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학년도 겨울, 종교개혁사

 

종교개혁 이후의 이야기

-서유럽 근대 사상의 계보들-

 

I. 들어가며: 서유럽 사상의 흐름과

무언가를 이해하는 일과 수용하는 일은 사뭇 다른 일인 것 같다. 나는 서양인의 소설과 시와 철학을 읽고 그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지만 과연 그것이 나에게 꼭 맞는 것인지에 대해선 항상 회의를 품었다. 그것은 종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마음속에 신전을 모시고 있더라도 그것이 꼭 예수 그리스도의 것일 필요는 없다. 나는 그것이 서양인의 정신사를 이루고 있는 사상과 인간의 계보에서 나의 자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들의 사상이 세계를 지배하고 일상 여기저기에 뿌리 내리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스스로를 찾아가고 굳게 서 있는 것에 대해 늘 불안하고 불편하다. 서양의 사상을 극복하는 일은 내게는 민족적 사명 같은 것이 아니라 내 실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의 관심은 서구의 사고방식을 읽고 이해하는 일에 뒤따라 항상 그것을 비판하고 극복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사실 수업 시간에도 서유럽의 발전이나 동양의 패배 등의 관념에 대해서 항상 불편함을 느꼈다. 그러나 어떤 사상에 대한 가장 좋은 비판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그것이 나온 토양에 그것을 다시 위치시킴으로써 보편성이라는 환상을 제거하는 일이다. 수업에서 기독교를 다룰 때에도 이런 방법이 돋보였다. 나는 내 나름대로 종교개혁 이후의 유럽을 조망해보고 싶다.

 

II. 각자의 자리: 종교개혁 이후의 서유럽 사유

중세 말과 근대 초에 걸쳐 있던 종교개혁의 시기를 끝낸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은 오스트리아로 축소되고, 영국과 프랑스가 또 다른 패권으로 부상한다. 여기서 기독교를 둘러싼 역사는 또 다른 분기점을 맞게 된다. 첫째로 두드러지는 점은, 종교가 사상을 포함했던 중세와는 달리 근대의 사상은 종교의 외피를 벗고자 했으며, 나중에는 사상이 종교를 포함하는 모양새를 띠게 된다는 점이다. 둘째로, 기독교 바깥의 사유가 서유럽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그것이 나중에는 과학의 이름으로 기독교를 적대시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그들의 적과 하나의 뿌리를 공유한다.

가장 먼저 부상하였던 것은 루터, 칼뱅 등의 종교개혁 세력이었다. 외에 데카르트-스피노자로 이어지는 또 다른 흐름이 등장하며, 한편 부르봉 왕조의 절대왕정 하에서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는 유물론적 경향이 계몽주의와 함께 부상했다.

 

1. 아리스토텔레스-아퀴나스 전통과 스피노자

먼저 데카르트(1596-1650)는 연금술과 신학을 포함하여 그가 프랑스에서 배운 모든 것을 회의하면서 네덜란드로 간다. 그에게 신은 분노의 신도, 사랑의 신도 아니고 다만 물질과 정신으로 나눠진 인간을 매순간 새롭게 창조하여 조화롭게 만드는 근거로서의 신이었다. 스페인에서 네덜란드로 건너온 유대인 상인의 아들인 스피노자(1632-1677)는 데카르트주의의 수정을 내세웠다. 그에 이르러서는 신과 세계가 하나가 된다.

그는 데카르트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도 아퀴나스가 제시한 바, 최고 완전성으로서 또 최종 근거로서의 신의 개념을 계승한다. 그러나 그의 철학에서 핵심적인 것은 바로 내재성이라는 개념이다. 아퀴나스의 신학 속에서 우리가 신을 알기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낮추고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보기 위해 지성을 갈고 닦아야 한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 신을 안다는 것은 우리의 내면의 욕망과 감정을 긍정하고, 동시에 내면과 세계를 직관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신과 인간이 분리되어 있던 구약시대, 한 명의 인간이 신이 된 신약시대를 넘어서 모든 존재자는 신의 양태mode이며, 거꾸로 모든 존재자가 하나의 신이라는 생각으로 나아간 것이다. 정치적으로 말해, 그에게는 교황이 필요 없다. 이는 칼뱅주의를 수용했던 네덜란드의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결론이다.

한편 그는 종교개혁 시기에도 여전히 신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던 라는 장벽을 허물고, ‘구원을 기쁨과 사랑으로 바꾸어 놓았다. 대개 죄의식의 근원은 자신의 내면의 감정과 욕동 때문인 반면, 스피노자는 오히려 그것을 긍정함으로써 신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신에 대한 사랑만이 가장 고귀하고 드문 것이라고 말한다. 바꿔 말하면, 자신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 경계를 넘어 인류와 모든 존재자에 대한 사랑이 신에게 다가가는 길인 것이다. 스피노자의 신은 죽지 않는 나르키소스이다. 신과 인간이 분리된 상태에서 신에 대한 사랑은 다른 인간 집단에 대한 적대로 이어질 수 있다. 영화 <Kingdom of Heaven>에서 기독교 진영과 이슬람 진영이 서로 신이 이것을 원하신다하며 싸우던 장면이 연상된다. 어쩌면 그의 철학은 예수의 대속 이후에 자연스럽게 따라 나와야 할 것이 뒤늦게 도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스피노자의 신-철학은 이데아가 이미 개별자 안에 내재해 있음을 주장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에 서 있다. 그럼에도 같은 전통 안에 있던 아퀴나스의 신학과는 달리 그의 철학이 교황청에 의해 이단으로 간주되었던 까닭은 다음에 있다. 아퀴나스의 신학은 초월적 신에 대한 지성적 앎을 강조한다. 그런데 인간은 모두 같은 정도의 지성적 능력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신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과 덜 아는 사람이 나누어지고, 이것은 카톨릭의 단계적 성직 제도를 정당화할 수 있다. 반면, 스피노자는 내재적 신에 대한 직관적 앎을 강조한다. 직관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교황청이 스피노자를 파문한 것은 정치적인 이유가 크다 하겠다.

요컨대 스피노자의 철학은 칼뱅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아퀴나스 전통의 결합의 산물이다. 그런데 후세에 미친 그 영향력은 크지 않다. 18세기 들어 상업의 중심지가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옮겨간 까닭에 네덜란드의 국제적 영향력이 적어진 것을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더 큰 요소는 그의 철학적 정서가 주변국,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정서와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둘은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했는데, 왕의 권위는 평등주의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

한편 독일의 라이프니츠, 그리고 헤겔이 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후에 유물론의 뒤를 이은 기계론이 유럽을 지배할 때, 생명의 내재적 에너지와 자발적인 창조적 진화를 앞세운 베르그손(1859-1941)이 등장하여 이 전통을 계승했다.

 

2. ‘퓌지카전통과 경험주의, 프랑스 유물론

디드로와 달랑베르를 위시한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은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을 공격하며, 인간에게서 정신을 말하는 것은 또다시신을 인간의 주재자로 끌어들이는 꼴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주권을 말하기 위해 신을 부정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공동 작업을 했던 1751-80년은 부르봉 왕조의 절대왕정이 극에 치닫고 있던 시기와 일치한다. 루이 14세 때 낭트 칙령이 폐기되면서 당대 프랑스에는 카톨릭을 내세운 중앙집권 체제에 저항하는 개신교도들이 거의 청소당하고 없었다. 또한 전통적으로 로마 교황과 게르만 황제가 서로 명분과 세력을 앞세워 자신이 고대 로마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던 구도에서 프랑스는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절대왕정에 대한 반대 세력이 반-카톨릭을 넘어 신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 네덜란드의 공기에서 신은 비인격적인, 세계 자체로서의 존재자였던 반면, 프랑스인에게 신은 곧 그들의 왕을 연상케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이들의 사고방식에 하나의 흐름을 더한 것은 이전 시기 영국에서 일어난 지적 발전이 아닐까 생각한다. 애초에 영국인들이 프랑스에 약 100년 정도 앞서 그들의 왕을 처형한 경험이 있을 뿐 아니라, 백년전쟁(1337-1453) 이후 두 나라가 독립적인 노선을 취했다고 해도 서로를 경쟁자로 인식하면서 문화적 교류를 끊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서로 로마제국의 정통을 내세우는 가운데 프랑스가 그 구도에 포함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1300년대에 교황을 아비뇽에 가두는 등 아예 손을 놓고 있던 것은 아니다. 반면, 영국은 특히 프랑스에 있던 영토를 상실한 백년전쟁 이후에는 이런 정통성 구도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런 영국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영국에서는 일찍이 경험주의적 전통이 생겨났다. 베이컨(1561-1626)은 자신의 편견을 경계하며, 인간이라는 종의 눈도 의심하며, 말에 속지 말며, 권위를 맹종하지 말라고 우상의 비유를 들어 경고했다. 그의 주장은 이후 흄(1711-1776)에 이르는 영국 경험론의 기초를 닦았다. 한편 이는 우회적으로 성서가 아닌 전통과 권위에 의존하는 카톨릭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도 있다. 나아가 뉴턴(1642-1727)의 만유인력 법칙은 우주에 중심은 없으며, 어디든 질량이 있는 곳이라면 중심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비록 뉴턴 자신은 과학주의를 내세우거나 철저한 경험주의를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그 파급력은 서유럽 전역에 미쳤다. 뉴턴의 역학은 사실 이론 물리학으로서, 측정보다는 계산을 중시했다. 그런데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활동하던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연금술에서 화학으로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었다. 화학은 경험적 측정으로부터 이론으로 나아가는 전형적인 경험과학이다. 이런 경향 속에서 칸트 철학의 뒷받침을 받은 뉴턴의 물리학이 적극적인 과학주의로 수용되었다. 이것이 앞서 언급한 당대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프랑스에 유물론적 경향을 확산시키는 데에 일조했을 것이다.

앞서 네덜란드의 스피노자주의가 큰 사회적 파급력 없이 계승된 것과 달리 프랑스 유물론은 1789년에서 1848년에 이르는 혁명의 시대를 이끌어가기에 적합했다. 한편 유물론자들은 혁명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주의(코뮌주의commune-isme)를 구상했다. 한 세대 후의 유물론자인 마르크스가 비판했던 생-시몽(1760-1825)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처음에 기독교 비판을 들고 나왔던 유물론이 이상사회를 그려가는 데에 있어서는 기독교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몽은 아예 기독교적 형제애와 산업사회의 조직이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 평등, 형제애 역시 종교개혁 시기에 등장한 그리스도인의 자유, 신 앞의 평등, 그리고 평등을 바탕으로 한 인류애인 형제애를 번안한 것으로 보인다.

 

3. 플라톤주의-아우구스티누스 전통과 루터, 하이데거

한편 루터와 칼뱅은 인간을 결여된 존재, 죄인의 영혼으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플라톤주의-아우구스티누스 전통 안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전통은 마치 해저의 흐름과 같이 평소에는 잠재해 있다가 역사적 전환기가 오면 물의 흐름을 바꿔놓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대 아테네에서 플라톤이 그랬듯, 로마 말기의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랬듯, 중세 말기에 루터가 등장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는 인간의 내면을 바라보았으며, 그 안에서 죄의 가능성을 보고 신에 대한 전적인 의탁을 말하였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죄와 악이 다만 의 결여라고 보았는데, 루터는 여기서 나아가 그 결여가 인간의 행위로 인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 채워질 수 있다고 보았다.

루터가 발견한 근대적 자아는 라이프니츠(1646-1716)를 거쳐 칸트(1724-1804)의 자아 철학으로 이어졌다.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의 신--세계를 모나드라는 하나의 자아 안에 압축시켜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서로 소통하지 않는 모나드 간의 조화를 주재하는 신을 또 놓았다. 칸트는 신이 없으면 인간의 도덕적 실천이 불가능하다고 보았으며, 여기에 더해 영혼의 불멸이라는 플라톤적 개념을 요청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앎의 영역과 실천의 영역을 날카롭게 나누었다는 점이다. 그는 라이프니츠의 자페적 철학과, 흄의 경험론과 뉴턴의 물리학을 결합시켰다. 칸트는 과학주의를 인식론적으로 정당화하는 한편 실천의 영역에서는 과학주의를 거부했다.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 행위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칙이 되게 하라는 그의 정언명령은 근대의 십계명이다. 한편 그가 죽음 이후의 심판을, 그리고 심판을 주재하는 신을 요청한 까닭은 정언명령만을 가지고는 인간의 끊임없는 도덕적 타락을 막을 수 없다는 루터적인 깨달음이 담겨 있다.

이는 후에 후설(1859-1938)의 현상학으로 이어지기는 한편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그 적통은 덴마크의 키에르케고르(1813-1855)의 실존주의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 성직자의 매개를 거부하였던 루터의 정신이 신 앞에 선 단독자라는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는 아브라함이 기독교 신앙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그의 신앙의 양상에서 찾는다. 늦게 얻은 아들 이삭을 번제 제물로 바치라는 신의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한 음성을 듣고 아브라함은 그것이 보편적 윤리와 대립하는 것을 느낀다. 그 대립에서 비롯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그 명령을 이해하려는 의지를 갖지 않고 다만 신에 대한 절대복종으로 결단하여 복을 받았다. 인간의 법은 인간의 법일 뿐, 개별적인 현존재에게 내려오는 신의 음성이 그것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20세기 말에 이 전통은 유물론으로부터 이어진 과학주의, 기계론과 맞서 인간성을 부르짖은 하이데거(1889-1976)의 실존주의로 거듭난다. 하이데거는 키에르케고르의 신을 내면의 목소리로 가져온다. 그것은 나의 존재 자체이며, 군집 속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안을 잊고 안주하는 중성적인 대중(das Mann) 속으로 스며들어가고 현실에 타협하고 싶은 욕구에 맞서 나 자신으로 곧게 서라라고 외치는 목소리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이 신의 부조리한 음성 앞에서 두려워할 때, 하이데거의 실존은 죽음이라는 절벽에 서서 자신의 본래적 목소리를 듣는다. 오필리아의 묘지 앞에서 덴마크의 왕 햄릿(Hamlet the Dane)’이 되기를 결단한 햄릿처럼 말이다.

이 전통이 루터에서 하이데거로 오면서 가진 특징은 처음의 인간의 윤리적 결여가 키에르케고르에서는 동시에 존재적 결여이다가, 하이데거에 와서는 완전이 존재적 결여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루터는 인간의 윤리적 구원은 오직 믿음을 통해 가능하다 보았고,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적 구원은 오직 죽음 앞에 서서 본래의 자신을 회복할 때 가능하다 보았다. 그의 사상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알베르 까뮈(1913-1960), 장 폴 사르트르(1905-1980)로 이어져 세계를 흔들었다.

 

III. 나아가며: 순환하지 않는 순환

고뇌하는 인간, 스스로에게 부과한 양심이라는 짐에 허덕이는 인간, 죄책감과 우울과 죽음의 유혹으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하는 인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사람들을 멜랑콜리커라고 불렀다. 그는 창조적인 분야의 뛰어난 인물들 가운데 이들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인간상은 비록 주류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변화의 분기마다 등장하여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 헬레니즘 시대에 유행하던 쾌락주의에 반대했으며, 루터의 경우 중세제국이념과, 하이데거는 테크놀로지를 앞세워 인간성을 파괴했던 근대적 기계론과 맞섰다. 이렇게 보면 1517-1648년의 종교개혁은 직선적인 진보의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순환하지 않는 순환의 일부인지도 모르겠다.

비록 이들이 서유럽 사회의 주류는 아닐지라도 이들이 가진 정서, 특히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서유럽 문명에 넓게 퍼져 있는 것 같다. 이것이 예수에서 아우구스티누스로, 루터로 이어지는 하나의 전통을 만들었고, 다시 루터에서 하이데거로 이어지는 새로운 전통으로 이어졌다. 근대 철학의 완성자라 불리는 헤겔(1770-1831)은 독일 이상주의라는 루터적 전통과 스피노자를 결합했으며, 마르크스(1818-1883)는 여기에 프랑스 유물론을 결합하여 세계를 뒤흔든 강력한 혁명이론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그의 철학에는 여전히 형제애에 기반을 둔 인류애와 예술에 대한 흠모(예술은 플라톤적 전통에서 중요한 주제이다), 자유로운 인간성의 회복을 향한 강한 열망이 있다. 이 주제는 교회가 지배하던 서유럽 중세에서도 꾸준히 반복된 것들이다.

그럼에도 미국을 포함한 서유럽 문명은 자본주의의 폭주를 막지 못했고, 제국주의 운동을 통해 강제로 세계화가 이루어진 현대에 들어서는 그 모순이 가난한 국가에 집중되고 있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어두운 그림자가 처음에는 프랑스로, 다음은 독일로, 그 다음은 러시아로 향하면서 대폭발을 일으켰듯이 말이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것을 두고 죽음의 문화라 말한 바 있다. 현대의 천박한 자본주의는 서유럽 문명의 피할 수 없는 어두운 면이다. 그것은 사상사적으로 보면, 각 시대의 영웅들이 죽음을 끌어들여 삶을 정당화하고 긍정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이 힘을 잃을 때쯤, 생명의 힘 옆에 환관처럼 비켜서 있던 죽음이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예수가 버림받은 자들, 약자들을 향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설하였을 때, 그 말씀은 곧 압제자의 칼날에 깃들었다. 서유럽 사람들이 발달된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죽음을 버리고 삶을 취할 때, 그들이 버린 죽음은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를 향해 날아간다.

그리고 바로 지금, 여기의 우리들이 그 죽음의 문화의 한복판에서 고통 받고 있다. 150여 년 전,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마태복음 구절을 인용하며,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진혼곡을 지었던 브람스의 음악이 하나의 예언처럼, 위로처럼 들린다. 이 수업을 통해 나는 내가 서유럽의 고대와 근대에 대해 따로따로 알고 있던 것들에 중세의 이야기를 더하면서 그것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낼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이렇게 그들의 사상을 역사 속에 위치시켜 놓고 보니, 과연 그들의 사상 속에서 지금-여기의 문제를 극복할 완전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까 회의가 든다. 서양 문명의 옷을 입었어도 우리는 여전히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브람스의 진혼곡이 끝나갈 즈음이 되어서도 이 의문은 여전히 남아 앞으로의 숙제가 될 것이다.


***

보고서 주제는 "서구 기독교 역사에 대한 자신의 해석"이었다.


Leave a Comment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