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사상에서 개념의 지위와 인간의 태도


 

I. 들어가며

 

이 글은 공자 사상에서 개념이 갖는 지위와 의미,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검토해 보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공자 사상에서 은 인간사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표상된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모순혹은 부조리라 부른다. 현실의 모순은 현실을 합리적으로 파악하고 그것으로부터 정당한 행동 양식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철학 일반에서뿐만 아니라, 인격 수양을 통해 바른 정치를 구현하려던 공자의 사상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문제이다.

합리적으로 해석 가능한 현상의 문제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풀어나가면 충분한 반면, 그렇지 못한 문제는 그것을 마주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합리성뿐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한다. 예컨대 죽음의 문제, 과 악의 문제, 길흉화복吉凶禍福의 문제 등이 이런 것들이라 볼 수 있다. 이 문제들은 사마천에게서도 발견되는 바, 선한 사람이 가난과 불행과 요절에 고통 받는 반면 악한 사람이 부와 권력을 누리고 천수를 다하는 등 세대가 거듭되도록 변하지 않고 인류를 괴롭힌 문제라 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조차 이 문제들은 한 사회의 건전함을 평가하는 기준에서 빠지지 않는다.

이 글은 먼저 공자 사상에서 개념이 차지하는 위상을 검토할 것이다. 기본이 되는 텍스트는 󰡔논어󰡕이다. 그 안에서 이 등장하는 횟수를 살펴봄으로써 그 위상을 가늠해볼 것인데, 이는 기존 연구 성과를 수용하되 그 결점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양적인 통계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개념이 간접적으로 등장하는 횟수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주장이기도 하다. 그렇게 하였을 때에 개념의 의미와 그 등장 양상이 상호보완적으로 명료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 후 󰡔논어󰡕에서 등장하는 개념의 등장 양상을 열거하고 종류별로 구분한다. 이 분류를 통해 우리는 인간은 어떤 문제를 통제하고 해결할 수 있고, 어떤 것은 그럴 수 없는가에 대한 공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그 각각의 경우가 어떻게 인간사에서 모순 혹은 부조리로 드러나는지에 대해 서술한다. 끝으로, 그것들을 통해 공자가 을 대하는 태도를 추론해 보는 것으로 이 글은 마무리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자 시대의 종교적 배경이 참조되는데, 왜냐하면 전통적인 하늘[]’ 숭배의 퇴조가 공자 사상에 미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일관되는 문제의식은 종교적 색채를 지우기 힘든 내지는 천명이 공자의 인문주의 사상과 어떻게 정합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공자 사상은 흔히 인간 사회의 문제를 초월적 힘에 의지하지 않고 인간의 주체적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사상으로 이해된다.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가 덕으로써 정치를 펴면 이상적인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는 그의 생각이 그 근거로 여겨진다. 이때, 초월적 존재인 천과 천명은 그의 사상에서 부수적인 것 혹은 과거 관습의 잔재 등으로 생각되곤 한다.

 

II. 󰡔논어󰡕에서 개념의 지위와 등장 양상

 

1. 󰡔논어󰡕에서 개념의 지위

 

이나 와 같은 개념과 달리 󰡔논어󰡕에 자주 등장하지는 않는다. 표면적으로 해석할 때 우리는 공자의 사상 체계에서 명이 이나 에 비해 중요하지 않은 개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논어󰡕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구절은 지명知命지례知禮’, ‘지언知言을 같은 선에 놓으면서, ‘지명을 군자 됨의 필수 요건으로 두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명을 아는 것이 군자 됨의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개념의 무게감만으로 단순히 명 개념이 공자 사상에서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주장하기는 힘들다. 󰡔논어󰡕에 명에 대한 언급이 드문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공자가 실제로 명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인지, 혹은 실제 언급은 자주 하였으나 󰡔논어󰡕 기자에 의해 소수를 제외한 것들이 누락된 것인지 알아야 한다. 이때, 󰡔논어󰡕 󰡔자한편에 있는 한 가지 구절을 참조해볼 필요가 있다. , “子罕言利與命與仁(자한).”

이에 대한 고전적인 해석은 공자가 세 가지 모두를 적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택용은 󰡔논어󰡕 전체에서 각각 10, 15 등장한 데 비해 이 압도적으로 109회 등장한 점을 들어 이 해석을 반박한다. 그는 공자가 를 드물게 말했지만 은 허여했다는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그는 비록 에 비해 󰡔논어󰡕에서 더 많이 언급되지 않았으나, 대신 과 관련된 사태에 대한 언급이 많다는 점, 또한 가치를 인정하다로 새길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이를 정당화한다.

자한편의 위 구절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이 비록 그 구체적인 내용에서 상이할지언정 동등한 지위에서 서술되고 있다는 느낌을 반영한다. 그러나 󰡔논어󰡕에 각 개념이 등장하는 횟수를 따져보았을 때, ‘의 비중이 다른 두 개념보다 더 크기에 세 개념이 같은 선상에서 단순 비교될 수 없으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물론 어떤 개념이 󰡔논어󰡕에 더 자주 등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만큼 더 중요한 개념이라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단순한 수치상의 차이일지라도 그것을 의미 있게 서술하기 위해 우리는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일 있다.

먼저, 위의 주장에 대한 직접적인 동의나 반대에 앞서 우리는 단순한 통계적 견지에서 에 대해 접근하는 것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접근은 󰡔논어󰡕에 등장하는 이 모두 동질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예컨대 리인편에 등장하는 仁者安仁 知者利仁의 경우, ‘의 목적어로 쓰인 仁德으로 해석하는 것보다 사람내지는 타인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인덕을 평안케 한다거나 인덕을 이롭게 한다는 해석은 그 자체로 모호하여 정확히 어떤 사태를 가리키는지 불분명할 뿐 아니라, ‘󰡔논어󰡕 전체 맥락에서 상극을 이루는 개념이라는 점도 고려할 수 있다. 또한 위 구절에서 사람으로 해석하였을 때 공야장편에서 공자가 자신이 품은 뜻을 말한 老者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라는 구절과도 정합성을 이룰 수 있다.

우리의 논의에서는 자가 모두 윤리적 덕목으로서 仁德을 의미했는지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위에서 논의하였듯 󰡔논어󰡕에 등장하는 모든 이 같은 뜻을 갖고 있다고 단언하기 힘들며, 만약 서로 다른 뜻이 한 글자로 통용되어 문맥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졌을 경우, ‘’, ‘’, ‘의 등장횟수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논어󰡕에서 각각의 개념이 갖는 중요성을 가늠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남규는, 어원적으로 볼 때, ‘두 사람을 의미하던 글자였으며 과 종종 혼용되었고, 󰡔논어󰡕에서 등장하는 仁德의 뜻을 함께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논어󰡕에서 이 쓰인 구문을 분석하면서 그것이 으로 대체될 수 없는 경우는 57번 등장한다고 결론 내렸다.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경우를 제외하기보다 대체될 수 없는 경우를 세는 까닭은, 전자의 결과가 모두 仁德으로 수렴되는지 확언할 수 없을뿐더러 후자의 결과가 더 엄밀하게 신뢰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위에서 이택용의 논지의 근거로 활용되었던 통계는 조금 수정될 필요가 있다.

한편 공자가 말한 내용 가운데, ‘과 관련된 사태 중 직접적으로 이 언급되지 않는 경우는 󰡔논어󰡕28번 등장한다. 공자가 에 대해 언급했다내지는 가치를 인정했다고 할 때, 그것이 과 관련된 사태를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면 에 대해 간접적으로 언급하였던 경우도 위의 통계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공자가 실제로 에 대하여 적게 언급했다고 단언하기 힘들다. 󰡔논어󰡕의 기자들이 공자의 언행 가운데 특정 개념을 선호하지 않고 균형 있게 기록하였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공자가 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43, ‘인덕에 대해 57번 언급하였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논어󰡕에서 에 버금가는 비중으로 등장한다는 것을 확인했으며, 나아가 그것이 공자 사상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가늠해볼 수 있다. 이때, 하나의 반론이 존재할 수 있다. , ‘드물게 말했다언급했다/가치를 인정했다는 상반되는 뜻이기에 기초적인 한문 문법 상 子罕言利與命與仁子罕言利與命與仁(강조는 논자)”이 되어야 위의 해석이 자연스럽게 성립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또한 이 경우에도 을 빈어賓語로 받는 을 받는 가 각각 허여하다그리고의 뜻으로 쓰인 점도 지적될 수 있다. 한 문장 내에서 같은 글자가 서로 다른 뜻으로 쓰인 것이다.

이런 주장은 분명 유효하다. 그러나 󰡔논어󰡕 단편의 곳곳에서는 서로 상반되는 의미의 용언이 나올 때 없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으며, 비슷한 위상의 용언이 병치될 때에도 그런 경우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논어󰡕의 단편들이 형성될 때에 공자의 구어체 문장을 그대로 옮기려 한 데에서 비롯된 듯하다. 텍스트에서 가 쓰이거나 생략되는 정확한 원리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이 들어가거나 생략됨으로써 문장이 말의 리듬에 부합하는지 여부가 주목된다. 둘째로 의 경우 학이편의 단편에서 한 단어가 서로 다른 뜻으로 쓰인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 자금이 자공에게 묻는 바, “夫子至於是邦也 必聞其政 求之抑與之(강조는 논자)”에서 밑줄 친 부분은 의문사로서 쓰인 반면, ‘다음에 쓰인 는 본용언으로서 기능한다.

앞서 논의한 바, ‘󰡔논어󰡕에서 다루어진 경우가 실제로 비대칭적이기에 이런 사실을 효과적으로 해석하려 할 때는 위와 같은 해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비록 이는 텍스트 내적인 분석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만약 알려지지 않은 초기 파편들이 더 많이 발굴되어 공자 생전에 ’, ‘’, ‘이 실제로 동등하게 적게 언급되었다는 것이 밝혀지지 않는 한, 우리는 잠정적으로 위의 해석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게 하였을 때 우리는 개념이 공자에 있어 개념에 비견할 수 있을 만큼의 무게와 중요성을 갖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3. 󰡔논어󰡕에서 개념의 등장 양상

 

󰡔논어󰡕에서 개념이 직접 등장하는 경우를 유사한 의미 별로 분류하여 열거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A. 정치권력과 관련된 의미

A-1. “可以寄百里之命” (태백)

A-2. “君召命 不俟駕 行矣” (향당)

A-3. “使於四方 不辱君命” (자로)

A-4. “陪臣執國命” (계손)

A-5. “舜亦以命禹” (요왈)

 

B. 생사生死와 관련된 의미

B-1. “亡之 命矣夫 斯人也而有斯疾也” (옹야)

B-2.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선진)

B-3. “死生有命 富貴在天” (안연)

B-4. “見危致命 見得思義” (자장)

 

C. 운명運命과 관련된 의미

C-1. “五十而知天命” (위정)

C-2. “子罕言利與命與仁” (자한)

C-3. “賜 不受命而貨殖焉 億則屢中” (선진)

C-4. “道之將行也與 命也 道之將廢也與 命也 公伯寮 其如命何” (헌문)

C-5. “君子有三畏 畏天命 畏大人 畏聖人之言” (계씨)

C-6. “不知命無以爲君子也” (요왈)

 

이는 앞서 제시한 이택용의 통계와는 차이가 있는데, 이는 앞선 논자가 인간이 주체가 되는 의 경우를 빼고 센 데에 비해, 여기서는 국정이 연루되지 않은 단순한 심부름이나 외침의 경우를 뺀 나머지는 모두 목록에 포함시킨 데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爲命裨諶 草創之(헌문)”와 같은 경우에 외교문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에 따를 경우, 결론을 앞서 말하자면 위계적 관계에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무엇을 시키다라는 뜻과 멀어지게 되므로 이 논의와는 관련성이 적어지게 된다. 따라서 󰡔논어󰡕에서 의 등장 양상에 대한 논의는 위의 인용문에 한정한다.

은 본래 입[]으로 명령[]하다라는 뜻이다. ,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명령을 내린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는 위의 인용문 묶음 A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 , 등을 포함하는 초월자가 인간에게 명령을 내린다는 뜻 역시 있다. 이때, 의 구체적 내용은 인간의 노력과 의지를 벗어나 있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인용문 묶음 B생사C운명이 이에 속한다. 이는 특히 인용문 C-4에 잘 드러나 있다. 나라에 도가 행해지는 것도, 행해지지 않는 것도 공자는 모두 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특히 나라의 정치에 대한 공자의 태도는 의미심장한데, 그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노력으로 정치가 나아질 수 있다고 본 반면, ‘가 행해지는 것은 그 노력을 넘어선 무언가가 작용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한편, 개인의 노력을 넘어선 어쩔 수 없는 것의 영역이 󰡔논어󰡕에는 더 보인다. 이는 그러한 사태에 대한 공자의 태도에서도 유추해볼 수 있다. 예컨대 인용문 B-2에서 공자는 안회의 이른 죽음을 그의 명이 짧은 탓으로 보면서 그것에 대해 한편으로는 하늘을 원망하면서도 어느 정도 담담히 수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 ‘에 의한 사태는 노력으로서 바꾸고 개선해야할 문제라기보다는, 그것에 처했을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죽음과 운명뿐 아니라 부귀의 문제와 명예의 문제가 이에 해당한다. 모두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D. 부귀富貴와 관련된 사태

D-1.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可如 子曰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학이)

D-2. "不仁者 不可以久處約 不可以長處樂“ (리인)

D-3. “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居也” (리인)

D-4. “放於利而行 多怨” (리인)

D-5. “賢哉 回也 一簞食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 回也” (옹야)

D-6. “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吾從所好” (술이)

D-7.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술이)

D-8. “貧而無怨 難 富而無驕 易” (헌문)

D-9. “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위령공)

D-10. “君子謀道不謀食 (중략) 君子憂道 不憂貧” (위령공)

C-3. “賜 不受命而貨殖焉 億則屢中” (선진; 중복되는 인용문)

 

E. 명예[人之知己]와 관련된 사태

E-1.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학이)

E-2.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학이)

E-3. “不患莫己知 求爲可知也” (리인)

E-4. “夫聞也者 色取仁而行違 居之不疑” (안연)

E-5. “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 其天乎” (헌문)

E-6. “君子病無能焉 不病人之不己知也” (위령공)

E-7. “君子疾沒世而名不稱焉” (위령공)

E-8. “年四十而見惡焉 其終也已” (양화)

 

이를 통해 볼 때, 우리는 󰡔논어󰡕에서 직접 언급된 사례 이외에도 공자가 과 관련된 사태에 대해 말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공자는 인용문 묶음 B, C의 경우 이라는 단어를 직접 언급한 반면, 묶음 D, E의 경우는 그와 관련된 사태만을 말하였을까. 한 가지 기준을 제시해보자면, 묶음 B, C는 군자 됨의 과정에 본질적인 것이고, 묶음 DE는 그것에 부수적인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는 인용문 D-10E-6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때, ‘부수적이라 함은 그것이 군자 됨의 과정에 핵심적인 덕목은 아니지만, 군자로서 살아가기 위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임을 뜻한다.

부귀의 경우, 군자는 부당한 방법으로 부를 좇지 않으나 부유함에 처했을 때 그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하며, 가난에 처했을 때 역시 그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 어떤 행위가 특정 상황에 맞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인용문 D-9에 보면 소인은 곤궁함에 처했을 때 지나침[]이 있다고 말했는데, 이를 통해 볼 때 군자는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중용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 그 구체적 덕목은 인용문 D-1D-8에도 나와 있듯, 가난에 처했을 때에 (사람이나 하늘을) 원망하거나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첨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며, 부유할 때에 교만하지 않고 예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즐거움과 예는 모두 가난함이나 부유함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자신을 되돌아보았을 때에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부유함과 가난함, 즉 생계의 문제는 인간을 옭아매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공자는 생계의 문제에 너무 주의를 기울일 경우 그것에 매몰되어 옳지 못한 행동을 범하기 쉽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한 걸음 떨어져 자신을 돌아보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였을 때 오히려 가난 속에서도 지나치게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으며, 부유함 속에서도 지나치게 사치를 부리거나 부를 잃을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부터 군자다운 행동을 도모하지 않고 그것을 부정하거나 그것에 매몰될 경우 도리어 그는 가난 속에서 무너지고 부를 쉽게 잃을 수 있다(D-2).

남이 자신을 알아주는 것의 문제는 부귀의 문제와는 결을 달리 한다. 인용문 E-4에서 보듯 공자는 남에게 알려지는 것이 마치 교언영색巧言令色하는 사람의 이야기인 것처럼 말한다. 공자는 오히려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오히려 자신이 남을 몰라주는 것을 걱정하며(E-2), 차라리 행동을 능히 하지 못함을 걱정하라고 말한다(E-6). 이것만 보면 공자가 명예의 문제를 군자의 길과는 완전히 무관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인용문 E-78의 내용은 이와 대비된다. 한편 공자는 󰡔논어󰡕 곳곳에서, 훌륭한 인격으로서 주변 사람을 감화시키는 것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이 세 가지를 종합해 보았을 때 공자에게 남이 자신을 알아준다는 것은 자신의 인격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아준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훌륭한 인격을 지닌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그의 인격에 감화되어 그의 이름을 높여줄 수 있으나 모든 상황이 꼭 그런 것은 아니며, 오히려 지극한 군자가 이름을 알리지 못하고 지극한 소인이 명예로워질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 공자가 그의 삶에서 체험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사람의 인격이 그의 말과 행동에서 은은히 배어나온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널리 인정하고 높이 여겨주는 것은 개인의 노력을 떠난 일이라고 보았다.

그런 어쩔 수 없는사태에 직면하여 개인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소극적으로 남의 미움을 사지 않도록 스스로를 단속하는 일(E-8), 그리고 타인의 평가에 연연하여 스스로 가야 할 길에 소홀해지지 않는 것이다. 비록 공자 자신의 말로 전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군자의 길, 의 길은 삶 안에서 끝나리라 생각할 수 없는 것이며, 그 점에서 우리는 생전의 평가보다 사후에 남겨질 이름이 더 중대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E-7). 생전의 평가는 그 사람을 둘러싼 정치적 환경과 여건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반면, 사후의 평가는 그것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옳음으로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III. 공자 사상에서 에 대한 인간의 태도

 

1. 부조리한

 

전통적으로 하늘의 명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 여겨졌다. 󰡔논어󰡕에서 우리는 인간의 목숨과 운명, 그리고 부귀와 명예가 의 영역에 속하는 것임을 확인했다. 공자 사상에서 은 인간의 윤리적, 인격적, 존재론적 경지의 완성이라는 모티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의 군자학의 목표 가운데 하나인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이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때, 인격적 완성은 한 순간의 초월transcendence, 황홀경ecstasy, 내지는 종교적 신성 체험과는 관련 없이, 오랜 시간 동안 예악禮樂과 시를 익히고 체화하는 과정 끝에 도달하는 경지이다. 이 점에서 공자의 사상은 종교적이라기보다 인문적이다.

이 점에서 을 대하는 공자의 태도는 춘추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종교적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 서주시대까지 사회통합의 기능을 수행했던 천에 대한 신앙이 기울고, 천의 탈인격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흐름에서 실제 종교적 기능을 수행했던 의례는 공자 사상에서 한편으로는 인격 수양의 과정으로 흡수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민간인을 대상으로는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만이 중시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당연한 정의 발로라는 점 이외에도 사회통합의 기능을 가진 점에서 주목되었다. 한편 상제의 대상이 되는 귀신鬼神에 관하여 공자는 공경하되 멀리하라는 대답을 내놓았다(옹야). 이런 식으로 공자는 과거 천에 대한 신앙을 구성하던 요소들을 인간의 일로, 또한 인간의 일을 위하여 필요한 일로 전이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논어󰡕에서 은 문맥 상 자주 등장하는 데 비해, 그 전통적인 짝이었던 이 드물게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런 노력의 반영이다.

그럼에도 󰡔논어󰡕에서 드물지 언급되지 않을뿐더러 공자 사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나 과 같은 초월자의 개념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 개념에 귀속되었던 현실적 사태는 여전히 발생한다. 공자가 인문적 견지에서 인간의 관할로 옮겼던 사태들은 그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에 의한 사태는 인간의 노력으로 가까워질 수는 있지만 닿을 수는 없는, 노력의 영역을 초월한 것들이다. 공자는 바른 정치, 백성의 안정적인 삶, 그리고 사회 통합 등 사회·정치적인 것들을 천의 영역에서 성공적으로 분리해 내었다. 그러나 그것이 앞서 다룬 죽음과 운명의 문제이다.

앞서 언급한 부귀와 명예의 문제는 사회·정치적인 것인 동시에 개인의 노력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을 갖고 있는 모호한 영역이다. 노력하는 자가 부유해지기도 하는 반면 자공처럼 상업이 자신의 천직이 아님에도 (시세의 차이에 대한) 단순한 추측으로 부를 쌓기도 하고(인용문 C-3), 아첨하는 자가 명예로워지는 반면 공자 자신처럼 올곧은 자가 기용起用되지 못하기도 한다. 이런 모순은 마치 명과 떼어낼 수 없는 것인 양 환영처럼 등장한다.

죽음과 운명과 관련된 사태들에서 이러한 모순은 극대화된다. 안회와 같은 덕망 있는 인물은 왜 오래 살지 못하고 일찍 횡사橫死했으며(인용문 B-2), 백우伯牛와 같은 인물은 중병에 걸려 사망했는가(인용문 B-1). 이는 사마천에게서도 발견되는 중대한 문제이다. 백이伯夷·숙제叔齊와 같은 인물은 수양산首陽山에 숨어 고사리로 연명하다가 굶어죽고, 도척盜蹠과 같은 악인은 천수를 누렸는가. 이는 선한 자가 좋은 결과를 받고 악한 자가 나쁜 결과를 받는다는 기존의 천 주체의 정의 인식과는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한 천 사상이 만연하였던 때에 사람들은 위와 같은 일들이 예외적인 사례에 속한다거나, 성경의 욥기에서와 같이 새로운 논리를 개발하여 신을 옹호했다. 그러나 이는 모순 혹은 부조리 그 자체를 합리적으로 해결하거나 삶의 논리로 흡수하고 극복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부조리를 은폐하고 망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운명의 문제를 다룰 때에 우리는, 비록 운명이라는 명칭은 필자가 자의적으로 붙인 것이지만, 그것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먼저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논어󰡕의 구절들에서 그 구체적 내용을 추론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앞선 인용문 C-3은 이에 대해 한 가지 비스듬한 빛을 던져주는 구절이다. , 자공은 명을 받지 않았음에도재화를 불렸다. (시세의 차이에 대해) 단순한 추측이 잘 맞아떨어지는 일이 많았다. 여기서 不受命이라는 표현이 주목된다. , 자공이 상업에 대해 명을 받지 않았다면 그의 추측이 잘 맞아떨어지는 일은 예외적이고 비상非常한 일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보면, 사람이 하늘이 그에게 명한 일을 한다면 그 일은 비상한 요행僥倖 없이도 이루어질 것이다. 인간중심적 언어로 표현한다면, 천명을 실천한다는 것은 인간에 내재된 본질을 실현하는 것이며, 이는 즉 자기실현의 과정이다. 인간이 자신이 세상에서 해야 할 바의 것, 능히 할 수 있는 바의 것을 할 때에 그는 마치 하늘이 도운 것처럼 그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의 부조리는 그것이 인간의 의식적 선택 내지는 결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결단 이전에 이미 주어진 것이라는 점에 있다. 그것은 인간에게 명에 따를 것인가 혹은 따르지 않을 것인가라는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보이지 않는 주체성으로 존재한다.

이 두 가지의 명이 서로 얽혀 새로운 부조리를 만들기도 한다. 하늘이 인간에게 세상에서 이루어야 할 일을 주면서도 그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기 전에 그의 목숨을 가져가는 일이 존재한다. 공자에게는 안회의 경우가 정확히 그러한 일이다.

한편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운명 또한 󰡔논어󰡕에 등장한다. 인용문 C-4의 경우가 그러하다. 이 인용문의 앞선 문맥은 헌문편에 등장하는데, 인용문은 공백료를 자신의 힘으로 제거하려는 자복경백에 대한 공자의 반응이다. 공자는 자복경백에게 도가 실현되는 것도 실현되지 않는 것도 명에 의한 것일 뿐이니 괜한 움직임을 자제하라고 하는 것이다. 이때, 도가 실현된다 함은 자로를 참소한 공백료에게 벌이 내려지고 자로의 결백이 입증되는 것을 뜻한다. 공자는 이 일이 비단 공백료 개인에게 한정된 일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법칙에 따라 흘러갈 일이라고 본 것이다.

이 때의 은 개인을 넘어선 사회 내지는 역사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을 앞서 언급한 개인에게 주어진 본질로서의 운명과 대비하여 사태의 추이라고 이름 해볼 수 있겠다. 개인을 초월한 거대한 차원에서 역사를 이끌어 가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에 부합할 때에 우리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고, 그것에 부합하지 않거나 반할 때에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이 역시 인간에게 부조리를 던져준다.

 

2. ‘지명知命의 의미

 

앞서 논의한 바, ‘과 관련된 사태들의 의미를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목숨, 인간 내면적 본질, 사태의 추이(이것과 앞의 항을 묶어 운명이라 칭하였다.), 부귀, 명예[人之知己]. 우리는 이것들이 공통적으로 인간 개인의 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들은 그 앞에 처한 인간들에게 어떤 모순 내지는 부조리를 보여주는데, 이는 개인의 힘으로 해결해 버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부조리에 당하여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가장 원초적인 반응은 누군가를 탓하는 일이다. 인용문 E-1, 2를 비롯하여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공자가 남을 탓하지 말라고 경계하는 이유는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원초적인 반응이기 때문이다. 부귀와 명예의 문제는 그 탓을 사람에게 돌릴 수 있다고 할 때, 죽음과 운명의 문제에 직면하여 사람들은 하늘을 원망한다. 그러나 하늘을 원망하는 것 자체는 부조리한 사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 그것 역시 문제를 덮어두는 일이다.

물론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사람들의 목숨이 위협받고 운명이 바뀌는 일은 분명 인간의 힘으로 극복해야 할 것이다. 공자가 바른 정치를 주장하는 배경에는, 그렇게 함으로써 전쟁을 막고 사람들의 평화로운 삶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노력을 넘어선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해, 그 사태들을 단순히 합리화하거나 원망하지 않으면서도 반대로 그것들을 삶의 논리로 포용할 때, 우리는 더 건강하고 완성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부유함이나 가난함에 처하여 공자는 그것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즐거움을 찾으라고 말하고, 남이 알아주지 않음에 처하여서는 그것을 통해 자신의 말과 행동을 반성하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사람은 자기 자신의 시각에 갇히지 않고 그것을 넘어 더 넓게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때에 우리는 貧而無諂 富而無驕(인용문 D-1)”하거나 不患人之不己知(E-2)”한 소극적 태도에 머무르지 않고 貧而樂 富而好禮하고 患不知人한 적극적 윤리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러한 적극적 윤리는 己欲立而立人(옹야)”하는, 지극히 인간적이어서 부조리하기까지 한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다.

죽음의 문제는 한 편의 짧은 글에서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앞으로의 논의 과제로 미뤄두는 편이 낫겠다.

한편, 어떤 길이 자신에게 맞지 않다고 생각될 때에, 셀 수 없는 노력을 바쳐 해온 일이 자신의 길이 아닌 것 같을 때에, 우리는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가? 있다면, 어떻게 하면 그것을 더 나은 삶을 위한 양분으로 흡수해 낼 수 있을까? 공자는 생애 여러 번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고, 그럼에도 그 길을 좇다가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도 사람인 이상 자신의 길에 회의를 느끼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대화가 주목된다.

 

F-1. “子畏於匡 曰 文王旣沒 文不在玆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 不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 (자한)

F-2. “子曰 天生德於予, 桓魋 其如予何” (술이)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첫째, 공자는 자신의 길에 대해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요, 둘째, 그 신념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파악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김성기에 따르면 공자가 처했던 시대적 배경은 점복을 통한 受命의 패러다임에서 인간의 주체적인 知命의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전자는 인간이 하늘로부터 특정한 명을 수동적으로 받아서 실천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하늘에 대한 신앙이 약해진 상황에서의 사태로서 인간이 스스로의 본질을 주체적으로 찾아가는 것에 가깝다. 전자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늘의 이념을 현실화시킬 한 사람이 선택되는 것이라면, 후자는 누구든 자신에 내재된 가능성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을 통해 본다면, 지명知命은 곧 지기知己이다. 내가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하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의 자기-앎은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직관적이며, 사변적이라기보다는 경험적이다. 그것이 직관적인 까닭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앎의 최종근거는 직관적 느낌이기 때문이다. 이 누구-물음에 대한 단순한 외면상의 파악은 정답이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행위와 나의 존재의 공명 내지는 일치를 반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불일치는 현상적으로 마음의 꺼림, 집중執中의 소실消失 등이 될 것이다. 이는 󰡔중용󰡕에서 개념을 참조해 볼 수 있다.

지명이 경험적 판단인 까닭은 앞서 말한 행위와 존재의 일치가 경험적인 사태인 까닭이다. 공자 자신도 이것저것 많은 일을 해보았지만, ‘사문斯文의 계승자로서 배우고 그것을 가르치는 일 이외의 것들은 잔재주에 머무를 뿐이었다. 또한 공자가 오십 세에 이르러 지천명했다는 말을 본다면 그것은 어떤 직관이되 한 순간의 섬광 같은 직관이 아니라 오랜 경험의 축적 위에 세워진 직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이런 주관적 확신이 흔들리지 않고 유지될 수 있는 근거는 때를 앎에 있다. 앞서 사태의 추이로서의 운명을 살펴본 바 있다. 그것은 인간 집단의 힘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이지도 않으며, 또한 온전히 개인적인 것도 아니다. 역사의 흐름은 그저 그러한 것[自然]으로 주어질 따름이다. 여기에 대해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실현하려는 뜻이 그 흐름과 일치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나아가 그것이 일치하는 때가 언제이며 그렇지 않은 때는 언제인가 하는 것이다. 태백편의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와 같은 문장에서 우리는 이러한 태도를 읽을 수 있다.

때를 안다는 것은 직관적이면서도 논리적인 것이다. 직관적이라 함은 사태의 추이라는 것은 인간사의 영역을 넘어선 무엇이기에 단지 어렴풋한 느낌으로 알 수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그런 것이고, 논리적이라 함은 그럼에도 크고 작은 사건들의 연관성이 그 사태의 추이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때를 알고 그것에 맞추어 처신하기 위해서 사람은 당대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정확히 읽을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파악된 사태의 추이가 자신의 뜻을 실현시켜 주기에 적합하지 않다면, 그는 숨거나[] 드러나는 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그것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공자의 경우가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다.

공자 사상에서 지명지기이며, 다시 그것은 주관적 확신이다. 이것은 과거 수명受命패러다임에서의 주관적 확신과는 달리 인간의 주체성이 짙게 반영된 것이며, 따라서 그 이상의 존재에 호소할 곳이 없는 운명이다. 명을 아는 자는 단순히 명을 받은 자와는 달리 세상의 부조리를 당하여도 그것을 자신 안으로 끌어들이며 따라서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不怨天 不尤人).” 나아가 자신의 길에 대한 확신은 좀 더 적극적인 방향으로 우리를 이끄는데, 공자 사상에서 그 경지를 이라는 상태로 이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바, 인격의 완성 혹은 자기 본질의 완전한 실현의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는 심지어 천과 인을 모두 배제한 고독solitude의 상태를 전제하는 것으로서 군자의 길은 결국 자기 자신에로 돌아와야 비로소 완성을 맞이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IV. 맺으며

이상 우리는 󰡔논어󰡕에서 개념의 위상과 등장 양상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따져 명에 대한 공자 사상에서 인간의 태도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논의하였다. “不知命無以爲君子也와 같은 표현에서 보듯이 공자 사상에서 개념이 갖는 무게감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인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우리는 󰡔논어󰡕에서 개념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살펴보았다. ‘󰡔논어󰡕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에 비해 명시적으로 많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아닌 인덕仁德’, ‘인정仁政등을 뜻하는 경우에 한정하고, ‘이 간접적으로 등장한 사례까지 함께 고려한다면 우리는 에 비해 결코 적은 비중을 차지하는 개념이라 말할 수 없다.

은 기본적으로 초월적 권위를 가진 등이 인간에게 명령을 내린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가리키는 사태나 상황 등이 개인 혹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을 유추했다. 이렇게 보았을 때, 󰡔논어󰡕에서 과 관련된 사태로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죽음과 운명의 문제이고, 간접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부귀와 명예의 문제라는 결론을 내었다. 이때, 전자와 후자의 구분은 공자 사상이 목표로 하는 바 군자-됨의 길에 그것이 핵심적인가 부수적인가를 기준으로 한다.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뜻에 비추어 이 과거 종교적 함의를 띠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그런데 신앙이 쇠퇴하였던 공자의 시대에 명은 다른 함의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공자 역시 어느 정도 종교적인 인물이었을 것으로 미루어지나, 그는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정치의 문제로 명확히 구분하였고, 종교의례 또한 인간의 보편적 삶에 봉사하는 방향으로 조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개인의 노력이나 정치로도 완전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공자는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을 모색하기보다는 그것을 대하는 태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궁구하였다. 위의 네 가지 문제를 대함에 있어 공자에게서 보이는 태도는 공통적으로 자기로의 회귀내지는 자기화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운명의 문제를 다루면서 우리는 그것을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 보았다. 첫째는 개인에 내재된 인간적 본질로서의 운명이고, 다른 하나는 사태의 추이 즉, 사회, 정치, 역사의 거대한 흐름으로서의 운명이다. 전자는 이 과거 가졌던 의미 가운데 하나인, 이 세상에서 개인이 지니는 사명使命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공자 자신에게는 그렇다. 그런데 공자 개인의 삶을 살펴보았을 때, 그 사명의 실현은 번번이 좌절되고 실패할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공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의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이를 보고 단순히 공자가 하늘의 사명에 대한 종교적 믿음에 경도된 것이었다고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점에서 앞서 인용한 요왈편의 구절에 등장하는 지명知命의 의미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즉 지기知己이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파악하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또 무엇을 잘 하는지에 대해 아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과거 수명受命의 패러다임에서 탈종교적인 새로운 사고 체계로의 이행이라고도 해석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탈신비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기-앎은 직관적이고, 경험을 필요로 하지만 여전히 부정적 판단만을 허할 뿐 긍정적 판단을 허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운명의 두 번째 의미에 대한 앎을 동반하지 않은 단순한 자기 확신은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과 하늘을, 자신과 인간 세상을 대립시켜 후자를 원망하고 매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그러한 남 탓, 또 반대로 하늘과 세상을 정당화하고 자신을 비난하는 자기 탓도 아닌 새로운 건전한 길을 모색하였다. 그것이 바로 때를 앎이다. 자신의 뜻을 세상에 펴기 위해 사람은 사회 혹은 역사와 관계할 수밖에 없는데, 사회와 역사 역시 그 자신의 고유한 흐름을 갖는 존재라고 보는 것이다. 그 흐름을 운명이라, 혹은 때[]라고 부를 수 있다.

공자에게 군자의 길은 때를 읽고 그것을 앎으로써, 자신의 뜻과 때가 맞지 않을 때에는 은거하는 한편 말을 조심하고 행동을 대범히 하며, 그것이 맞을 때에는 밖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게 하였을 때 군자는 혹은 인격적 완성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공자 사상의 목적은 그 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從心所慾不踰矩내지는 중용中庸의 상태라고 추측해볼 수는 있겠으나, 자세한 논의는 다음으로 미룬다.

에 대한 공자의 태도는 인간적이고 또한 주체적이다. 이는 세계의 부조리에 마주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완성된 태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비록 공자 자신의 사상에 천착하면서 󰡔논어󰡕만을 그 분석 대상으로 놓아 다소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유가 사상 일반이 아닌 공자 개인의 사상에 조금 더 집중해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발전시켜볼 수 있는 논의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두겠다.

 

 

V. 참고 문헌

 

󰡔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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