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가치에 대하여

 


§ 사유와 가치

사유가 실의에 빠진 사람에게 위로를 주고 잃은 사람에게 길을 밝혀주고,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데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다음 순간을, 다음 새벽을 꿈꿀 있게 해주는 것이라면, 다시 새로운 삶을 불탈 있게 하는 것이라면, 인간 사유에 대한 우리의 논의는 윤리에서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윤리는 가치에 대한 탐구이다. 가치는 우리가 삶의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추구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스스로 추구하는 가치를 가지지 못하였을 때에 우리는 가치를 가졌는가 가지지 못했는가를 문제 삼는다. 다음엔 얼마나 가질 것인가가 문제 된다. 마지막 순간에 우리는 쥐었던 주먹을 풀고 손바닥에 깊이 패인 손톱 자국을 바라보며 모든 가치들을 바람에 놓아준다. 모든 가치와 가치에 대한 욕심을 놓아버린 사람을 깨달은 한다면, 우리 삶의 여정은 경지를 위한 것이라 있는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사다리를 짜고, 사다리를 대고 위에 이르러서는 사다리를 던져 버리는 , 여기에 윤리의 역설이 들어 있다.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른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까닭은 아마 그들의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출발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갖고 싶다는 의욕과 욕심일 것이다. 순간도 끊어짐이 없이 우리 머리 속에는 생각이 흐르고, 감정이 흐르고, 그것들에 대한 생각과 감정이 흐른다. 의욕 한다는 것은 내가 바라는 하나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 생각에 대한 생각, 생각에 대한 생각에 대한 생각생각이 거듭될수록 원점에서는 멀어지고, 혹여 내가 하고 있다는 생각에, 혹은 하는 것이 생각에 미친다는 생각에 자만심이 생기고, 우월감이 생기고, 열등감이 생기고, 자괴감이 생겨난다. 그러면 우리는 본래 자기가 의욕 하였던 것이 무엇인지를 잊고 앞뒤가 막힌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다시금 출발점을 상기하려 한다. 우리 삶의 여정은 각자의 출발점에 대한 상실과 회복의 역사이다. 깨달은 자는 오직 출발점을 지키며, 생각을 붙잡는 생각들을 놓아주고 흘려 보낸다. 흔들림 없이 출발점을 고수하는 , 다시 말해 사유하지 않는 , 다시 말해 사유의 죽음을 경험하는 , 그것이 우리의 종착점이다.

그러나 깨달음의 상태가 글의 주제는 아니다. 글은 경지에 이르기 위한, 자각하고 있건 자각하지 못하건 시종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사유들의 줄기를 모색한다. 사유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줄기를 갈래로 잡아서 각각 초월주의, 인문주의, 세속주의라는 이름을 붙여줄 것이다. 각각은 가치의 속성을 초월적, 내재적, 세계-내적으로 파악한다.

 

§ 가지 가치

어떤 사람들은 초월을 희구한다. 초월이란 본래 나에게서, 현재에서, 내가 처한 환경에서 벗어나는 것을 추구한다. 초월주의는 초월적 가치를 추구한다. 초월하는 것은 신성을 체험하는 것이다. 신성함이란 기본적으로 내가 아닌 , 나의 바깥에 있는 무엇이 되는 데에서 생겨난다. 내가 아닌 , 지금 시간이 아닌 , 여기 공간이 아닌 것이 되기’—초월주의는 낯선 타자와의 합일을 희구한다. 내가 아닌 것이 된다는 것은 내가 아닌 무엇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타자의 얼굴이 생겨난다. 자체로 신성한 무엇, 내가 되어야 , 혹은 가까워져야 무엇인 타자그것은 죽은 자의 영혼일 수도, 자연현상의 원리일 수도, 혹은 운명을 주재하는 절대주권일 수도 있다. 종교란 타자와 나의 관계를 새로이 하는 활동이다. 종교의식은 번에 끝나지 않는다. 나와 타자는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가만 놔두면 끊임없이 벌어지는 사이를 새롭게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유교의 제사와 기독교의 예배, 불가의 독경이나 힌두의 의식은 모두 하나의 뿌리를 공유한다.

이런 종교적 감성이 널리 퍼져있던 문화에서 세속의 권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신성한 공간들이 있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편 축제는 지금-여기를 벗어난 다른 시간을 체험하게 한다. 특히 힌두교의 홀리축제는 신화의 시간이 지상의 시간과 일치하는 때에 행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유목민족의 수렵제나 농경민족의 추수제는 어떠한가 수렵이라는, 농경이라는 행위는 인간이 주체가 되는 행위라 생각할 수도 있으나, 생태계의 순환은 인간의 너머에 있는 시간의 운행이 아닌가? 이런 신성한 공간과 시간에서 사람들은 특별한 옷을 입고, 특별한 행위를 하고, 특별한 언어를 쓰고, 특별한 음식을 먹으며 일상의 자신과는 다른 자신이 되어 타자와 가까워지려 한다. ‘엑스터시ecstacy’ 나에서 탈출하는 순간의 황홀함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나라가 이런 초월주의가 가장 만연하였던 국가였다.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최고신인 상제에게 나라의 중대사를 물었다. 후대인 나라가 상의 마지막 왕인 주왕을 비난할 썼던 주지육림이란 말은 사실 제사 음식을 가리킨다. 종교의식에서 타자를 대접하는 것은 사람들이 구할 있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인신공양 풍습은 보통의 생각과는 달리, 특히 타자의 입장에서 , 사람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겼던 사고방식을 반영한다. 제사를 마치면 타자를 대접하고 물려받은 음식은 고스란히 사람들의 몫이 된다. 하나의 음식을 공유함으로써 사람들은 타자와 가까워지려 하였다. 카톨릭 교회의 성만찬 의식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틈에 세속주의가 들어서면 타자에 대한 관심은 사그라지고 오히려 재물과 음식에 대한 욕망이 싹튼다. 추측건대 나라 말기에는 세속주의적 관심으로 인해 본말이 전도되어 왕들이 무리한 제사를 지내며 사치와 낭비를 일삼았을 것이다.

다음에 들어선 왕조는 인문주의적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제사를 중시하고 최고신인 천을 모셨다는 점에서 주는 과도기에 있다. 서주 시대가 끝나고 관학의 위치에 있던 학문이 민간으로 확산되면서 성립한 것이 제자백가이며, 가운데에서도 특히 주공의 사상과 가장 가까웠던 철학이 유가 철학이다. 공자는 인문주의적 전통을 새로이 세우고자 하였다. 대표적으로 그는 이전 시대에 왕만이 받을 있었던 천명이라는 개념을 개인적인 지평으로 확장시켰다. 초월주의의 핵심이 타자와의 합일에 있다면, 인문주의의 핵심은 내면의 발견에 있다. 공자의 천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안에 자리잡은 어떤 목소리라고 있다. 마치 소크라테스의 다이몬과 같이 목소리는 나이면서 동시에 내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초월주의적 타자가 아닌 까닭은 목소리가 나의 바깥에 있어서 여러 사람에게 동시에 해당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안에서 나만을 인도해주는 길잡이인 때문이다. 그것은 양심이라 부를 수도, 촉이라 부를 수도, 기분이라 부를 수도 있다.

귀신을 어찌해야 합니까, 제자가 물었다공경하되 멀리하라, 공자가 답했다. 여전히 공자는 초월주의의 배경에서 자라났지만, 그의 사상은 초월주의가 빠질 있는 폐해를 경고하고 있다. 타락한 초월주의는 이스라엘 민족의 율법주의로 수도, 혹은 세속주의와 결합하여 상말의 주지육림으로 수도 있다. 인문주의적 견지에서도 제사는 여전히 유용한 것이었다. <논어>에서는 백성이 화합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제사를 옹호한다. 그러나 공자가 화려한 예식보다는 검소한 마음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인문적 사상을 엿볼 있다.

인문주의가 기울 등장하는 것은 자폐적 사상과 유미주의이다. 위진 시대 죽림칠현의 사상인 현학 그러하고,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철학이 그러하며, 근대의 순수문학이 그러하다. 사회에 대한 관심과 영향력을 잃은 인문학이 도피하는 곳이다. 조선후기의 예학 역시 이와 같다. 사회 변혁과 제도 개선에 관심을 잃은 채로 예법에 대한 세세한 규정을 검토하는 것은 인문주의의 몰락을 여실히 보여준다.

타자와의 합일을 희구하는 것으로서의 종교는 세계 어디서든지 있었지만, ‘으뜸의 가르침으로서의 종교는 오직 초월주의와 인문주의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하였다. 예수는 이스라엘 율법주의의 환경에서 태어나 야훼와 인간 사이에 있던 계약을 파기하고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 내용은 오직 사랑일 뿐이었다. 석가는 브라흐마교의 고행을 중시하는 환경에서 태어나 인간의 고통을 발견하였다. 모든 것이 공하다는 , 집착을 버리라는 것은 일견 초월주의적 분위기를 내지만, 반대로 보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흘러가게 두어 내면의 고통을 해방하는 깨달은 자의 면모를 드러낸다. 그러나 모두 안에 있는 무엇, 그것이 죄의식이 되었든 고통이 되었든, 그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의욕을 보존하고 있다. 초월을 향한 가능성은 여전히 내재적인 것이다.

세속주의의 가치는 세계-내적이다. 그것은 나를 넘어선 것도 아니고, 안에 이미 갖춰진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계 안에 존재하는 것이며, 오직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들이다. , 명예, 인맥과 같은 사회권력이 모두 세속적 가치이다. 초월주의적 인간이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이고 인문주의적 인간이 내면의 가치를, 만물의 제일성을 깨달은 사람(장자)이라면, 세속주의적 인간은 노력을 통해 성취하는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의 과거제도는 세속주의와 인문주의가 결합한 산물이다. 전국시대에 활동했던 맹자는 세속의 시대에 덩그러니 남겨진 인문주의자였다. 그가 국가의 이익을 도모하던 양혜왕에게 일갈하며 말했던 어찌하여 이익을 말씀하십니까(하필왈리)’ 때엔 이미 유효성을 상실한지 오래된 사상에서 떨어진 혜성의 꼬리와 같은 것이었다. 서유럽 중세 말의 제국에게 카톨릭이 가졌던 의미는 다만 국가통치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조직 정도에 지나지 않았듯이 말이다.

인문주의가 타락하면 자폐적이 되거나 유미주의를 내세우기 쉬운데, 세속주의는 사회에 대한 시각을 틔워줄 있다. 기술과 경제에 대한 관심은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고, 법과 정치에 대한 관심은 나은 제도를 만들게 해줄 있다. 그러나 세속주의가 자신의 길을 맹신할 , 최악으로는 가치들을 숭배하게 우리는 역사에서 끊임없이 나타난 세기말 상황을 다시 재현하게 된다. 돈이 모든 가치 위에 서게 되고, 법이 기능을 잃고 오직 강자의 이익만을 보존하려 하며, 모든 인간적 관계가 경제적이거나 정치적 관계로 변질될 , 인간의 죽음이 자체로 존중 받지 못할 우리는 이미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죄가 합리화되며, 내면이 공허해진다. 로마 제국의 말기가 그러했으며, 중세의 끝이 그러했으며, 제국주의의 시대가 그러했으며,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세계가 그러하다.

과학이 시대를 지배한다. 세속주의의 타락은 과학이 자신의 영역의 문지방을 넘어서는 순간 시작되는 것일 있다. 초월주의 시대는 이상이, 인문주의 시대는 느낌이 존중 받는 시대다. 그러나 세속의 가치는 사실fact 있다. 지금 우리는 종교에 과학적 잣대를 들이대고, 내면의 표현에서 사실과 논리를 찾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실로 환원할 없는 모든 표현이 무시 받으며, 돈으로 환산할 없는 모든 문화가 사장되고 있다. 그러나 경제가, 법치가, 과학기술이 기울어진 시대를 바로잡을 있다는 믿음은 너무 순진하다. 세속의 세례를 받은 입으로 인문학을 말하는 것은 위선이다. 베스트셀러가 삶을 풍요롭게 해줄 있다는 믿음은 잘못되었다. 인간이 초월적 가치도, 내면적 가치도 없이,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사회의 여론과 대중의 목소리에 끌려 다니는 , 이것이 몰락의 징후이다.

 

§ 초월적 인문주의

역사적으로 최고의 가르침으로서의 종교가 문화권에서 성립하고 전파되면서, 초월주의와 인문주의 사이의 간격은 질적인 차이라기보다는 정도의 차이로 되는 경향을 보인다. 최초의 문명이 성립하고 발달하면서,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가져온 종교적 심성은 여전히 의례로서 남아서 행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점점 형식주의적인 경향으로 흘렀고, 종교적 문명이 군사력을 앞세운 세속적 문명에 의해 무너지면서 형식과 의례에 대한 쇄신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때에 등장하는 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계종교이다. 시대적 필요 이전에도 인간의 감정과 욕망에 대한 자각은 분명 사람들 사이에서, 특히 그들이 사용하는 일상적 언어 속에서 은은하게 지각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문주의라는 사상적 형식으로 정립되었다고 생각되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것은 초월주의의 몰락을 통해 새로운 가치의 규범으로서 부상했다. 기독교가 유대 율법주의 시대에 등장해 인간 내면의 죄성에 주목했듯이, 불교가 브라흐마교의 변두리에서 인간 삶의 고통에 주목했듯이, 유교가 춘추시대 말기에 인간다움, 의로움 등의 내면적 가치의 회복을 주장했듯이 말이다. 초월적 인문주의의 탄생이다.

초월적 인문주의는 내면적 가치의 발견과 실현을 초월적인 지점에서 근거 지웠다는 데에 특징이 있다. 기독교는 신앙을, 불교는 성불을, 유교는 천명을 근거로 삼았다. 이런 사상들은 그것이 발흥한 지역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까지 전파되고 연구되면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과장해서 말하면 우리가 말하는 철학사 모두 초월적 인문주의의 계보학이라고 말할 있을 만할 정도이다. 시대 이후에 등장한 모든 초월주의는 그것이 아무리 극단적이라 하더라도 인간 내면에 대한 관심을 결여하지 않으며, 극단적 내재주의 역시 초월적인 힘에 근거하지 않는 것이 없다. 물론 여기서 그리스 철학은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그리스 고전시대의 아테나이는 지중해 상업의 중심지로서 오히려 세속주의적인 경향이 강했다. 당대에 성행했던 소피스트들이 본래 법률가들이었다는 점에서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 때문에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각각 초월주의적이고 내재주의적인 경향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공동체의 정치와 경제, 법률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는다. 이런 사상적 경향은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 에피쿠로스 학파나 스토아 학파 소극적인초월적 인문주의를 낳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퀴레네 학파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허무주의를 낳았다. 다음 세대에, 과거 헬레니즘의 영향권과, 로마에 편입되려는 게르만 족의 지역을 통틀어서 새로운 가치 규범을 제공하기 시작한 것이 기독교였다. 이후 서양의 중세의 사상사는 기독교를 배제하고 설명할 없게 된다.

이런 탄생과 발전 과정을 거친 초월적 인문주의의 계보는, 현재의 시점에서 보았을 크게 가지로 분류해볼 있다. 사실 작업은 철학사 전체에 대한 세심한 관찰의 결론으로 내놓아야 적절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기엔 나의 역량이 아직 부족하고, 반대로 글이 그런 검토를 위한 선이해를 어느 정도 제공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지금은 비교적 간략하게 제시해보고자 한다. 첫째는 윤리규범의 근거가 현재와 대응하는 종교이다. 여기서의 종교는 초월자에 대한 숭배와 최고의 가르침이라는 측면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다. 이는 서유럽 지역에서 성행하였다. 둘째는 근거를 과거에, 정확히 말하면 지나간 시간의 모든 현재인 역사에 두는 역사주의이다. 이는 한대 동중서의 유학 이후로, 공자가 모든 사람(혹은 지식인)에게 허여하였던 천명이 다시 천자의 배타적인 몫이 이후의 중국에서 성행하였다. 사마천의 <사기>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서양인이 신을 두려워할 중국인은 역사를 두려워했다. 마지막 경향은 윤리규범의 근거를 죽음 두는, 정확히 말해 죽음에 대한 인간 내면의 본연적 태도에 두는 실존주의이다. 이런 경향은 사실 동서양 철학사를 통틀어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가지 확실히 있는 것은, 씨앗이 칸트에게서 엿보이며 그것이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를 거쳐서 사르트르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 지금과 여기

신에 대한 경외도, 역사에 대한 두려움도 없는 현대인들에게 그나마 가장 가까운 것은 실존주의라 있다. 그나마도 죽음을 경시하고 외면하는 분위기가 만연한 탓에 그것이 어떤 가치규범을 제공할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러나 글에서 내가 의욕하는 것은 세계가 다시금 초월적 인문주의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혹은 세속주의가 만연하면서 인간의 삶이 황폐화된 것을 보고 세속주의 자체를 공격하기 위함도 아니다. 오히려 나는 가지 가치의 장단점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가지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가치규범이기를 내세우는 상황을 경계하고 있다.

시대는 세속주의가 득세했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 아니라, 세속주의만이 유일한 가치규범으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각자 서로 다른 심성과 감수성을 갖고 살아가기 때문에, 마치 몸에 맞는 옷을 입어야 편한 것처럼 자신만의 고유한 윤리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세속에서의 성공을 희구하는 사람에게 실존주의를 강요한다면 그는 일단 그것에 공감하지 못할 것일뿐더러, 나아가 죽음의 절대적인 허무함 앞에서 모든 의욕을 잃고 방탕함을 일삼을 수도 있다. 반대로 내면의 쇄신에 지대한 관심을 쏟는 사람에게 부와 명예와 인맥이 주는 달콤함을 이야기해봤자 그는 그것에 관심을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나아가 세속에서 도망하여 살아갈 있다. 사회는 사회대로 인재 잃는 손실을 감수하고, 그는 그대로 사회에서 누릴 있는 최소한의 기쁨도 포기하게 된다.

문제는 아직 자신의 가치규범을 분명히 자각하지 못한 어린 아이에게 이런 억압이 가해졌을 때이다. 나는 어렸을 내가 좋아하는 반찬만 골라먹거나 급식을 남기기라도 하면 , 그래서는 사회생활을 없다느니, 군대에서는 그런 것은 용서받지 못한다느니 하는 말을 들었다. 윗사람에 대한 예의를 잊거나 모르고 어겼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들은 한편으로는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데에 최소한의 선을 만들어주기도 하였지만, 도리어 나를 끊임없이 비난하고 압박하는 목소리가 되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사람을 대할 , 과도한 예절을 베풀거나 혹은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옳은지를 갈등하며 살을 깎아먹는 사람이 되었다. 특히 과거에 부모님이나 할머니에게서 특정 프로토콜을 습득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이 옳은지 혹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것이 옳은지 몰라서 힘들다. 그러면 사람을 마음 마음으로, 다시 말해 진심으로 대하기가 어려워진다. 물론 성장과정에 영향을 어느 누구에게도 잘못이나 책임은 없고 심지어 자신에게도 잘못은 없지만, 잘못된 상황은 고스란히 나의 몫이 되었다.

사회적으로도 문제다. 어떤 일을 시작하면서 돈보다는 경험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마음 먹는 것은 인문주의자의 훌륭한 동기부여일 있으나, 그것이 기득권자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세속주의자의 위선으로 변질된다. 신을 경배하는 성전을 짓기 위해 기꺼이 부를 기부하는 것은 종교인의 경건한 마음가짐일 있으나, 그것이 에쿠스를 모는 목사님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그것은 세속주의자의 훌륭한 위선으로 변질된다. 타인의 가치규범마저도 착취하여 위선으로 변질시키는 세상이다.

첨언하자면, 이것이 일반화를 향한 야만적인 의지라는 정신적 제국주의의 결과임은 자명하다. 이것은 현대 대한민국에서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는 근대의 폐습이다. 모든 인간적 관계를 경제적으로, 권력관계로 환원하며, 과학으로 밝혀지지 않은 모든 것을 무가치하다고 치부한다. 무엇이든 알지 못하는 사람은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고 강요 받는다. 수치화된 자료가 없으면 어떤 주장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모든 정신세계가 멸시 받고 무너지며, 오직 하나의 차갑고 딱딱한 현실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천재는 없어지고 정신병자만 남았다. 사회에서 젊음은 죄이다.

 

§ 아집

그러니 내가 있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가치규범을 세우는 것이며, 그것이 명이라도 좋으니 다른 사람의 공감을 받을 있기를 바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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