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학년도 겨울, 종교개혁사

 

종교개혁 이후의 이야기

-서유럽 근대 사상의 계보들-

 

I. 들어가며: 서유럽 사상의 흐름과

무언가를 이해하는 일과 수용하는 일은 사뭇 다른 일인 것 같다. 나는 서양인의 소설과 시와 철학을 읽고 그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지만 과연 그것이 나에게 꼭 맞는 것인지에 대해선 항상 회의를 품었다. 그것은 종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마음속에 신전을 모시고 있더라도 그것이 꼭 예수 그리스도의 것일 필요는 없다. 나는 그것이 서양인의 정신사를 이루고 있는 사상과 인간의 계보에서 나의 자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들의 사상이 세계를 지배하고 일상 여기저기에 뿌리 내리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스스로를 찾아가고 굳게 서 있는 것에 대해 늘 불안하고 불편하다. 서양의 사상을 극복하는 일은 내게는 민족적 사명 같은 것이 아니라 내 실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의 관심은 서구의 사고방식을 읽고 이해하는 일에 뒤따라 항상 그것을 비판하고 극복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사실 수업 시간에도 서유럽의 발전이나 동양의 패배 등의 관념에 대해서 항상 불편함을 느꼈다. 그러나 어떤 사상에 대한 가장 좋은 비판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그것이 나온 토양에 그것을 다시 위치시킴으로써 보편성이라는 환상을 제거하는 일이다. 수업에서 기독교를 다룰 때에도 이런 방법이 돋보였다. 나는 내 나름대로 종교개혁 이후의 유럽을 조망해보고 싶다.

 

II. 각자의 자리: 종교개혁 이후의 서유럽 사유

중세 말과 근대 초에 걸쳐 있던 종교개혁의 시기를 끝낸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은 오스트리아로 축소되고, 영국과 프랑스가 또 다른 패권으로 부상한다. 여기서 기독교를 둘러싼 역사는 또 다른 분기점을 맞게 된다. 첫째로 두드러지는 점은, 종교가 사상을 포함했던 중세와는 달리 근대의 사상은 종교의 외피를 벗고자 했으며, 나중에는 사상이 종교를 포함하는 모양새를 띠게 된다는 점이다. 둘째로, 기독교 바깥의 사유가 서유럽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그것이 나중에는 과학의 이름으로 기독교를 적대시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그들의 적과 하나의 뿌리를 공유한다.

가장 먼저 부상하였던 것은 루터, 칼뱅 등의 종교개혁 세력이었다. 외에 데카르트-스피노자로 이어지는 또 다른 흐름이 등장하며, 한편 부르봉 왕조의 절대왕정 하에서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는 유물론적 경향이 계몽주의와 함께 부상했다.

 

1. 아리스토텔레스-아퀴나스 전통과 스피노자

먼저 데카르트(1596-1650)는 연금술과 신학을 포함하여 그가 프랑스에서 배운 모든 것을 회의하면서 네덜란드로 간다. 그에게 신은 분노의 신도, 사랑의 신도 아니고 다만 물질과 정신으로 나눠진 인간을 매순간 새롭게 창조하여 조화롭게 만드는 근거로서의 신이었다. 스페인에서 네덜란드로 건너온 유대인 상인의 아들인 스피노자(1632-1677)는 데카르트주의의 수정을 내세웠다. 그에 이르러서는 신과 세계가 하나가 된다.

그는 데카르트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도 아퀴나스가 제시한 바, 최고 완전성으로서 또 최종 근거로서의 신의 개념을 계승한다. 그러나 그의 철학에서 핵심적인 것은 바로 내재성이라는 개념이다. 아퀴나스의 신학 속에서 우리가 신을 알기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낮추고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보기 위해 지성을 갈고 닦아야 한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 신을 안다는 것은 우리의 내면의 욕망과 감정을 긍정하고, 동시에 내면과 세계를 직관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신과 인간이 분리되어 있던 구약시대, 한 명의 인간이 신이 된 신약시대를 넘어서 모든 존재자는 신의 양태mode이며, 거꾸로 모든 존재자가 하나의 신이라는 생각으로 나아간 것이다. 정치적으로 말해, 그에게는 교황이 필요 없다. 이는 칼뱅주의를 수용했던 네덜란드의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결론이다.

한편 그는 종교개혁 시기에도 여전히 신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던 라는 장벽을 허물고, ‘구원을 기쁨과 사랑으로 바꾸어 놓았다. 대개 죄의식의 근원은 자신의 내면의 감정과 욕동 때문인 반면, 스피노자는 오히려 그것을 긍정함으로써 신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신에 대한 사랑만이 가장 고귀하고 드문 것이라고 말한다. 바꿔 말하면, 자신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 경계를 넘어 인류와 모든 존재자에 대한 사랑이 신에게 다가가는 길인 것이다. 스피노자의 신은 죽지 않는 나르키소스이다. 신과 인간이 분리된 상태에서 신에 대한 사랑은 다른 인간 집단에 대한 적대로 이어질 수 있다. 영화 <Kingdom of Heaven>에서 기독교 진영과 이슬람 진영이 서로 신이 이것을 원하신다하며 싸우던 장면이 연상된다. 어쩌면 그의 철학은 예수의 대속 이후에 자연스럽게 따라 나와야 할 것이 뒤늦게 도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스피노자의 신-철학은 이데아가 이미 개별자 안에 내재해 있음을 주장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에 서 있다. 그럼에도 같은 전통 안에 있던 아퀴나스의 신학과는 달리 그의 철학이 교황청에 의해 이단으로 간주되었던 까닭은 다음에 있다. 아퀴나스의 신학은 초월적 신에 대한 지성적 앎을 강조한다. 그런데 인간은 모두 같은 정도의 지성적 능력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신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과 덜 아는 사람이 나누어지고, 이것은 카톨릭의 단계적 성직 제도를 정당화할 수 있다. 반면, 스피노자는 내재적 신에 대한 직관적 앎을 강조한다. 직관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교황청이 스피노자를 파문한 것은 정치적인 이유가 크다 하겠다.

요컨대 스피노자의 철학은 칼뱅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아퀴나스 전통의 결합의 산물이다. 그런데 후세에 미친 그 영향력은 크지 않다. 18세기 들어 상업의 중심지가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옮겨간 까닭에 네덜란드의 국제적 영향력이 적어진 것을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더 큰 요소는 그의 철학적 정서가 주변국,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정서와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둘은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했는데, 왕의 권위는 평등주의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

한편 독일의 라이프니츠, 그리고 헤겔이 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후에 유물론의 뒤를 이은 기계론이 유럽을 지배할 때, 생명의 내재적 에너지와 자발적인 창조적 진화를 앞세운 베르그손(1859-1941)이 등장하여 이 전통을 계승했다.

 

2. ‘퓌지카전통과 경험주의, 프랑스 유물론

디드로와 달랑베르를 위시한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은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을 공격하며, 인간에게서 정신을 말하는 것은 또다시신을 인간의 주재자로 끌어들이는 꼴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주권을 말하기 위해 신을 부정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공동 작업을 했던 1751-80년은 부르봉 왕조의 절대왕정이 극에 치닫고 있던 시기와 일치한다. 루이 14세 때 낭트 칙령이 폐기되면서 당대 프랑스에는 카톨릭을 내세운 중앙집권 체제에 저항하는 개신교도들이 거의 청소당하고 없었다. 또한 전통적으로 로마 교황과 게르만 황제가 서로 명분과 세력을 앞세워 자신이 고대 로마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던 구도에서 프랑스는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절대왕정에 대한 반대 세력이 반-카톨릭을 넘어 신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 네덜란드의 공기에서 신은 비인격적인, 세계 자체로서의 존재자였던 반면, 프랑스인에게 신은 곧 그들의 왕을 연상케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이들의 사고방식에 하나의 흐름을 더한 것은 이전 시기 영국에서 일어난 지적 발전이 아닐까 생각한다. 애초에 영국인들이 프랑스에 약 100년 정도 앞서 그들의 왕을 처형한 경험이 있을 뿐 아니라, 백년전쟁(1337-1453) 이후 두 나라가 독립적인 노선을 취했다고 해도 서로를 경쟁자로 인식하면서 문화적 교류를 끊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서로 로마제국의 정통을 내세우는 가운데 프랑스가 그 구도에 포함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1300년대에 교황을 아비뇽에 가두는 등 아예 손을 놓고 있던 것은 아니다. 반면, 영국은 특히 프랑스에 있던 영토를 상실한 백년전쟁 이후에는 이런 정통성 구도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런 영국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영국에서는 일찍이 경험주의적 전통이 생겨났다. 베이컨(1561-1626)은 자신의 편견을 경계하며, 인간이라는 종의 눈도 의심하며, 말에 속지 말며, 권위를 맹종하지 말라고 우상의 비유를 들어 경고했다. 그의 주장은 이후 흄(1711-1776)에 이르는 영국 경험론의 기초를 닦았다. 한편 이는 우회적으로 성서가 아닌 전통과 권위에 의존하는 카톨릭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도 있다. 나아가 뉴턴(1642-1727)의 만유인력 법칙은 우주에 중심은 없으며, 어디든 질량이 있는 곳이라면 중심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비록 뉴턴 자신은 과학주의를 내세우거나 철저한 경험주의를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그 파급력은 서유럽 전역에 미쳤다. 뉴턴의 역학은 사실 이론 물리학으로서, 측정보다는 계산을 중시했다. 그런데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활동하던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연금술에서 화학으로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었다. 화학은 경험적 측정으로부터 이론으로 나아가는 전형적인 경험과학이다. 이런 경향 속에서 칸트 철학의 뒷받침을 받은 뉴턴의 물리학이 적극적인 과학주의로 수용되었다. 이것이 앞서 언급한 당대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프랑스에 유물론적 경향을 확산시키는 데에 일조했을 것이다.

앞서 네덜란드의 스피노자주의가 큰 사회적 파급력 없이 계승된 것과 달리 프랑스 유물론은 1789년에서 1848년에 이르는 혁명의 시대를 이끌어가기에 적합했다. 한편 유물론자들은 혁명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주의(코뮌주의commune-isme)를 구상했다. 한 세대 후의 유물론자인 마르크스가 비판했던 생-시몽(1760-1825)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처음에 기독교 비판을 들고 나왔던 유물론이 이상사회를 그려가는 데에 있어서는 기독교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몽은 아예 기독교적 형제애와 산업사회의 조직이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 평등, 형제애 역시 종교개혁 시기에 등장한 그리스도인의 자유, 신 앞의 평등, 그리고 평등을 바탕으로 한 인류애인 형제애를 번안한 것으로 보인다.

 

3. 플라톤주의-아우구스티누스 전통과 루터, 하이데거

한편 루터와 칼뱅은 인간을 결여된 존재, 죄인의 영혼으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플라톤주의-아우구스티누스 전통 안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전통은 마치 해저의 흐름과 같이 평소에는 잠재해 있다가 역사적 전환기가 오면 물의 흐름을 바꿔놓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대 아테네에서 플라톤이 그랬듯, 로마 말기의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랬듯, 중세 말기에 루터가 등장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는 인간의 내면을 바라보았으며, 그 안에서 죄의 가능성을 보고 신에 대한 전적인 의탁을 말하였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죄와 악이 다만 의 결여라고 보았는데, 루터는 여기서 나아가 그 결여가 인간의 행위로 인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 채워질 수 있다고 보았다.

루터가 발견한 근대적 자아는 라이프니츠(1646-1716)를 거쳐 칸트(1724-1804)의 자아 철학으로 이어졌다.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의 신--세계를 모나드라는 하나의 자아 안에 압축시켜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서로 소통하지 않는 모나드 간의 조화를 주재하는 신을 또 놓았다. 칸트는 신이 없으면 인간의 도덕적 실천이 불가능하다고 보았으며, 여기에 더해 영혼의 불멸이라는 플라톤적 개념을 요청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앎의 영역과 실천의 영역을 날카롭게 나누었다는 점이다. 그는 라이프니츠의 자페적 철학과, 흄의 경험론과 뉴턴의 물리학을 결합시켰다. 칸트는 과학주의를 인식론적으로 정당화하는 한편 실천의 영역에서는 과학주의를 거부했다.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 행위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칙이 되게 하라는 그의 정언명령은 근대의 십계명이다. 한편 그가 죽음 이후의 심판을, 그리고 심판을 주재하는 신을 요청한 까닭은 정언명령만을 가지고는 인간의 끊임없는 도덕적 타락을 막을 수 없다는 루터적인 깨달음이 담겨 있다.

이는 후에 후설(1859-1938)의 현상학으로 이어지기는 한편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그 적통은 덴마크의 키에르케고르(1813-1855)의 실존주의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 성직자의 매개를 거부하였던 루터의 정신이 신 앞에 선 단독자라는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는 아브라함이 기독교 신앙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그의 신앙의 양상에서 찾는다. 늦게 얻은 아들 이삭을 번제 제물로 바치라는 신의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한 음성을 듣고 아브라함은 그것이 보편적 윤리와 대립하는 것을 느낀다. 그 대립에서 비롯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그 명령을 이해하려는 의지를 갖지 않고 다만 신에 대한 절대복종으로 결단하여 복을 받았다. 인간의 법은 인간의 법일 뿐, 개별적인 현존재에게 내려오는 신의 음성이 그것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20세기 말에 이 전통은 유물론으로부터 이어진 과학주의, 기계론과 맞서 인간성을 부르짖은 하이데거(1889-1976)의 실존주의로 거듭난다. 하이데거는 키에르케고르의 신을 내면의 목소리로 가져온다. 그것은 나의 존재 자체이며, 군집 속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안을 잊고 안주하는 중성적인 대중(das Mann) 속으로 스며들어가고 현실에 타협하고 싶은 욕구에 맞서 나 자신으로 곧게 서라라고 외치는 목소리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이 신의 부조리한 음성 앞에서 두려워할 때, 하이데거의 실존은 죽음이라는 절벽에 서서 자신의 본래적 목소리를 듣는다. 오필리아의 묘지 앞에서 덴마크의 왕 햄릿(Hamlet the Dane)’이 되기를 결단한 햄릿처럼 말이다.

이 전통이 루터에서 하이데거로 오면서 가진 특징은 처음의 인간의 윤리적 결여가 키에르케고르에서는 동시에 존재적 결여이다가, 하이데거에 와서는 완전이 존재적 결여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루터는 인간의 윤리적 구원은 오직 믿음을 통해 가능하다 보았고,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적 구원은 오직 죽음 앞에 서서 본래의 자신을 회복할 때 가능하다 보았다. 그의 사상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알베르 까뮈(1913-1960), 장 폴 사르트르(1905-1980)로 이어져 세계를 흔들었다.

 

III. 나아가며: 순환하지 않는 순환

고뇌하는 인간, 스스로에게 부과한 양심이라는 짐에 허덕이는 인간, 죄책감과 우울과 죽음의 유혹으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하는 인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사람들을 멜랑콜리커라고 불렀다. 그는 창조적인 분야의 뛰어난 인물들 가운데 이들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인간상은 비록 주류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변화의 분기마다 등장하여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 헬레니즘 시대에 유행하던 쾌락주의에 반대했으며, 루터의 경우 중세제국이념과, 하이데거는 테크놀로지를 앞세워 인간성을 파괴했던 근대적 기계론과 맞섰다. 이렇게 보면 1517-1648년의 종교개혁은 직선적인 진보의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순환하지 않는 순환의 일부인지도 모르겠다.

비록 이들이 서유럽 사회의 주류는 아닐지라도 이들이 가진 정서, 특히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서유럽 문명에 넓게 퍼져 있는 것 같다. 이것이 예수에서 아우구스티누스로, 루터로 이어지는 하나의 전통을 만들었고, 다시 루터에서 하이데거로 이어지는 새로운 전통으로 이어졌다. 근대 철학의 완성자라 불리는 헤겔(1770-1831)은 독일 이상주의라는 루터적 전통과 스피노자를 결합했으며, 마르크스(1818-1883)는 여기에 프랑스 유물론을 결합하여 세계를 뒤흔든 강력한 혁명이론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그의 철학에는 여전히 형제애에 기반을 둔 인류애와 예술에 대한 흠모(예술은 플라톤적 전통에서 중요한 주제이다), 자유로운 인간성의 회복을 향한 강한 열망이 있다. 이 주제는 교회가 지배하던 서유럽 중세에서도 꾸준히 반복된 것들이다.

그럼에도 미국을 포함한 서유럽 문명은 자본주의의 폭주를 막지 못했고, 제국주의 운동을 통해 강제로 세계화가 이루어진 현대에 들어서는 그 모순이 가난한 국가에 집중되고 있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어두운 그림자가 처음에는 프랑스로, 다음은 독일로, 그 다음은 러시아로 향하면서 대폭발을 일으켰듯이 말이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것을 두고 죽음의 문화라 말한 바 있다. 현대의 천박한 자본주의는 서유럽 문명의 피할 수 없는 어두운 면이다. 그것은 사상사적으로 보면, 각 시대의 영웅들이 죽음을 끌어들여 삶을 정당화하고 긍정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이 힘을 잃을 때쯤, 생명의 힘 옆에 환관처럼 비켜서 있던 죽음이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예수가 버림받은 자들, 약자들을 향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설하였을 때, 그 말씀은 곧 압제자의 칼날에 깃들었다. 서유럽 사람들이 발달된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죽음을 버리고 삶을 취할 때, 그들이 버린 죽음은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를 향해 날아간다.

그리고 바로 지금, 여기의 우리들이 그 죽음의 문화의 한복판에서 고통 받고 있다. 150여 년 전,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마태복음 구절을 인용하며,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진혼곡을 지었던 브람스의 음악이 하나의 예언처럼, 위로처럼 들린다. 이 수업을 통해 나는 내가 서유럽의 고대와 근대에 대해 따로따로 알고 있던 것들에 중세의 이야기를 더하면서 그것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낼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이렇게 그들의 사상을 역사 속에 위치시켜 놓고 보니, 과연 그들의 사상 속에서 지금-여기의 문제를 극복할 완전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까 회의가 든다. 서양 문명의 옷을 입었어도 우리는 여전히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브람스의 진혼곡이 끝나갈 즈음이 되어서도 이 의문은 여전히 남아 앞으로의 숙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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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주제는 "서구 기독교 역사에 대한 자신의 해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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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터스텔라>는 서구적인, 나아가 미국적인 상상력을 현대 과학과 기술을 통해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역사의 첨단에 서 있다. 그러나 그 무의식에 흐르는 서유럽 전통은 이 영화를 진부하게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 특히시간에 대한 그들의 뿌리깊은 의식에 나는 주목했다. 초반 영화의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프로젝트의 이름은 ‘Lazarus’, 즉 예수에 의해 부활의 기적을 체험한 나사로의 이름을 따왔다. 전 지구가 사막화되고 해마다 병충해가 휩쓰는 가운데 식량이 부족해지고, 사람들의 모든 관심과 역량이 생존에 집중되는 상황이었다. 인류 차원에서죽음이 임박하는 가운데 소수의 과학자들이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서 인류를 부활시킬 계획을 하고 있었다. 우연히 이 일에 참여하게 된 주인공 쿠퍼가 기약 없는 탐험(?)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가족에 대한사랑’, 특히 딸에 대한 각별한 사랑이었다.

 

죽음과 사랑이라는 이 사태는 서로의 중력장 안에서 서로를 끌어당기며 회전하는 펄서pulser와 같이 한 번씩 번갈아 등장하며 영화의 줄거리를 짜 나간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우주로 떠난 이들이 토성 근처의 웜홀을 통해서 맨 처음 도착한 곳은 물로 뒤덮인 행성이었다. 이곳에서 이들은 동료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곳에서 지구 시간으로 23년을 보내고 돌아온 그들은 부족한 연료로 남은 두 후보 행성 중 한 곳을 선택해야 했을 때, 사랑과 이성reason 사이에서 갈등한다. 결국이성을 선택한 그들의 기대는박사의 기만으로 배신당한다. 하지만 달리 보면, 죽음이 임박한 그 행성의 환경에서 탈출하고 살아남기 위해 데이터를 조작하는 일은 만 박사에게이성적인선택이었다. 생존을 위해서그러나 생존을 앞세운 이성이 충돌할 때, 오직 죽음만이 그들을 기다린다. 이성이 가져오는 파국을 뒤로 하고 쿠퍼와 아멜리아는 각자의 사랑의 장field로 갈라졌다.

 

사람들은 이어지는 블랙홀 내부 장면을 영화의 복잡한 갈등을 한 번에 잘라버리는기계장치 신Deus ex Machina’으로 이해했다. 실제로 이 장면은 정말 뜬금 없이 등장해서는 영화 내내 불가능할 것으로 비쳐졌던 플랜 A를 극적으로 성공시켰고, 심지어 과학적으로도 상식에 어긋난다. 그러나 영화의 논리에 따르면, 이 장면은 불가피했다. 영화 초반에 등장한 대사오직 중력만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전달될 수 있지가 여기서는오직 사랑만이 시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지로 변주된다. 이 지점에서 시간(시공간)과 중력의 대립은 죽음과 사랑의 대립으로 치환된다. 중력이 시공간의제약을 뛰어넘듯, 사랑이야말로 죽음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생각이 담겨있는 것이다. 주인공 쿠퍼는 딸 머피에게 비밀스러운사랑의 언어로 그 열쇠를 건네주었다시간이 멈추는 곳에 사랑과 생명이 있을지니.

 

여기까지만 보면 이 영화는 훌륭하게 진부한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한 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단순한 블록버스터보다는 더 신선하게 만들면서, 한편 다른 방향으로 또 진부하게 만든 요소가 하나 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죽음, 사랑, 시간, 중력 등을 다시 하나로 묶어내는 논리, 멜랑콜리Melancholy의 상징이다. 서유럽의 지적 전통에서 태초로부터 슬금슬금 제 모습을 드러내던 멜랑콜리가 <인터스텔라>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과시했다. 주인공 일행이 새로운 가능성을 위해 통해 갔던 곳, 토성은 고래로 점성술astrology에서 멜랑콜리를 상징하는 행성으로 알려져 있다. 통상우울내지는우울증으로 알려진 멜랑콜리는, 이 글의 주제인 시간과 관련해서 보자면, 항상 죽음과 직면하고 있는 기분 내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항상 죽음과 마주하고 있다는 것은 미래를 향해 있던 모든 주의와 의식이 과거와 현재, 그 중에서도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어둠 같은 이 순간으로 철회되는 것을 말하며, 내면의 공허와 모든 것의 무의미에 짓눌려 있는 것을 말하며, 눈먼 분노와 자책 가운데 심지어 고통을 욕망하는 상태를 말한다. 실재가 어떻든 간에 이 상태에서 사람들은 끝, 사라짐, 마지막을 계속 의식한다. 멜랑콜리에게 시간이란 단지 죽음으로 가는 여정을 의미할 뿐이며, 하루를 산다는 것은 죽음에 하루 더 가까워진다는 것을 가리킬 뿐이다. 오늘과 내일이 다르지 않게 될 때, 시간은 가고 순간moment은 멈춰버린다.

 

그래서 멜랑콜리는 초월을 꿈꾼다. 시간의 흐름에 의미가 닳아 없어지지 않을 진리를 원하며, 공허한 존재를 가득 채워줄 아름다움을 원한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에서부터 등장하는 이러한 가치 가운데서도 으뜸은 사랑eros이다. ‘에로스의 원래 뜻은 서로 다른 것들을 끌어당겨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 만유인력이다. 모든 의미와 아름다움과 선함을 잃고 세상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는 자기 자신을 끌어당겨줄 어떤 것을 원하는 것, 또 그러한 다른 이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이다마치 블랙홀 속의 쿠퍼와 지구의 머피처럼. 플라톤은 우리의 영혼이 에로스를 통해 점점 더 높은 상태, 이데아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면 육체를 벗고, 즉 시간의 제약을 넘어, 죽음을 넘어 영원한 아름다움의 세계로 초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터스텔라>에서 이런 원형적 사유는 가감 없이 드러났다.

 

문제는 현실에 있다. 그래서 결론이 무엇인가—‘사랑하라, 내일 죽을 것처럼’? 놀란 감독이, 혹은 그 누가 되었든 혼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존중한다. 그러나 타인에게 그 생각이 미치면 조금 곤란해진다. 얼음 행성에서 만 박사가 쿠퍼에게 그렇게 강조했던생존본능이 바로 그 직접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생존본능에 충실히 따랐던 합리적인 만 박사는 더 없이 부끄럽고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다윈의 진화론을약육강식’, ‘적자생존으로 받아들였던 그 정신상태가 지금 평범한 우리네 삶을 이렇게 각박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도 지적할 수 있다. 내일 죽을 것처럼 살라는 메시지가 대단한 교훈인 것처럼 메스컴에 떠돌며, 그 육화incarnation인 스티브 잡스가 영웅처럼 숭배 받고 있다. 실재가 어떻든 간에 당장에 모든 것이 망해버릴 위기가 눈 앞에 항상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말한다. ‘밀러의 행성에서처럼 1시간을 7년처럼 써야 하는 모든 곳에서 우리는 숭고한 죽음의 파도 앞에 서게 된다. 멜랑콜리에게 생존본능은 삶을 향한 욕동impetus이고 투쟁이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것은 삶의 모든 의미와 아름다움을 퇴색시키고 무화(無化)하는 칼날이다. 죽음을 극복하려는 자의 논리가 죽음을 조장한다.

 

중요한 것은 시간관이다. 물론 멜랑콜리에 대한 공감이나 반발은 논리와 이성 이전의 영역이기는 하다. 그러나 논리와 기분은 또 상호작용하는 측면이 있어서, 이미 널리 퍼진 서유럽적, 종말론적 세계관을 극복하고자 하는 이에게는 다른 시간관의 가능성은 유용할 것이다. 서유럽의 멜랑콜리한 시간관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으로 힌두의 시간관을 꼽을 수 있다. 흔히 순환적 시간관으로 알려져 있는 이 관점은 한 삶의 끝과 또 다른 삶의 시작이 맞닿아 있다. 또한 <성경>에서 천지창조로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이 수천 년에 지나지 않는 반면, 힌두에게 우주는 43 2천만년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다가온다.

 

이 말을 본 이는 바로 이렇게 반박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 거대한 시간 속에서 나 하나의 삶과 죽음쯤은 거대한 도서관 가운데 떨어진 티끌 하나와 같이 미미한 것 아닌가? 이렇게 그는 자신의 죽음을 정당화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두 가지의 핵심은 단순히 삶이 순환하며 우주가 장구하기 때문에 삶에 집착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열쇠는 시간의 경계를 의식하지 않음에 있다. 오직 그 시작과 끝을 생각할 때 43 2천만년이라는 시간은 위압적이고 심지어 숭고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은 그 가운데 100년도 안 되는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장구한 우주의 역사의 시작이나 끝에 대해서는 어떠한 암시도 포함하지 않는다. 또한 여기서 삶과 죽음의 경계는 날카롭지 않다. 서유럽 시간관에서 죽음은 나의 존재가 심연 속으로 사라져 흩어지는 절벽과 다르지 않다. 그들에게 죽음은 영원한 형벌이며, 삶은 기약 없는 집행유예이다. 그러나 힌두에게 이 생과 다음 생은 연속적이다. 시간을 흐름에 비유할 때, 힌두의 시간은 죽음을 개의치 않고 도도하게 흐르는 것이다.

 

나는 심정적으로 이러한 시간관에 동의할 수 있다. 삶이 순환한다거나 우주가 43 2천만년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시간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 말이다. 실로 우리가 서유럽 시간관에 동의하는 것은 삶과 죽음이라는 부동의 사실로부터 우주를 유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의미의 차원에서 보면 삶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태어남과 죽음은 경험할 수 없는,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는, 기억 속에 남지 않게 되는 그러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시작도 끝도 분명하지 않은 순간과 순간의 흐름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끝을 의식한다면 우리는 유한한 삶 안에 더 많은 시간을 우겨 넣고 싶은 의욕에, 또 사회에서 주어진 그러한 의무에 시달리게 된다. 내가 볼 때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1시간을 7년처럼 '아껴 쓰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7년을 1시간처럼 보내는 것도 아니다.

 

물론 이 역시 양면성을 갖는다. 순간의 감정과 순간의 의욕과 순간의 요구에 충실하게 따라 산다면 분명 삶은 풍요로운 의미의 도원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방향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인도 사람들에게 그러한 일관성을 부여하는 것이 카스트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시간관을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은 또 다른 위험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서유럽적인 세계관에 깊이 물들어 있는, 그 속에서 고통 받는 우리 입장에서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위로가 될 듯하다. 누구나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으니 말이다.

 

이리하여 <인터스텔라>의 포스터를 다시 본다. 영화관에서는 잔뜩 몰입해서는 울며불며 보았지만, 막상 영화의 캐치프레이즈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라는 문구를 보니 그것에서 배어 나오는 미국적인 무엇이 가슴 속에 괜한 반항심을 만든다. 또 최근 나는 '사람답게 사는 것'에 관심을 갖고 나의 머리 속을 점령하고 있는 온갖 생각들을 하나하나 시험대에 올려보고 있다. 시간에 대한 생각은 그 가운데에서도 중요한 것에 해당했는데, <인터스텔라>를 통해 훌륭한 계기를 얻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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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ric Poetry

20 June 2014

 

Bird Images in Canto One of “Pale Fire” and Mysticism Poetics

 

1. Introduction

“Pale Fire” is a poem consisting of four Cantos, and also a part of bigger book Pale Fire (1962), which is a novel written by Vladimir Nabokov the author of Lolita (1955). This novel is completely delivered by an imaginary voice of Charles Kinbote, who is a literary critic and at the same time a neighbor of a poet John Shade. John Shade is a main character who is told to be an exile from the northern kingdom of Zembla, and who is the writer of the poem in the novel.

This poem is written in heroic couplet, of 999 lines divided into four Cantos—and supposed 1000th line is identical to the first. In this retrospective work, John Shade writes on his life and his ambitious life-long pursuit towards “survival after death”[1] (Canto Two, line 169), which he delusively thinks everyone but he knows and others conspire to hide from him.

Amongst, Canto One (lines 1-166) is about his early life before he knows of the survival after death. Here appear numerous examples of symbol of bird, which attracted my attention. Traditionally in western literature, bird, especially nightingale represents an image of melancholy poets, especially in Romantic era[2]. This is well shown in John Keats’ poem “Ode to a Nightingale” and Percy Bysshe Shelley’s “Ode to a Skylark”, that “a poet is a nightingale who sits in darkness and sings to cheer its own solitude with sweet sounds. (Shelley)”[3]

Nabokov himself intends ‘pure literature’, relatively indifferent to participations towards social problems or questioning moral or ethical problems existing, as he says “a work of art has no importance whatever to society. It is only important to the individual.”[4] His Lolita was of this perspective, and so is Pale Fire. Closely reading the Canto One of “Pale Fire”, I hope, would give a more specified view of his on art and literature. It will be carried through the variations of symbolism of bird in this Canto. In this paper I would like to analyse these symbols in aspect of art composing.

 

2. Form and Meter

“Pale Fire” is composed in heroic couplet, in iambic pentameter. This implies that the poet, John Shade considers himself as a heroic character. This will be discussed later. The meter of the poem seems to support this assumption, in that iambic pentameter is generally understood as similar to the rhythm of routine speech, contrary to tetrameters which represent more musical rhythm as in ballad form and nursery rhymes. It is also used at significant and crucial monologues of main characters in Shakespeare’s poetic dramas, like that of Act III Scene 1 in Hamlet.

Secondly, when we closely skim the poem, we can figure out that enjambments are so frequently used that we can scarcely encounter end-stopped lines. Actually, excluding the last lines of each stanza, we can only find only 24 end-stopped lines in Canto One which consists of 166 lines. This causes the reader to follow the lines in a hurried tempo as if he the author speaks with a nervous heart. However, thinking oppositely, we can understand that the poet wanted to mark some specific statements as significant, in each end-stopped line midst each stanza. These lines contain specific information about the speaker, as of his identity, his parents or his belief. For example, the first couplet “I was the shadow of the waxwing slain/By the false azure in the windowpane. (lines 1-2)” or “I was an infant when my parents died. (line 71)” and “My God they died young. Theolatry I found/Degrading, and its premises, unsound. (lines 99-100)”, these make the readers to slow down at the end of each line, who had been running on through the lines busily, and let them remark the statements there. This fact could be interpreted as a strategy of this long-length poem to give weight to some lines that contain important contents.

 

3. Hero and Heroic Melancholy

Above I mentioned melancholy heroes. However here we should be careful to distinguish between melancholy figure and melancholy hero. Generally we think of Oedipus of Sophocles, Hamlet of Shakespeare, Satan of Milton’s Paradise Lost and captain Ahab of Melville’s Moby Dick as typical heroic characters. Of their common characteristics we can say roughly three: first, one could be called a hero when one pursues not one’s own interest but what one values most, e.g. justice, beauty, fate and love. And secondly, in the course of the pursuit, one encounters one’s counterpart, or say, enemy. Lastly, the action or behavior of a character should represent a specific value(s) that could be sympathized and accepted as universally valid.

They are also said to be, but more than normal melancholy characters. However, Melancholy in general is, in cultural context, understood as “a sad thoughtful state of mind; pensiveness.”[5] Melancholy characters have outstanding faculty of reasoning as of Hamlet, are monomaniac as captain Ahab, and are bound to think of origin and end, especially essence and death of men, world, and universe i.e. everything—these are also the main themes of “Existenz” philosophy. These factors are together obviously presented in Canto Two of “Pale Fire.” Though deliberate analysis of these lines is not of interest in this paper, they are worth citing here for showing the melancholy of this poem.

 

There was a time in my demented youth

When somehow I suspected that the truth

About survival after death was known

To every human being: I alone

Knew nothing, and a great conspiracy

Of books and people hid the truth from me.

 

There was the day when I began to doubt

Man’s sanity: How could he live without

Knowing for sure what dawn, what death, what doom

Awaited consciousness beyond the tomb?

 

And finally there was the sleepless night

When I decided to explore and fight

The foul, the inadmissible abyss,

Devoting all my twisted life to this

One task. Today I’m sixty-one. Waxwings

Are berry-pecking. A cicada sings.

 

“Pale Fire”, Canto Two, lines 167-182.

 

As we can see, the speaker is a monomaniac character who believes there exists “survival after death” but everyone “hid the truth” from him, so that his life was “The foul, the inadmissible abyss” to “explore and fight” for all his time. He thinks it is hardly sane to “live without/Knowing for sure what dawn, what death, what doom” is waiting for him.

This exploration had taken place from his “demented youth” to the age of “sixty-one.” Though we cannot call him a hero, we could say that the speaker is somehow ‘heroic’, as he had pushed ahead his melancholy to such extremity though his confrontation against those who hid the “survival after death” remained imaginary till the end of this poem.

 

4. Bird Metaphor and Forlorn Melancholy

The symbol of bird is the kernel of Canto One, sophisticatedly built up with numerous bird-metaphors, each representing different meanings. To list all the bird metaphors in Canto One here: line 1(waxwing), line 24(pheasant), line 63(mockingbird), and again line 131(waxwing). Metaphors related to birds appear in: line 72(ornithologists), line 79(preterist) and line 106(cage). Here I would like to show that these bird-metaphors are together indicating the speaker’s three different aspects.

 

4.1. Waxwing: Forlorn Solitude

Waxwing is a common bird species in the United States. The speaker of the poem lives in New Wye, Appalachia, U.S.A.(as shown in Canto Two, line 250) The commonplaceness of this bird makes a vivid contrast to the rarity and ethereality of Nightingale or Skylark which are the symbol of Romantic poets. This will be discussed later.

The speaker claims that he “was the shadow of the waxwing slain/By the false azure in the windowpane. (Canto One, lines 1-2)” This bird is assumed to have tried to fly off the cage adoring the azure brightness of the sky, but fails to escape, being crashed into the window. This metaphor is quite abject and even self-depreciating. It needs close interpretation. In the core of this metaphor lies the solitude(which is also a significant keyword to melancholy) of the speaker. He says:

 

I was an infant when my parents died.

They both were ornithologists. I’ve tried

So often to evoke them …

 

Lines 71-73

 

And Then,

 

My God they died young. Theolatry I found

Degrading, and its premises, unsound.

No free man needs a God: but was I free?

            

             Lines 99-101

 

Ornithologist is who studies birds. Common birds would be of no interest for them. The speaker feels alienated from his parents in that supposedly they gave little attention to their child, and critically, they “died young”, when the speaker “was an infant.” The fact, immediately, caused his belief in God(theolatry) to become “degrading” and “its premises” to seem “unsound.” Precisely what premise that the religion presupposed here is not clear.

This feeling of loneliness is closely linked to its consequence, that the speaker thinks he is not free, “most artistically caged. (line 114)” Cage is an extended metaphor that came from the original metaphor of waxwing, a bird. In Canto One, there appear various lines that depict sceneries from his home and around. However, the boundary is not wide. From the first stanza the speaker starts from a view from his room, then snowy outdoor scene, to the lake and the “Lake Road to school (line 43)”. Then he comes to his old house, never to mention any scenery outside.

Of his narrow range of activity we can say that his ‘problem’ is somehow related to it. At first we might come up with his illness:

 

                           A thread of subtle pain

Tugged at by playful death, released again,

But always present, ran through me. One day,

When I’d just turn eleven, as I lay

Prone on the floor and watched a clockwork toy—

A tin wheelbarrow and pushed by a tin boy—

Bypass chair legs and stray beneath the bed,

There was a sudden sunburst in my head.

 

Lines 140-146

 

In this pain he experiences:

 

And then black night. That blackness was sublime.

I felt distributed through space and time:

One foot upon a mountaintop, one hand

Under the pebbles of a panting strand,

One ear in Italy, one eye in Spain,

In caves, my blood, and the stars, my brain.

There were dull throbs in my Triassic; green

Optical spots in Upper Pleistocene,

An icy shiver down my Age of Stone,

And all tomorrows in my funny bone.

 

Lines 147-156

 

His forlornness is also well presented in his past living with his aunt Maud (line 86) after his loss of both parents. However, she was no complete substitute for his parents or his model to learn from, as he writes she was “dear” yet “bizarre (ibid.)” with “grotesque growths and images of doom (line 89).” The words here at the Index of a open verse book support this: “Moon (line 94)” for lunatic, “Moor (line 85)” for barren land and “Moral (ibid.)” for spirit or mentality; and moor and moral together point out that the mental state of aunt Maud (or furthermore John Shade himself) was quite desolate. As Freud puts:

 

The melancholic displays something else besides which is lacking in mourning—an extraordinary diminution in his self-regard, an impoverishment of his ego on a grand scale. In mourning it is the world which has become poor and empty; in melancholia it is the ego itself.[6]

 

4.2. Mockingbird: Empty Self and Mannerism Life

This state of life would have made him feel dull and bored. All his interest became his picture book (line 105) and celestial things in the book and in the sky, as constellations (“the Great Bear”; line 120) and Milky Way (line 126). These were what built up his spiritual ‘world’ of his youth. (lines 105-106)

But those would be not enough to fulfill his emptiness. The metaphor of mockingbird seems to demonstrate his early mannerism life. It is dramatically presented when the speaker revisits his old home. In that scene he encounters a mockingbird echoing “all the programs she had heard (line 64)”, “rasping out (line 66)” some fragments she remembers and then “Returning to her perch—the new TV (line 70)”, as if he witnesses his own early life at the very moment of reminiscence.

However, when we carefully grope in dark around the first and third stanza, we find there is a possibility that the speaker had not at all been entirely anchored in that dull living. It can be found in ‘fancy.’

 

And from the inside, too, I’d duplicate

Myself, my lamp, an apple on a plate:

 

Lines 5-6

 

Whatever in my field of vision dwelt—

An indoor scene, hickory leaves, the svelte

Stilettos of a frozen stillicide—

Was printed on my eyelids' nether side

Where it would tarry for an hour or two,

And while this lasted all I had to do

Was close my eyes to reproduce the leaves,

Or indoor scene, or trophies of the eaves.

 

Lines 33-40

 

In these lines, words as ‘duplicate (line 5)’ and ‘reproduce (line 39)’ are remarked. These are the evidence that the poet has a faculty of fancying and he had made it as a part of his world. But just copying the world outside into inside?

 

4.3. Pheasant: Lunatic Creativity of Imagination

That seems not the case. Scenery of falling snow the speaker is amazed at is described in the first stanza and then continues through the second. There appears our pheasant:

 

Whose spurred feet have crossed

From left to right the blank page of the road?

Reading from left to right in winter's code:

A dot, an arrow pointing back; repeat:

Dot, arrow pointing back...A pheasant's feet!

Torquated beauty, sublimated grouse,

Finding your China right behind my house.

Was he in Sherlock Holmes, the fellow whose

Tracks pointed back when he reversed his shoes?

 

Lines 20-28

 

These lines can be understood as an implied allusion to Ted Hughes’ “The Thought Fox (1957).” In both, an animal, symbolizing creativity, had passed through the snow, the “blank page”, and the speaker only discovers the foot prints and traces its tracks. It is clearer in those lines above, that the “feet” of an animal “have crossed” “the blank page” of winter snow “from left to right” in a hurried, “spurred” feet. The speaker but figures out that the foot prints are of an ethereal bird that has “Torquated beauty (a ring-shaped shade around the neck)” and is a “sublimated” one.

Then alluding Sherlock Holmes, he curiously asks: “Was he in Sherlock Holmes, the fellow whose/Tracks pointed back when he reversed his shoes?” ‘He’ here is a killer who committed the crime in the snow-covered mountain cottage and then disappeared without any trace left behind. The fact was that, on the way back down he reversed his shoes and trod the very prints that were made on the way up. Alike, the speaker says the trace of the pheasant is not of easy pursuit.

In the context up to here, the pheasant can be viewed as a faculty or an aspect in the poet John Shade. However, unlike the other two metaphors i.e. waxwing and mockingbird, the pheasant is depicted as rather mystical one. He can only see the track left behind that allows no chase after it, as its feet are “spurred.” The move of imagination, the poet himself could not get any hint of it. It is lunatic.

At this point of analysis, we could say that the pursuit towards the mad imagination is what made John Shade live. His grave confrontation against death here will be mentioned, as art survives any death, it is a fertile fountain of meaning. Melancholy makes people solitary, and then makes them feel deep nothingness, deficiency and meaninglessness of the world and their ego, following Freud above. The struggle to find out the meaning and essence in their life often chooses its way to the art. In this respect we can understand Shakespeare’s obsessive pursuit towards immortality and other people like John Keats or Jean Paul Sartre and so on. John Shade is one of them.

 

5. The Mysticism Poetics against Romantic Scheme

I insist here that the image of the pheasant is John Shade’s, furthermore Nabokov’s view on Imagination which is a sole true origin of poetry composing. This becomes clear when we refer to the following excerpt from Canto Four:

 

I’m puzzled by the difference between

Two methods of composing: A, the kind

Which goes on solely in the poet’s mind,

A testing of performing words, while he

Is soaping a third time one leg, and B,

The other kind, much more decorous, when

He’s in his study writing with a pen.

 

In method B the hand supports the thought,

The abstract battle is concretely fought.

The pen stops in mid-air, then swoops to bar

A canceled sunset or restore a star,

And thus it physically guides the phrase

Toward faint daylight through the inky maze.

 

But method A is agony! The brain

Is soon enclosed in a steel cap of pain.

A muse in overalls directs the drill

Which grinds and which no effort of the will

Can interrupt, while the automaton

Is taking off what he has just put on

Or walking briskly to the corner store

To but the paper he has read before.

 

Canto Four, lines 840-860

 

Here the poet conflicts between abstraction (method B) and agony (method A), but soon he raises the hand of the latter. The muse in the poet’s head “directs the drill” of inspiration like the “spurred feet (line 20)” of a pheasant, and “no effort of the will/Can interrupt” it. This view on art composing is kind of a reminiscence of Plato, who thought “poiēsis”, which indicates a human creation especially of art, that cannot be reduced to technical training, to come solely from the “divine madness” inspired by Muses. And the divine madness, later by Aristotle was understood as an imaginative power of Melancholy.

However, in Renaissance and following Romantic era, the focus of creativity had moved to human being, as to change the concept of “poet” from a divine person to rather a normal character, and especially in Romantic era, yet who must be sensitive to one’s deep heart. This Romantic scheme is believed to begin from William Wordsworth, who regards poem as “spontaneous overflow of powerful feelings” of the poet.

Yet the foreshadow of its failure was cast by John Keats and his poem “Ode to a Nightingale (1819).” Spite that Shelley announced the poet is a nightingale, Keats’ speaker ends up failing to identify himself with his admirable Nightingale.

 

Forlorn! the very word is like a bell

         To toll me back from thee to my sole self!

Adieu! the fancy cannot cheat so well

         As she is fam'd to do, deceiving elf.

 

John Keats. “Ode to a Nightingale”. Lines 57-60

 

Then he is left forlorn. Romantic dilemma of poetics here unravels itself. The Imagination, especially artistic and poetic imagination is what an individual cannot grasp and possess for whole, because when it is completely caught up in any consciousness at all, it would cease to be imagination. Imagination always has its indigenous realm that is not reduced to any consciousness. It moves like a pheasant. This is why the poet in the first hand compared himself not with an ethereal bird like Nightingale but with a common figure of waxwing.

In “Pale Fire”, a poet struggles to seize at least a flash, or “a sudden sunburst (“Pale Fire”, Canto One, line 146)” of imagination (pheasant’s spurred feet), between his/her melancholy (waxwing) and lethargic mannerism (mockingbird). Yet the poet does not release the hands just waiting for un-promised arrival of divine inspiration. In his/her mind goes a “testing of performing words. (line 843)” This poetics, based on the belief in human imagination, is rather a dialectic one, opposing both the archaic view of Plato and the self-contradictory Romantic scheme, yet sublimating both to a higher degree.

 

6. Conclusion

The very title of this poem is also an allusion to Shakespeare’s Timon of Athens: “The moon's an arrant thief,/And her pale fire she snatches from the sun” (Act IV, scene 3). The fire here means creativity and inspiration. It would be of no trouble to read the Canto One of “Pale Fire” as subtle rhymes implicitly concerning poetry itself. In this poem Nabokov created a heroic melancholy character John Shade who obsessively pursues the “survival after death.” The speaker alludes himself to specific kinds of birds i.e. waxwing, mockingbird and pheasant.

Why he did not identify himself direct with a waxwing but a “shadow” of the waxwing, it is still a mystery (one reason—an allusion to his name, Shade). But through these peculiar metaphors we can draw our conclusion that, John Shade, furthermore Nabokov himself viewed the process of art composing as a witty yet painstaking work in which the poet tries to grasp a hint of his/her swift-moving imagination, carefully following the trace of it, at least to catch its tip of the tail. The poet has to struggle between his/her forlorn solitude of melancholy, which waxwing symbolizes, and the torpor of mannerism, which mockingbird represents, to hold the moment of flash. The process of art, mainly confronting death, in that it never ends as a complete form, is heroic. This rather mysticism poetics is in conflict with both the ancient view of poetry and the Romantic view of poets, dialectically uplifting both to a more refined level.


 

Reference

 

§ Sigmund Freud. “Mourning and Melancholia”. The Standard Edition of the Complete Psychological Works of Sigmund Freud, Volume XIV (1914-1916): On the History of the Psycho-Analytic Movement, Papers on Metapsychology and Other Works.

§ Tom Furniss, Michael Bath. Reading Poetry. London and Ney York: Routledge.

§ Vladimir Nabokov (1962). Pale Fire. New York: Vintage International.

§ Percy Bysshe Shelley  (1903). A Defense of Poetry. Boston, MA: Ginn & Company.

§ “Nabokov's interview(03)”. Playboy [1964]. http://lib.ru/NABOKOW/Inter03.txt. Date of Access: 16 June 2014.

 


 

 

Appendix: “Pale Fire(A Poem in Four Cantos)”, Canto One

 

I was the shadow of the waxwing slain

By the false azure in the windowpane

I was the smudge of ashen fluff--and I

Lived on, flew on, in the reflected sky,

And from the inside, too, I'd duplicate

Myself, my lamp, an apple on a plate:

Uncurtaining the night, I'd let dark glass

Hang all the furniture above the grass,

And how delightful when a fall of snow

Covered my glimpse of lawn and reached up so

As to make chair and bed exactly stand

Upon that snow, out in that crystal land!

 

Retake the falling snow: each drifting flake

Shapeless and slow, unsteady and opaque,

A dull dark white against the day's pale white

And abstract larches in the neutral light.

And then the gradual and dual blue

As night unites the viewer and the view,

And in the morning, diamonds of frost

Express amazement: Whose spurred feet have crossed

From left to right the blank page of the road?

Reading from left to right in winter's code:

A dot, an arrow pointing back; repeat:

Dot, arrow pointing back...A pheasant's feet!

Torquated beauty, sublimated grouse,

Finding your China right behind my house.

Was he in Sherlock Holmes, the fellow whose

Tracks pointed back when he reversed his shoes?

 

All colors made me happy: even gray.

My eyes were such that literally they

Took photographs. Whenever I'd permit,

Or, with a silent shiver, order it,

Whatever in my field of vision dwelt--

An indoor scene, hickory leaves, the svelte

Stilettos of a frozen stillicide--

Was printed on my eyelids' nether side

Where it would tarry for an hour or two,

And while this lasted all I had to do

Was close my eyes to reproduce the leaves,

Or indoor scene, or trophies of the eaves.

 

I cannot understand why from the lake

I could make out our front porch when I'd take

Lake Road to school, whilst now, although no tree

Has intervened, Ilook but fail tosee

Even the roof. Maybe some quirk in space

Has caused a fold or furrow to displace

The fragile vista, the frame house between

Goldworth and Wordsmith on its square of green.

 

I had a favorite young shagbark there

With ample dark jade leaves and a black, spare

Vermiculated trunk. The setting sun

Bronzed the black bark, around which, like undone

Garlands, the shadows of the foliage fell.

It is now stout and rough; it has done well.

White butterflies turn lavender as they

Pass through its shade where gently seems to sway

The phantom of my little daughter's swing.

 

The house itself is much the same. One wing

We've had revamped. There's a solarium. There's

A picture window flanked with fancy chairs.

TV's huge paperclip now shines instead

Of the stiff vane so often visited

By the naive, the gauzy mockingbird

Retelling all the programs that she had heard;

Switching from chippo-chippo to a clear

To-wee, to-wee; then rasping out: come here,

Come here, come herrr'; flitting her tail aloft,

Or gracefully indulging in a soft

Upward hop-flop, and instantly (to-wee)

Returning to her perch--the new TV.

 

I was an infant when my parents died.

They both were ornithologists. I've tried

So often to evoke them that today

I have a thousand parents. Sadly they

Dissolve in their own virtues and recede,

But certain words, chance words I hear or read,

Such as"bad heart" always to him refer,

And "cancer of the pancreas" to her.

 

A preterist: one who collects cold nests.

Here was my bedroom, now reserved for guests.

Here, tucked away by the Canadian maid,

I listened to the buzz downstairs and prayed

For everybody to be always well,

Uncles and aunts, the maid, her niece Adele,

Who'd seen the Pope, people in books, and God.

 

I was brought up by dear bizarre Aunt Maud,

A poet and a painter with a taste

For realistic objects interlaced

With grotesque growths and images of doom.

She lived to hear the next babe cry. Her room

We've kept intact. Its trivia create

A still life in her style: the paperweight

Of convex glass enclosing a lagoon,

The verse open at the Index (Moon,

Moonrise, Moor, Moral), the forlorn guitar

The human skull; and from the local Star

A curio: Red Sox Beat Yanks 5-4

On Chapman's Homer, thumbtacked to the door

 

My God they died young. Theolatry I found

Degrading, and its premises, unsound.

No free man needs a God; but was I free?

How fully I felt nature glued to me

And how my childish palate loved the taste

Half-fish, half-honey, of that golden paste

 

My picture book was at an early age

The painted parchment papering our cage:

Mauve rings around the moon; blood-orange sun;

Twinned Iris; and that rare phenomenon

The iridule--when beautiful and strange,

In a bright sky above a mountain range

One opal cloudlet in an oval form

Reflects the rainbow of a thunderstorm

Which in a distant valley has been staged--

For we are most artistically caged.

 

And there's the wall of sound: the nightly wall

Raised by a trillion crickets in the fall.

Impenetrable! Halfway up the hill

I'd pause in thrall of their delirious trill.

That's Dr. Sutton's light. That's the Great Bear.

A thousand years ago five minutes were

Equal to forty ounces of fine sand.

Outstare the stars. Infinite foretime and

Infinite aftertime: above your head

They close like giant wings, and you are dead.

 

The regular vulgarian, I daresay,

Is happier: He sees the Milky Way

Only when making water. Then as now

I walked at my own risk: whipped by the bough,

Tripped by the stump. Asthmatic, lame and fat,

I never bounced a ball or swung a bat.

 

I was the shadow of the waxwing slain

By feigned remoteness in the windowpane.

I had a brain, five senses (one unique),

But otherwise I was a cloutish freak.

In sleeping dreams I played with other chaps

But really envied nothing--save perhaps

The miracle of a lemniscate left

Upon wet sand by nonchalantly deft

Bicycle tires.

 

                        A thread of subtle pain,

Tugged at by playful death, released again,

But always present, ran through me. One day,

When I'd just turned eleven, as I lay

Prone on the floor and watched a clockwork toy--

A tin wheelbarrow and pushed by a tin boy--

Bypass chair legs and stray beneath the bed,

There was a sudden sunburst in my head.

 

And then black night. That blackness was sublime.

I felt distributed through space and time:

One foot upon a mountaintop, one hand

Under the pebbles of a panting strand,

One ear in Italy, one eye in Spain,

In caves, my blood, and the stars, my brain.

There were dull throbs in my Triassic; green

Optical spots in Upper Pleistocene,

An icy shiver down my Age of Stone,

And all tomorrows in my funny bone.

 

During one winter every afternoon

I'd into that momentary swoon.

And then it ceased. Its memory grew dim.

My health improved. I even learned to swim.

But like some little lad forced by a wench

With his pure tongue her abject thirst to quench,

I was corrupted, terrified, allured,

And though old Doctor Colt pronounced me cured

Of what, he said, were mainly growing pains,

The wonder lingers and the shame remains.



[1] Hereafter, all the citation of “Pale Fire” is from Vladimir Nabokov (1962). Pale Fire. New York: Vintage International.

[2] Tom Furniss, Michael Bath. Reading Poetry. London and Ney York: Routledge. p.300

[3] Bysshe Shelley, Percy (1903). A Defense of Poetry. Boston, MA: Ginn & Company. p. 11

[4] “Nabokov's interview(03)”. Playboy [1964]. http://lib.ru/NABOKOW/Inter03.txt. Date of Access: 16 June 2014.

[5] “Melancholy” 2, Collins English Dictionary

[6] Sigmund Freud. “Mourning and Melancholia”. The Standard Edition of the Complete Psychological Works of Sigmund Freud, Volume XIV (1914-1916): On the History of the Psycho-Analytic Movement, Papers on Metapsychology and Other Works. p.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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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학년도 2학기 맑스의 자본론읽기 수업 보고서

 

맑스주의의 철학적 수용

루이 알튀세르의 맑스주의 철학을 중심으로

 

 

I. 들어가며 : 비 오는 날의 맑스주의

비가 온다. 그러니 이 책이 그저 단순한 비에 관한 책이 되기를.”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는 것은 다만 문장 한 줄로도 충분하다.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비의 철학자였다. 그렇다면 그 비는 어떤 비인가? 그것은 허공[공백](le vide) 속에 평행으로 내리는 에피쿠로스의 원자들의 ’(루크레티우스), 스피노자[1632~1677], 또한 마키아벨리[1469~1527], 홉즈[1558~1679], 루소[1712~1778], 맑스, 하이데거와 또 데리다 같은 이들에게서 보이는, 무한한 속성들의 평행(parallélisme)이라는 에 대한 것이다.” 원자들, 허공, 원자들의 빗겨남과 우발적 마주침, 그것들의 응고마주침의 유물론(materialism of encounter)’ 혹은 우발성의 유물론(aleatory materialism; aleatory라는 말은 주사위 놀이를 가리킨다)’이라고 불리는 이 이론은 알튀세르의 맑스주의 철학을 관통하는 주제이다.

이 글에서는 먼저 후기 이론에 해당하는 우발성의 유물론에 관한 알튀세르의 논문을 검토하고, 중기 이론인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Ideological State Apparatuses)와 과잉결정(Overdetermination)에 관한 논문을 각각 살펴볼 것이다. 이후에는 알튀세르의 맑스주의 철학과 맑스주의 철학의 흐름의 관계, 그리고 그것이 우발성의 유물론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에 대해 볼 것이다. 끝으로 그의 이론이 자본에 등장하는 상품, 화폐 등의 미시적 관계에, 그리고 역사 일반에 적용될 수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것이다.

 

II. 알튀세르의 맑스주의 철학

1. 우발성의 유물론 :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

에피쿠로스의 세계관에서 세계가 형성되기 이전에 원자들은 허공 속에서 비처럼 평행하게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평행 가운데 미세한 빗겨남(클리나멘, clinamen)이 생겨난다. 평행궤도에서 빗겨난 원자들이 다른 원자들과 마주침으로써, 그리고 그 중 일부가 응고함으로써 세계는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에서 모든 이유와 목적론은 거부된다. “세계는 기성사실(le fait accompli), 일단 사실이 완성된(accompli) 후에 그 속에 근거, 의미, 필연성, 목표의 지배가 확립되는 그러한 기성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사건은 우발적이고, 모든 의미는 사후적이다.

에피쿠로스의 비는 먼저 하이데거를 통과한다. 그것은 하이데거의 있음의 철학으로 연결된다. 독일어에서 무엇이 있다는 것은 “es gibt ~”라는 말로 표현된다. 직역하면 그것(비인칭 주어)~를 준다’, 다시 말해 무언가가 주어져 있다.’ 하이데거는 세계의 존재이유와 목적(종말)에 관한 질문을 거부한다. 그는 다만 주어져 있는 것 자체, 즉 어떤 것의 현사실성을 사유하며, “세계의 선험적 우연성을 복원한다. 이는 세계의 근거, 목적, 원인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즉 로고스(logos)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유물론적이다.

원자들의 목적 없는 운동은 마키아벨리를 통해 응고한다.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가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적 상황에 대하여 생각했던 바, 즉 분열된 국가를 통일할 인물을 찾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당시의 이탈리아는, 작은 도시라는 원자들이 서로 마주칠 일 없이 평행하게 내리고 있는 상황에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를 통일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이름 없는 인물 안에서 그의 능력(virtú)과 운(fortuna)이 마주쳐야 한다고 보았다. 이탈리아의 응고는 국가와 군주가 아닌 공백’, 즉 변방에서 출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공백에서 출발한 원자를 통해 도시 국가들이 응고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마주침은 지속적인 것이어야 할 것이다.

공백은 또한 전체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세계에서, 혹은 인간에서 출발하여 신으로 올라가지않는다. 스피노자는 신--실체, 다시 말해 신--전체에서 출발한다. 신 바깥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총체이다. 그 안에서 인간의 인식 행위는 인간은 사유한다(homo cogitat)”라는 현사실성으로 제시되며, 목적론이란 인간 중심적인 사유의 상상일 뿐이다. 그러나 상상(imagination)은 절대 결코 재능(faculté)이 아니라, 결국 다만 주어진 것으로서의 유일한 세계 그 자체이다.

두려움은 그 상상의 산물이다. 홉스의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두려워하는 동물이다. 그들은 자신을 보존하려는 힘인 코나투스(conatus)를 갖고 있는 사회적 원자들이다. 그들은 꽉 차 있는 세계에서 자신의 앞길에 공백을 만드는 방식으로, 다시 말해 만인에 대해 투쟁하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은 곧 죽음의 두려움에 이끌려 사회적 계약을 맺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군주에게 양도하는 대신 전쟁상태의 위협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선택한다. “전쟁상태로부터 인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에 의해서만 인민에 연결되어 있을 뿐인 군주와, 이데올로기적 동조의 방식을 포함하여, 전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약속에 의해서만 군주에게 연계되어 있는 인민.” 이 국가는 모든 공포가 방어적이라는 점에서 소멸해야 하는 맑스의 국가와 유사하다.

자연상태의 공백에 대한 논의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루소로 이어진다. 루소는 로크나 홉스가 제시했던 자연상태가 사실은 전쟁이나 평화에 처해있다는 점에서 사실은 사회상태의 투영이라고 보았다. 순수한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마주칠 일 없이 허공을 낙하하는 원자와 같은 존재이다. 사회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마주침이 발생해야 하는데, 여기서 특이한 점은, 마주침의 지속에서 발생하는 언어, 감정, 애정 혹은 투쟁 관계가 축적됨에 따라 인간의 본성이 점점 사회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후 힘센 사람들에 의해 체결된 부당한 계약은 이를 사회상태라는 형태를 취한 마주침으로 만든다. 홉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사회상태는 자연상태로 재추락하는 공포 위에서 유지된다.

이렇게 철학사 속에 은밀한 전통으로 흘러온 마주침의 철학은 모든 본질, 이성, 기원과 목적을, 따라서 모든 질서를 거부하고 분산무질서를 옹호하는 철학이다. 그것은 필연성의 우연성과 우연성의 필연성을 사유한다. 이는 이성의 관념론과 대립하는 유물론이다. 알튀세르적 의미에서 맑스의 유물론은 필연성과 목적론의 유물론이라는 점에서 다만 관념론의 위장된 형태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한 카오스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마주침이 실현되고 나면, 원자들의 마주침은 구조화된 형태를 따른다. 한편 우발성으로 인해 이 구조는 언제든 다른 형태로 바뀔 수 있다. 이것은 후기-구조주의적 사유이다. 요컨대 알튀세르의 마주침의 유물론은 사회의 공시적 구조의 지배를 강조하는 한편 구조의 변혁까지 사유하는 후기-구조주의 철학을 형이상학적으로 근거지우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겠다.

 

2. 기성사실의 구조와 재생산 :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알튀세르는 토대(base; 하부구조, infrastructure)와 상부구조(superstructure)의 범주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맑스와는 다른 입장을 취한다. 그것은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의 정치철학을 잇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과는 달리 알튀세르는 재생산의 관점에서 이 두 구조의 관계를 재설정하고자 한다.

알튀세르가 주목하는 것은 현존하는 생산관계의 재생산(the existing relations of production)”이다. 일차적으로 생산관계의 재생산은 부르주아적 교육에 의해 이루어진다. 중요시되는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직업 수행에 필요한 기술 혹은 능력의 교육이고, 다른 하나는 직업에 순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올바른 행동 규율의 교육이다. 이런 교육은 현존하는 이데올로기 안에서, 그리고 그것의 [영향]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알튀세르의 이론에서 상부구조는 다시 두 단계(levels) 혹은 심급(instances)으로 나뉜다. 하나는 법과 국가를 포함하는 정치-사법적(politico-legal)’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데올로기, 종교, 윤리 등을 포함하는 이데올로기적(ideological)’인 것이다. 이 구조에서도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은 경제적 토대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여기서 상부구조는 상대적 자율성(relative autonomy)과 심급끼리의 상호적 작용(reciprocal action)이라는 특징을 갖게 된다.

먼저 국가에 대해 살펴보자. 알튀세르에 따르면 전통 맑스주의에서 국가는 곧 억압적 국가장치였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국가를 국가권력(state power)과 국가장치(state apparatus)로 나누고, 국가장치를 다시 억압적 국가장치(repressive state apparatus; RSA)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ideological state apparatuses; ISAs)로 나눈다. 전통 맑스주의에서도 국가권력과 국가장치는 구분되며, 계급투쟁의 목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국가권력을 차지하여 부르주아적 국가장치를 해체하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알튀세르의 관점에서 이것은 단지 부분적인 설명에 머무를 뿐이다.

알튀세르가 지적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는 종교, 교육, 가족, 사법, 정치, 무역조합(trade-union), 커뮤니케이션(언론, 라디오, 텔레비전 등), 문화(문학, 예술, 스포츠 등) 등이 있다. RSA와 달리 ISAs는 다수로 존재하며 그 실체가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기능방식에서 RSA가 주로 공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상대적으로 ISAs는 사적인 영역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작동한다. 그 가운데 주목할 것은 바로 학교이다. 가족 이데올로기와 함께, 학교는 어린 아이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도록 가르치며 16세가 되어서는 곧 생산 현장에 투입한다.

한편 본질적으로 이데올로기는 순수한 상상(pure dream)에 불과하다. 이는 앞서 언급한 스피노자의 상상 개념에 대응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역사가 없다.” 이것은 개별 이데올로기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자체를 설명하는 말이다. 그것은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무의식은 영원하다(unconsciousness is eternal)”라는 주장과 맥을 같이한다. 그것은 상상과 같이 주어진 것으로서의 유일한 세계 자체이며, “개인들의 실제 존재 조건의 상상적 관계의 재현(representation)”이다. 왜 인간은 자신의 존재 조건을 표상하기 위해 상상에 갇힐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그들이 처한 물질적 조건이 소외적(alienating)이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이 이데올로기가 단순한 상상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넘어 물질적 존재를 갖는다고 말한다. 즉 이데올로기는 주체(subject)와 실천(practice)에 의해 유지되고 재생산된다. 예컨대, 신을 믿는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 무릎 꿇고 기도하는 행위를 적극적으로 실현함으로써 그 이데올로기를 확고한 것으로 만든다. 개인은 의식적으로 어떤 관념(idea)이 자신에게 영감을 불어넣는다고(inspires), 또 그가 자유롭게 그것을 받아들인다고(freely accepts) 믿음으로써 이데올로기를 실천한다.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들로 호명한다.”

 

3. 축적된 모순의 우발적 발현 : 모순과 과잉결정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에 대한 내용을 우리는 알튀세르의 다른 논문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Contradiction and Overdetermination”이라는 제목의 연구노트에서 알튀세르는 경제적 모순이 그 자체의 힘으로가 아닌 정치적 정황 등에 의해서 촉발될 때에 구조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바, 심급끼리의 상호적 작용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먼저 모순개념에 천착하여, 맑스가 헤겔의 변증법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맑스는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이 두 발이 아닌 머리로 서 있는 전치된 형태라고 말하며 유물론적 변증법을 주창하였다. 그러나 알튀세르의 관점에서 이는 여전히 관념론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껍질에 쌓여 있는 것이었다. 그는 먼저 러시아 혁명에 대해 분석한다.

어떻게 당시 유럽에서 가장 후진국이었던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그 이유는 러시아를 초월해(transcended)’ 있다. 알튀세르는 레닌의 약한 고리(the weakest link)’ 이론에 주목한다. 사슬의 힘은 그것의 가장 약한 고리가 결정한다. 러시아는 서유럽 제국주의 국가 사슬의 가장 약한 고리였다. 따라서 서유럽 국가들에서 발생한 자본주의적 모순이 러시아로 집중되는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순이 축적된다고 해서 그것이 자체적으로, 혹은 내재적인 힘에 의해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 모순이란 결정하는 또 결정되는 층위 혹은 심급의 형식적 조건(formal condition)과 전혀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심급들 간의 상호적 작용을 필요로 한다. 이런 의미에서 맑스적 모순은 항상 원리적으로 볼 때 과잉결정’(in principle overdetermined)된다.

헤겔의 변증법에서 모순은 복잡하다. 의식이 변증법적 상승과정을 거치면서 모순도 함께 복잡화되는 것인데, 이는 의식의 역사가 그것의 과거의 본질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그 과거는 그것이 함축하는 미래의 내적 본질이다. 따라서 헤겔의 변증법에서 모든 변화는 내부적으로 일어나며, 순수하게 외적인 결정(true external determination)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과잉결정되지 않는다. 이 모순이 상대적으로 단순한 형태를 취하기 위해서는 그 역사적 시기의 본질을 구성하는 내적 원리가 단순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단순성은 주어진 역사적 시기의 무한히 다양성을 내적인 정신적 원리로, 즉 종교나 철학적 의식으로,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로 축소하고 환원할(reduce) 때에만 가능하다. 헤겔의 변증법에는 기본적인 단절도 없다. 어떤 시기가 극적으로 끝나거나 시작하는 일도 없다. 헤겔의 변증법은, 물적 기반을 배제한다는 점까지 고려하여, “정신[의 활동]이 정점을 달릴 때에만 옹호 가능한(only defensible from the Spirit’s topmost peak)” 종류의 이론이다.

헤겔의 정신을 물적 조건으로 단순히 대체한다고 해서 변증법이 올바로서게 되는 것은 아니다. 유물론적 설명에서 외화-소외(exteriorization-alienation)나 추상화(abstraction)는 없다. 우리는 예외를 사유해야 한다.

 

If it is true, as Leninist practice and reflection prove, that the revolutionary situation in Russia was precisely a result of the intense overdetermination of the basic class contradiction, we should perhaps ask what is exceptional in this ‘exceptional situation’ and if, like all exceptions, this one does not clarify a ruleis not, unbeknownst, the rule itself. For, after all, are we not always in exceptional situation? The failure of the 1849 Revolution in Germany was an exception, the failure in Paris in 1871 was an exception, the German Social-Democratic failure of the beginning of the 20th century in producing the chauvinism of 1914 was an exception, the success of 1917 was an exception exceptions, but with respect to what? Nothing but the abstract idea (후략).

-Louis Althusser, “Contradiction and Overdetermination”, 1962, 26. 강조는 원문.

 

만약, 레닌주의적인 실천과 반성이 증명하듯, 러시아의 혁명적 상황이 다만 단순한 계급 모순의 강력한 과잉결정의 결과라면, 또 그것이 다른 예외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법칙을 분명히 보여주지 않는다면(물론 그것은 법칙 자체를 얘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런 예외적 상황에서 어떤 것이 예외적인가를 질문해야할 것이다. 1849년 독일 혁명의 실패는 하나의 예외였다. 1871의 파리도, 20세기 초에 독일 사회-민주당의 실패와 그 결과인 1914년의 쇼비니즘도 예외였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의 성공 또한 예외였다. 예외들. 그러나 무슨 관점에서 예외들이란 말인가? 다름 아닌 추상적 관념의 관점에서다. (번역은 필자)

 

맑스와 엥겔스가 이미 지적했듯이, 계급 모순이란 단순하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실제 역사적 상황 속에서 구체화되어야(specified)’ 한다. 그 상황이란, 상부구조의 형태, 그것을 결정하는 내적, 외적 역사적 상황이다. 그렇다면 알튀세르의 이 주장은 맑스의 국가론 속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헤겔과는 반대로 맑스는 사람들의 물질적 삶이 역사를 설명할 수 있으며, 이데올로기와 의식적 측면은 물적 삶[noumena]의 단순한 현상[phenomena]일 뿐이라고 얘기한다. 여기서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경제적 심급, 즉 특정 사회의 생산양식이 반영된 결과이다. 이 때, 생산양식과 생산관계는 하부구조(infrastructure)를 이루고, 국가와 사법, 정치, 이데올로기적 체계는 상부구조(superstructure)에 포함된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 관계는 헤겔 변증법이 이성의 간계에 의해 작동되는 것과 같이 경제적인 이성의 간계(economical ruse of reason)’만에 의해 작동되지는 않는다. 맑스는 여기서 최종 심급에서 생산양식에 의한 결정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과 그것의 특수한 영향력이라는 두 테제를 암시했다.

이 두 가지에 따르면, 맑스적 의미에서의 지양(sublation)’은 변증법적 의미를 탈색하고, 새로이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하부구조의 혁명은 그 자체의 이유로는(ipso facto), 다시 말해 직접적으로는 현존하는 상부구조, 특히 이데올로기를 변형하지 않는다. 둘째, 혁명에 의한 새로운 사회는 이전의 상부구조를 어느 정도 존속하고 재가동할 것이다. 볼셰비키의 이념과는 배치되는 스탈린의 범죄와 억압은 이렇게 과잉결정을 사유하지 않고서는 설명될 수 없을 것이라고 알튀세르는 말한다.

 

4. 다시 우발성의 유물론으로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앞서 소개한 부분이 우발성의 유물론을 계보학적으로 탐구한 전반부인데 비해, 후반부에서 알튀세르는 우발성의 유물론을 통해 맑스를 사유하고 있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돈 많은 사람과 프롤레타리아의 마주침의 응고에서 발생하였다. 이런 마주침은 사실 그 이전에도 여러 번 일어났었다. 18세기와 19세기 포 강 유역의 이탈리아 국가들에서는 돈 많은 사람들, 테크놀로지, 숙련인력이 모두 있었으나 그들은 자본주의적으로 응고하지 않았다. 알튀세르는 가능한 생산을 흡수할 내부시장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을 들어 이를 설명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맑스가 지적하는 것과는 달리, “대공업의 산물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금융적 축적, 생산의 기술적 수단들의 축적, 생산 소재의 축적 이전에 그것들과 마주치지 않고 떠다니는상태로 존재했다. 이 요소들은 모두 각자가 역사적 산물이며, 서로 다른 것의 산물이거나 목적론적 산물이 아니다.

모든 생산양식이 서로 독립적은 요소들로 구성된다는 사실은 자본의 이른바 시초축적(so-called primitive accumulation)에 관한 장을 다룬 알튀세르의 논의에서 잘 드러난다. 영국의 경우에서, 농민들이 생산수단을 박탈당한 사건과 도시 노동자가 대공업으로 흡수되는 사건은 전적으로 외적인 사건이다. , 이 과정은 비목적적이며, 우발적이다. 그러나 맑스는 이 우발성을 옆으로 치워두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자본주의적 확대재생산이 아닌 생산과정으로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부르주아에 대한 맑스의 이론도 신비주의적이다. 맑스의 테제에서 부르주아는 봉건적 지배계급의 적대자로 등장한다. 봉건적 지배구조가 해체되고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것이 부르주아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부르주아지는 봉건제의 대립자가 아닌 그것의 정점, 완성이라는 주장을 내세운다.

알튀세르에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하나의 구조이다. 또한 그것은 원자들의 마주침이 응고된 상태이다. 그 원자들은 앞서 언급된 바, 부르주아, 프롤레타리아, 생산수단, 내부시장 등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결과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기원에 관한 맑스의 설명을 비판하면서 알튀세르가 강조하고자 했던 점은 그것이다. 이 요소들은 구조에 선행한다. 이는 맑스가 주장했던 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특수한 시기에 국한되는 생산양식이라는 테제를 더 철저하게 발전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한편 이 구조, 즉 생산관계는 부르주아적인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의해 재생산된다. 이 생산관계의 상상적 재현을 통해 개인들은 스스로를 주체로 여기게 되며, 생산관계의 실재는 은폐된다. 그러나 이 모순은, 충분히 축적된 이후에, 국가 외적인 상황과의 마주침을 통해 과잉결정된다. 이는 마키아벨리의 논의에서, 군주 내부의 능력과 외부의 운이 마주쳤을 때 이탈리아의 통일 과업이 달성될 수 있는 것과 같다.

 

III. 맺는 말

알튀세르의 유물론은 헤겔적 의미의 관념론을 전복하려는 맑스의 시도를 이어받은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그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맑스의 분석에서 나타난 목적론적인, 혹은 종말론적인 경향을 수정하고자 하였다. 그 시도가 바로 우발성의 유물론이다. 그는 기성사실의 기원을 필연적인 방식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에서 벗어나서 허공을 떠다니는 요소들의 우발적 마주침을 사유했다.

그는 기성사실이라는 구조가 어떤 필연성에 의해 형성되었는가라는 질문에서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를 재생산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옮겨갔다. 기존의 맑스주의 국가론에서 다만 부수적이고 피상적인 위치만을 갖고 있던 상부구조에 대한 조명이 여기서 이루어진다. 알튀세르의 논의에서 상부구조는 상대적 자율성을 갖는다. 그것은 상상을 통해, 자세히 말해 생산관계의 실재를 상상적으로 재현함으로써 계급모순을 은폐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 상상은 자본에서 다뤄지는 상품물신, 화폐물신, 노동물신 등의 물신론(fetishism)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상품물신이 상품에 내재된 사용가치와 가치의 모순을 은폐하는 것처럼,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생산관계의 모순에 따른 계급모순을 은폐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지 역시 이런 이데올로기에 종속되는 것으로 보인다. 자본3권에서 이윤에 대해서 다뤄지는 바와 같이, 부르주아지 역시 그들만의 상상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윤이란 잉여가치가 전화된 형태에 불과하지만, 자본가 계급에게는 그것이 은폐된다. 즉 상품가치의 구성의 실재가 불변자본의 감가상각액(c) + 가변자본(v) + 잉여가치(s)로 이루어지는 반면, 자본가의 관점에서 그것은 비용(k)과 이윤(p)의 합으로 단순화되어 제시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윤율 저하 현상은 설명될 수 없는 영역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잉여가치의 발생과 증감은 그것의 원천인 가변자본(, 노동)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반면, 자본가의 관점에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차이는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은 알튀세르의 과잉결정 이론에서도 나타난다. 사실 과잉결정이라는 용어는 과소결정(underdetermination)’과 쌍을 이루는 말이다. 과소결정이란 혁명이나 이행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들에 의한 모순의 결정을 뜻한다. 과잉결정이 유럽 국가들 중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하지 않는 낙후된 지역인 러시아에서 어떻게 혁명이 일어났는가를 사유하기 위한 것이라면, 과소결정은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한 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앞서 다룬, 이데올로기에 의한 생산관계의 재생산과 관계하여 사유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족이지만, 이 글에서 과잉결정론보다 과소결정과 관계된 이데올로기론을 순서상 먼저 다룬 이유는, 알튀세르 철학에서 구조의 지배보다는 구조의 변혁에 중점을 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구조주의적인 면보다는 포스트-구조주의적인 면을 부각하고자 함이었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에서 이어진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바디우(Alain Badiou, 1937~)의 국가론으로 발전되는 것으로 보인다. 바디우는 상황상태(l’état de la situation)’라는 개념을 통해 알튀세르의 국가론을 수학적 존재론으로 계승한다. 바디우에 따르면 모든 상황은 다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에서 일자는 이 원소들을 동질화한 뒤 다시 그것들의 부분집합을 셈한다.’ 이 셈의 셈, 다시 말해 구조의 구조가 바로 상황상태이며, 이 안에서 모든 상황은 직접적으로 현시되지 않고 재현(représentation)’된다. 그리고 이 상태(état)는 곧 국가(Etat)와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바디우의 재현 개념은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상상 개념과 비슷해 보인다.

한편 이 상상 개념은 맑스주의 철학의 두 흐름을 잇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 두 흐름이란 프로이트-맑스주의와 스피노자-맑스주의이다. 프로이트-맑스주의에서 강조했던 것은 바로 정신적인 면,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유지하는 무의식적 구조였다. 이는 알튀세르에게서 ISAs 이론에서 이데올로기를 강조한 측면으로 구체화된 것처럼 보인다. 이 때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심급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서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위치한 전의식과 비슷한 지위를 갖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과잉결정이라는 개념 자체도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차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볼 때, 알튀세르는 한 편으로 프로이트적 전통에 서 있다. 한편 스피노자-맑스주의의 주제는 인권의 정치이다. 스피노자가 에티카1부 부록에서 말했듯 인간은 상상이라는 세계를 통해서만 부분적으로나마 실재를 인식할 수 있다. 여기서 상상은 실재를 드러내는 동시에 은폐한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뒤에 자신의 눈을 찌른 것은 바로 눈의 상징, 상상이라는 상징성을, 그리고 그것에 포함된 모순을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맑스주의의 문제설정은 이러한 상상에 의해 은폐된 생산관계의 모순을 사유하고자 함에 있다. 이런 측면에서 스피노자-맑스주의는 실천적 이론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 이는 알튀세르에게서 ISAs 이론에서 이데올로기의 상상적본질을 강조한 측면으로 나타난다. 사태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인간의 가장 사적인 영역인 가족까지 지배하고 있다. 알튀세르가 적고 있듯, “국가 안에 존재하는 모든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 중에서도 가장 끔찍하고, 지독하고, 소름끼치는 것은 바로,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이다.”

ISAs 이론에서 드러나는 알튀세르의 이론은 오히려 구조의 확고한 지배를 인정하는 쪽에 가까워 보인다. 마키아벨리에게서 이탈리아를 통일할 군주는 제도권이라 칭할 수 있는 곳이 아닌, 이름 없는 공백에서 등장한다. 반면 알튀세르의 군주는 등장할 곳이 없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가장 사적인 영역까지 지배하려 하고 있고,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상상과 실재라는 이분법을 조금 더 완화시킬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는 라캉의 ‘RSI 이론을 접목함으로써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이론은 실재계(the Real)’-‘상징계(the Symbolic)’-‘상상계(the Imaginary)’의 삼원적 구조로 세계를 설명하고자 한다. 즉 알튀세르의 상상개념은 다시 기성사실의 구조인 상징계와 개인적 욕망의 공간인 상상계로 세분화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상징계에 속하며, 개인들을 주체들로 호명함으로써 상상계까지 지배하려하는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때, 구조를 변혁할 수 있을 잠재력의 근거는 이 상상계라는 공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모순과 과잉결정이라는 테제가 생산관계의 구조와 혁명이라는 거시적 차원뿐만 아니라 상품과 화폐 수준의 미시적 단계에서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과잉결정은 물질적 모순과 상부구조의 상호적 작용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상품에서 나타나는 물적 모순은 상품의 사용가치와 가치 사이의 모순으로 볼 수 있을 것이고, 여기서의 상부구조는, 앞서 언급했듯, 상품교환과 상품물신으로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순은 노동력이라는 특수한 종류의 상품 내에서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분할로 표면화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잉여가치의 축적이고 자본의 재생산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알튀세르의 과잉결정 이론은 이 수준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 또 그것은 상품물신 이외의 다른 종류의 물신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 것인가? 이는 물신이론과 관련하여 앞으로 탐구해 보아야할 주제로 남을 것이다.

끝으로, 나의 현재 전공과 관련하여 볼 때, 알튀세르의 우발성의 유물론, 이데올로기론, 과잉결정 이론이 역사를 설명할 수 있는 일반이론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또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탐구하고 싶다. 지금까지 논문 세 편을 통해 살펴본 것은 알튀세르의 이론들이 하나의 구조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국제적인 관점에서 다수의 주체가 서로 물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 안에서 알튀세르의 이론은 얼마나 큰 설명력을 지니게 될 것인가? 예컨대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주도이념(die leitende Idee)’ 개념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국제적(international)’ 변용(variation)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주도이념이란 헤겔의 결정론적 진보사관을 비판하기 위해 랑케가 내세웠던 개념인데, 모든 시대는 그 시대가 작동하는 고유한 지배적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중세 유럽에서 교황의 (상징적) 지배는 그 시대의 고유한 주도이념이었다. 이는 어떤 면에서 초-국가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국가적(inter-national)’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개념을 통해 현재 시도되고 있는 트랜스내셔널리즘(transnationalism) 역사학에 접근하는 것도 유의미할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이러한 상황에서의 과잉결정은 어떤 것인가? 의문은 꼬리를 문다.

처음 알튀세르의 우발성의 유물론에 주목한 것은 그것이 형이상학적으로, 특히 존재론적으로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이단적위치 때문이었다. 그러나 알튀세르를 공부하면서 그 이단적 이론이 실재를 얼마나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다. 사변철학이란 일반적 관념들의 정합적이고 논리적이고 필연적인 체계를 마련하여, 그를 통해 우리 경험의 모든 요소들을 해석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알튀세르의 이론은 이러한 시도에 적합해 보인다. 나는 희망을 걸어본다.


IV. 참고문헌

1. 단행본

루이 알튀세르, 철학과 맑스주의, 서관모·백승욱 옮김, 새길, 1996.

윤소영, 알튀세르의 현재성, 공감, 1996.

진태원 엮음, 알튀세르 효과, 그린비, 2011

Alfred North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Corrected Edition, ed. David Ray Griffin, Donald W. Sherburne, NY : The Free Press.

Louis Althusser, L'avenir dure longtemps (suivi de Les Faits), ed. Stock / IMEC., 1992, 2007.

 

2. 논문

김기봉, 랑케의 ‘wie es eigentlich gewesen’ 본래 의미와 독일 역사주의, 湖西史學39.

변상출, 에드워드 톰슨의 알튀세르 비판의 실제, 철학논총74집 제 4, 2013.

서용순, 알튀세르와 바디우 : 정치적 주체성의 혁신을 위하여, 사회와 철학20, 2010.

진태원, 스피노자와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 상상계라는 쟁점, 근대철학31, 2008.

홍준기, <주체 없는 과정> 인가, <과정으로서의 주체>인가: 정신분석학과 알튀세르, Journal of Lacan & Contemporary PsychoanalysisVol, 5 No. 1 Winter, 2003.

Louis Althusser, “Contradiction and Overdetermaination”, 1962.

Louis Althusser, “Ideology and Ideological State Apparatus”, 1970.

 

3. 웹사이트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http://plato.stanford.edu/entries/althusser/

Wikiquote, http://fr.wikiquote.org/wiki/Louis_Althusser



주석은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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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책 읽어주는 남자><오뒤세이아>

-영화 속의 <오뒤세이아> 영향 관계 파악하기

 


I. 들어가며 : 방황하는 자들의 폴리포니

사람들은 호메로스의 주제가 귀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오뒤세이아>는 유랑에 대한 책이다. 집이라는 곳은 다만 [돌아가고자] 꿈꾸는 곳이지(Everyone believes Homer’s subject is homecoming. But in fact, The Odyssey is a book about a journey. Home is a place you dream of; 번역은 필자).” -영화 중에서.

<오뒤세이아>는 상실한 자의 이야기이다. 집을 상실한 자의 유랑하는 이야기이다. 상징성으로 보면 그것은 마음 둘 곳 없이 방황하는 자의 이야기이다. 영화 <책 읽어주는 남자>에는 여러 명의 오뒤세우스가 등장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비슷한 선율들이 시간차를 두고 등장하며 진행하다가 함께 모이는 다성음악처럼, 어느 지점에서는 함께 울리기도 하고, 어느 지점에서는 서로 어긋나기도 하며 하나의 큰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영화 <책 읽어주는 남자>방황하는 자들의 폴리포니(polyphony)’라고.

 

II. 오뒤세우스들 : 마주침, 어긋남, 울림

앞서 언급했듯, 이 영화에서 오뒤세우스들이 등장하는 양상은 다양하고 복잡하다. 우선 본 절에서는 주인공 마이클과 한나의 관계에 주목해, 그와 관련된 세 가지 양상만을 살펴볼 것이다. 키워드는 상실’, ‘방황’, ‘안정(정착)’이다.

 

1. 1958: 마주침, 짧은 만남

마이클 버그, 15. 한나 슈미츠 36. 옷을 깔끔하게 차려 입고 다니는 마이클의 가정은 의외로 엄숙하다. 식탁에는 늘 정적이 흐르며 가족끼리 보통 주고받는 개인적인 이야기조차 오가지 않는다. 마이클에게 집은 이 아니다. 한나 슈미츠는 독신의 여성이다. 언제나 제복을 빳빳하게 다려 입고, 말을 길게 하지 않는다. 그녀가 브래지어까지 다림질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일종의 강박증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 그녀의 상실감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둘의 마주침은 우연했다. 구토 증세를 보이며 거리에 앉아있는 마이클을 발견한 한나는 그를 집까지 바래다주었고, 후에 마이클은 사례 차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둘의 우연한 마주침만남으로 응고할 수 있던 계기가 있었다. 한나가 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훔쳐보고는 며칠 후에 마이클이 다시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던 것이다. 둘의 관계는 급속하게 육체적 관계를 맺는 사이가 되었고, 마이클은 여기서 가정을 대체할 안정감을 느낀다.

한편 이 관계를 한나의 시각에서 볼 수도 있다. 둘의 일과는 육체관계 후에 마이클이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는 식이었지만, 어느 순간 한나의 요청으로 그 순서를 바꾸게 된다. 마이클이 책을 읽어주는 것에서 한나가 일종의 위안을 얻는다는 사실이 이 장면에서 암시된다. 책의 슬픈 대목에 이르러 한나가 마이클에게 안겨 울고 있는 컷신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안정감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한나가 갑자기 어디론가 떠나버림으로써 둘의 만남은 갑작스럽게 중단되어 버린다.

 

2. 1966: 어긋남, 사후적 충격

마이클 버그, 법대생. 한나 슈미츠, 전범 재판 피고인. (Röhl) 교수가 주관한 특별한세미나에 지원한 마이클은 나치 전범 재판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기소된 10명 남짓의 피고인 중에 한나가 있었다. 죄목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나치에 협력했다는 것.

계속된 증언은 한나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이 제시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경비(guard)로 일할 당시, 한나는 어린 아이들을 따로 모아 자신에게 책을 읽어줄 것을 요구했었다는 것이었다. 또 당시의 책임을 뒤집어쓰면서 한나는 필적 확인 작업을 거부한다. 여기서 한나가 문맹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한나의 방황이 시작된 지점.

그러나 여기서 마이클은 한나에게 다가가는 대신 도피하는 것을 선택한다. 한나가 사실 글을 읽고 쓸 수 없다는 사실은 재판 결과를 뒤집을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그는 끝까지 침묵을 지킨다. 또한 한나와의 면회를 신청해놓고는 끝내 그 자리에 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나가 나치 협력자였다는 사실에, 나아가 자신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다는 모습에 마이클은 혼란을 겪는다. 이를 통해 과거의 경험이 트라우마틱하게 새롭게 해석되고 이 둘은 다시 한 번 어긋난다.

 

3. 1976: 울림과 엇갈림

마이클 버그, 판사. 한나 슈미츠, 수감자. 10년 뒤, 마이클은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아내와는 이혼하고 어린 딸과 함께 살고 있다. 그러다 갑자기 어머니를 방문하게 되는데, 그는 옛 집에서 자신이 한나에게 읽어주던 <오뒤세이아>를 발견한다. 한참 생각에 잠기더니 그는 <오뒤세이아>를 녹음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카세트 테이프를 모아 한나에게 보낸다. 10년 동안 회피해왔던 기억에게.

테이프를 매개로 둘은 다시 연결된다. 한나는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마이클은 밤낮 모르고 책을 읽어 녹음한다. 그러나 마이클은 정작 과거의 아픈 기억을 마주하지 못한다. 한나의 편지에 답장을 하지도 않고, 한나가 출소한 뒤 그녀를 보살펴달라는 전화에 미온한 답변만을 한다. 한나를 면회 가서도 그녀를 위해 직업 자리를 알아봤다, 방을 구했다 정도의 형식적인 대화만을 나눈다.

한나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기억과 화해하게 된다. 오랜만에 만난 딸에게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고 살았노라고 고백한다. 그는 한나의 유언에 따라 그녀가 모은 돈을 아우슈비츠 생존자와 그 후손들을 위해 쓰기로 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그가 한나의 묘지를 방문해 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으로 끝난다.

 

III. 결론 : 불완전마침

그러나 이 폴리포니는 불완전마침으로 끝을 맺는다. 한나가 자살한 동기를 우리는 알 수 없고, 마이클 역시 여전히 정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맨 처음에 배치된, 그의 불안정한 생활 모습은 이런 방황이 끝없이 순환, 반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듯하다. 정착할 수 없는 영원한 방황. “집이란 곳은 다만 [돌아가고자] 꿈꾸는 곳이지.”

한편 더 넓은 시각으로 이 영화를 보는 사람도 있다. 이 글에서는 마이클과 한나의 주선율에 집중하다보니 보조적 선율을 놓치게 되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서길완, <더 리더-책 읽어 주는 남자> : 홀로코스트와 사후기억세대, 문학과 영상, 2011 봄이 참고된다. 이 글에서는 한나와 마이클, 그의 딸 줄리아의 단절과 화해를 통해 이 영화의 사회적 함의를 찾아내고 있다. 여기서 오뒤세우스들은 전쟁세대, 사후기억세대, 그리고 3세대라는 얼굴로 등장한다.



첨언---

영화 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그래서 역사는 언제나 폴리포니다. 마주치고, 함께 울리고, 그러나 결국 불완전마침으로 어긋나버리고 마는.


20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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