을 맺으려고 한 점을 보아도 그러하다. 또한 돌궐의 경우에서도 북제와 북주가 비슷한 행동을 보인다.

이에 책봉 관계의 이상을 실제에 맞추어 만들어낸 자구책이 바로 내·외신의 구분을 없애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 화이의 구분을 중시하는 것이 아닌, 화이일체를 강조함으로써 현실적으로 지배할 수 없는 주변국에 대한 간접지배를 가능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는 당시 사용되었던 직공(職貢)’이라는 말과도 관련이 있는데, 직공이란 제후가 천자에게 공헌(貢獻)하는 의례의 일종이었다고 한다.

 

3. 피책봉국(조공국)의 입장에서 본 남북조 시대의 조공-책봉

그렇다면 당시 조공국의 관점에서 책봉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임기환(2002)에 따르면 그것은 외교의 한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는 남조와 북조와의 관계를 다르게 설정하였으며, 각각 독자적인 방식으로 조공-책봉 관계를 맺고 있었다. , “책봉·조공은 그것이 갖는 보편적인 형식에도 불구하고 각 국가별로 맺고 있는 내용성이 너무 차별적이었다(임기환, 2002, 22~23). 일례로, 고구려와 송의 관계는 지속적이지만 빈번하지는 않은 반면, 북위와의 관계는 특정한 몇 시기를 빼놓고는 매우 빈번한 왕래가 있었다. 또한 북위와의 긴장도가 높았던 시기에도 이 관계를 적극적으로 구사하여 대북연 작전을 성공시킨 예가 있다.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중국으로부터 제수받은 책봉호는 고구려의 입장에서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볼 수 없다고 한다. 임기환은 광개토대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에 있는 고구려의 세계 인식을 통해 이를 거꾸로 유추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비문에 고구려가 백제·신라를 치는 것은 두 나라가 조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반면,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는 군신의 관계가 아닌 태왕(太王)-노객(奴客)’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라는 고구려의 조공국으로 인식되고 있음에도 고구려의 태왕과 신라의 노객을 구분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가 중국 국가들에 하는 조공 역시 정치적 복속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이다.

반면, 고구려만큼 스스로 강력한 국가가 되지 못했던 백제로서는 중국 국가의 책봉이 왕의 권위를 유지하는 데에 중요한 요소였을 것이다. 한성 수도 시기였던 427년에 아무런 정치적 구실없이 북위에 고구려를 치고자 원병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예가 있고, 또한 고구려과 달리 중국 국가와 영토를 접하고 있지 않았음에도 남천 이후 남조 국가와의 관계에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실제로 백제왕이 자신의 신료들에게 가행직(假行職)을 내리고 남조 황제에게 정식 제수를 요청하는 점이 백제의 조공-책봉 관계의 특질이라고 한다.

 

IV. 꼬리말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5~6세기에 걸친 시기에 중국은 남조와 북조 모두 혼란스러운 시기였으며, 북방의 유목국가와 동방의 고구려가 성장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들에 대한 물리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조공-책봉의 관계는 전통적인 모습처럼 실현될 수 없었다. 따라서 남북조의 국가들은 내신의 관작과 외신의 책봉호의 구분을 없앰으로써 현실적으로 지배할 수 없는 지역에 대한 간접지배를 형식상에서나마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형식상에서 보편성을 지닌다 하더라도 내용상에서는 각국과의 관계에서 서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우선 고구려의 경우, 중국 국가와의 정치적 관계에서 하나의 전략으로서 조공을 택한 반면, 백제의 경우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책봉을 이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중국 국가가 그들보다 실질적으로 강력하였던 북방 유목민족에게 책봉을 하지 않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역사적으로 중국이 주변국에게 실질적 조공을 한 사례가 있음을 고려할 때, 조공-책봉 관계가 중국의 일방적 우위 속에 이루어진 외교의 한 형태라고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 시기의 조공-책봉 관계가 아주 의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고구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조공-책봉의 관계가 자신의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양성적 방법임을 고려했을 때 이는 탈중국화의 한 형태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형식적으로 고구려는 중국 왕조에 조공을 하는 국가였다. 이는 통일왕조인 수·당 시기에도 그대로 이어졌으며, 특히 남북조시기 조공-책봉 관계의 경험이 거의 없었던 신라에게는 더욱 그러하였다. , 탈중국화를 위해 맺었던 관계가 중원 통일왕조-신라의 관계 속에서는 오히려 강력한 중국화의 통로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남북조 시대에 행해졌던 조공과 책봉의 관계는 당시의 복잡한 외교 관계와 이후 통일왕조 시기의 (상대적으로) 단순한 외교 관계를 이어주는 형식적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남북조 시대의 조공-책봉 관계는 후대의 단순한 외교의 연장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 독자성을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V. 참고문헌

1. 단행본

*노태돈,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999

*동북아역사재단,위서 외국전 역주역주 중국 정사 외국전7, 동북아역사재단

,북사 외국전 역주역주 중국 정사 외국전9, 동북아역사재단

*이공범,위진남북조사, 지식산업사

*이성시,만들어진 고대, 삼인

 

2. 논문

*이성규,중화제국의 팽창과 축소: 그 이념과 실제,歷史學報186

*여호규,6~8세기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연구의 진전을 기대하며,역사와 현실61

*김종완,南北朝時代冊封에 대한 檢討,東亞硏究19

*김종완,高句麗朝貢冊封의 성격 -正體性關係하여-,高句麗硏究18

*임기환,南北朝期 韓中 冊封·朝貢 관계의 성격,한국고대사연구32

*박정기,5~6세기 高句麗北魏 관계의 추이 -북위 文昭皇后 高氏의 등장과 관련하여-,지역과 역사19

*김위현,中原王朝朝貢事例硏究,高句麗硏究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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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글이니, 오래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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