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학년도 가을, 인식론Epistemology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 2장에 드러난 은유의 문제

 

1. 도전과 응전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뉴턴 가버·이승종, 1994, 이승종·조성우 역, 2010, 동연)2장인 "구조와 은유" 장에서 저자들은 은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를 인용하면서, 은유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를 다루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 은유는 한 사물에 다른 사물의 이름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어떤 규칙을 어기고있으며, 따라서 논리적으로 볼 때 그것은 거짓된 문장을 구성한다(34-35).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두 번째 통찰에 따르면, 은유는 무능력이나 실수, 기만이 아닌 천재성의 소산이다(35). 저자들은 이 두 가지가 어떻게 함께 설명될 수 있을 것인지 질문한다.

우리가 흔히 받아들이고 있는 소박한 실재론naïve realism에서는 우리가 경험하는 사실의 세계만을 인정한다. 여기서 은유와 같이 사실의 연관에 위반되는 명제들은 모두 거짓이 된다. 그러나 이 거짓 명제 가운데에서 우리에게 여전히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들이 있다. 이에 대해 저자들은 우리의 세계 안에 의미의 기준과 진리의 기준이 있으며, 그 각각을 규칙과 사실이라고 부른다(42).

그러나 여전히, 여러 가지의 규칙이 하나의 의미를 결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규칙을 말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43). 여기서 저자들이 말하는 규칙은 기하학에서 도형을 수많은 방식으로 정의하는 것처럼, 하나의 의미에 관여하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규칙인 것 같다. 뒤에서 저자들은 우리가 느끼는 가장 소박한 경험적 사실, 즉 의미를 규정하는 규칙이 세계 내의 관습과 제도 안에서 성립되는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후자의 규칙은 경험적이고 어떤 관습체계 내에서 고유한singular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구조주의가 등장한다. 구조주의는 의미의 체계를 차이가 지배하는 부정적 실재성negative reality으로, 진리의 체계를 사실이 지배하는 긍정적 실재성positive reality으로 구분한다(53). 이런 설명의 강점은, 구조 안의 차이의 고유성을 인정함으로써 우리의 관습과 제도를 이론에 담으면서 동시에 구조와 경험적 사실의 분리를 통해 유의미한 거짓 명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61-62쪽에 등장하는 것과 같이 동일한 음소구성, 동일한 낱말로 이루어져 있지만 경우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른 말에 대해 구조주의는 해결책을 제시하기 어렵다.

저자들은 이런 은유의 도전을 회피하거나 부정하는 몇 가지 방식들을 소개한 뒤, 이 도전에 정면으로 응전하는 길을 선택한다. , 언어가 갖는 의미의 다섯 가지 다른 측면을 고려함으로써 은유를 둘러싼 기존의 혼란된 문제들을 정연하게 분류하면서 은유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을 제시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첫째 문법적 측면은 낱말의 형식이 문장 구조 내에서 갖는 위치에 주목하며, 둘째 정의적 측면은 낱말의 쓰임이 관습 내에서 갖는 위치에 주목한다. 셋째 지시적 측면은 실재론적 발상의 결과로 보이는데, 이는 구조주의가 간과했던 점, 즉 어떤 의미는 부정적 실재성을 참고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통찰을 포괄하고 있다. 넷째 범주적 측면은 은유를 구성하는 주어와 술어 사이의 적절한 대응adequate respondence이 유의미성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입장이다. 마지막 상황적 측면은 하나의 발화를 둘러싼 상황이 유의미성 판단의 장field을 여는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74-79).

이런 통찰은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 다섯 가지 기준을 통해 저자들은 은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음소, 낱말, 문장 등을 아우르는 여러 층위를 함께 고려해야 하며, 은유의 진리값을 결정하는 내부적 요인과 외부적 요인 역시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나아가 저자들은 은유가 텍스트일 뿐 아니라 제스처라고 지적하며(83), 은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말을 넘어선 것, 즉 사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은유를 둘러싼 전통적인 논의들은 사실상 사람의 체취를 배제한 차가운 담론에 불과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저자들은 이에 대해 그간 언어와 유리되었던 삶의 지위를 복권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논리 철학 논고>에 드러난 비트겐슈타인의 태도와도 일치한다. 은유를 삶과 분리된 과학Wissenschaft’의 문제로 다루는 것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해결되건 간에 삶의 문제에 전혀 대답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논고>, 6.52).

 

2. 원거리 사수

나는 이 논의가 시작되었던 최초의 지점으로 돌아가 보고 싶다. 왜냐하면 저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정의했던 은유는 한 사물에 다른 사물의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었던 반면, 논의가 진행되면서 언급된 은유의 사례는 이 정의에 완전히 포섭되지는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는 제유 혹은 환유를 설명하기에 적합하다.

첫 번째 인용구에서 나는 사물의 이름을 옮기는 것 자체보다는 그 이름들 사이의 연관에 주목했다. 은유는 일차적으로 서로 다른 것 사이의 연관이다. “시인은 펭귄이다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일단 시인과 펭귄 사이의 연관을 가능하게 하는 그 무엇을 먼저 찾으려 한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가 은유를 언급하는 두 번째 인용구에서 천재성을 언급하는 것은 흥미롭다. 이에 대한 실마리는 "수면 속의 예언On Prophecy in Sleep"이라는 짧은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멜랑콜리커들은 격렬성으로 인해 원거리 사수처럼 정확하게 활을 쏜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에 급변할 수 있는 그들의 태도로 인해 그들 앞에는 연속해서 그 다음 이미지가 급속도로 다가온다.[각주:1]

 

여기서 멜랑콜리커란, 서양 고대의 4체액설 가운데 검은 담즙의 성향이 뚜렷한 사람들 일컫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 정치, , 예술 등 창작을 하는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들이 하나같이 멜랑콜리커라는 사실에 주목하기도 하였다.[각주:2] 어쨌든 주목할 만한 것은, 뛰어난 창조성을 증명하는 천재적 은유가 탄생하는 과정이 마치 원거리 사수가 멀리 떨어진 과녁을 정확하게 맞히는 것과 유사하다는 그의 통찰이다.

주목할 것은 원거리정확함이다. 은유는 겉보기에 서로 유사해 보이지 않는 사물들을 엮어내어 의미를 창출한다. 그러나 사수가 쏜 모든 화살이 과녁에 명중하지 않듯,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과녁을 빗겨간 은유도 있을 수 있다. 예컨대 피자는 빈대떡이다라는 식의 비유는 그 둘 사이의 유사성을 쉽게 찾을 수 있기에 비교적 안정적인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지는 못한다. 반면 시인은 펭귄이다라는 말은 조금 더 위험을 감수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은유의 이러한 성공실패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마치 과녁이 10점부터 2점까지의 스펙트럼으로 구성되어 있듯이, 어떤 은유는 유의미하지만 다른 은유보다는 못한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다. 죽은 은유, 혹은 닳은 은유들이 그렇다. 예컨대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는 말은 연장extension을 갖지 않는 기분이라는 개념을 날아갈 수 있는 무엇에 빗댄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예컨대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기형도, "오래된 서적")” 같은 종류의 시구를 보았을 때 느끼는 감탄을 똑같이 느끼지는 않는다. 혹은, “내 마음은 호수요,/그대 노저어 오오,(김동명, "내 마음은")”라는 시구는 잔잔한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그 강렬함은 낯선 훌륭한 은유를 접했을 때만 못하다. 요컨대 은유의 유의미함과 무의미함은 본질적 차이가 아니다.

 

3. 사유의 모험

한 번 더, 연관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이름과 이름이 만날 때, 실제로 우리 머릿속에서는 무엇이 만나는가?이미지. 자신 이외의 다른 것에 의해 정의define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 형태가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개념과는 달리, 이미지는 서로 구별되지만distinct 그 자체는 여전히 모호obscure하다. 개념이 원circle이라면, 이미지는 엷은 구름 뒤에서 자신을 은밀히 내비치는 보름달이다. 이미지는 느낌이다. 브람스의 음악을 들을 때에 느껴지는 견고함과 장중함은 다시 얼마든지 다른 말을 써서 표현될 수 있지만, 그 어느 것도 결코 나의 근원적 느낌original feeling을 완전히 표현해 낼 수는 없다.

이미지는 단신으로 만나지 않는다. 이미지는 늘 자신의 주변에 가까운 다른 이미지들을 몰고 다닌다. 그래서 확장된 은유extended metaphor가 가능해진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러니 호수에 배를 띄우듯이 그대는 내 마음에 노저어오시오, 한다. 확장된 은유는 진부한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우리 일상의 위트나 지적인 농담들은 대개 닳고 닳은 은유를 기우고 덧대서 새 생명을 준 경우가 많다.

개념 사이에 난 길을 규칙이라 한다면, 이미지의 길은 질서이다. 전자가 식물세포와 같이 단단한 벽을 삼투해야만 겨우 지나다닐 수 있다면, 후자는 동물세포와 같아서 세포 자체가 움직여 다른 이미지에 다다를 수 있다. 하지만 질서는 관습과 제도의 한계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호수에서 뱃전에 다다르기는 쉽지만, ‘마음에 이르기는 어렵다. 은유metaphor는 질서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 넘나드는meta- 운동phora이다. 이미지의 자유연상을 통해 반성해보면, 머릿속에서는 외면상 비슷한 이미지들이 서로 가깝게 붙어있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원거리 사수의 은유는 산 넘고 물 건너 나의 반쪽을 찾으려는 사유의 모험이고, 그리하여 맺어진 유의미한 은유는 다른 은유에 비해 탁월한 것이 된다.

이렇게 이름들이 제 각기 자신의 질서를 이끌고 만나면, 그곳에 하나의 세계가 탄생한다. (앞선 자연주의의 세계를 자연세계라고 부름으로써 대별할 수 있겠다.) 옥타비오 파스가 훌륭한 예를 들고 있듯이, ‘태양과 만나 이 되며, 다시 태양은 빛나는 음식이 된다.[각주:3] 이것은 의 질서와 태양의 질서 각각 혹은 그것의 단순한 합으로는 나타나지 않는 새로운 의미의 출현emergence이다. 이렇게 질서와 질서는 서로 융합되고 보완하기도 하지만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예컨대 삶은 불치의 병이다라고 해보자. 이때, ‘이 갖고 있는 생명의 이미지와 이 가진 죽음의 이미지가 상충한다. 만약 후자가 강하다면 이 은유는 염세적인 말로 읽힐 수 있지만, 전자가 강하다면, 삶은 스캔들과 같고 고통으로 찼지만 오히려 그 고통 때문에 아름다워지는 그 무엇(폐병 때문에 아름다워진 서시처럼)이 될 것이다.

 

4. 하늘과 바다 사이

은유가 멀리 떨어진 이미지의 결합으로 유동적인 유의미성을 갖고,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다면, 이때 그 진리값은 어떻게 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본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우리 시대의 지배적 견해는 자연주의이다. 즉 의미는 자연 세계라는 단 하나의 세계의 일부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의미의 기준과 참의 기준을 모두 찾아야 한다는 것(42, 강조는 원문)

 

지금까지의 나의 논의와 자연주의의 강령doctrine이 모순됨을 나는 느끼지 못한다. 여전히 은유의 세계는 자연이라는 큰 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때, 은유의 세계가 둘 이상의 원소로 이루어진 집합이라면, 자연세계는 그것의 멱집합power set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제 자연세계는 은유의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 그리고 이 세계들이 서로 마주치고 충돌하고 또 결합하는 장으로서 존재하고 기능하게 될 것이다.

물론 수정의 여지는 있다. 저 강령에서 의미는 자연세계라는 집합에 속한 원소로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의미의 의미론적, 진리적 근거가 자연세계에서 직접 찾아져야 한다. 전자의 문제는 다음 절에서 다루기로 하고 후자에 집중해 보자. 의미의 진리성의 근거가 자연세계에서 찾아져야 한다면, 두 가지 대안이 가능하다. , 하나는 각각의 의미가 자연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그것을 결정하는 구조주의적 방법이다. 이는 2은유의 도전절에서 그 난점을 드러냈다. 다른 하나는 각각의 의미가 자연세계에 직접 대응하는 것인데, 이런 소박한 실재론 역시 거짓 명제의 도전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이 두 문제는 의미를 은유의 세계에 속한 것으로 볼 때 해결될 수 있다. 은유는 자연세계에 다리를 내린 공중의 성이다.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 은유와 그 결합된 이미지에서 뻗어나간 다른 가지들의 체계 안에서 새로운 은유는 그 결합의 적합성을 판단 받을 수 있다(의미의 범주적 측면). 이는 은유의 세계 안에서 은유들이, 혹은 언명들이 갖는 부정적 실재성과 긍정적 실재성 모두를 고려해야 한다.

61-62쪽 장면 1에서 커밍스는 시인은 펭귄이다라고 말하면서 그 증거로 펭귄의 날개는 날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영을 하기 위해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 은유의 세계 안에서 이 증거는 실재 세계에 직접 손을 뻗는 것이라기보다는 은유의 확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때 시인 : 펭귄 = ? : 날개라는 관계가 성립한다. 이를 성립하게 하는 것은 구조이다. 한편 ‘?’의 정체는 날개가 가진 실재적 특성을 참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펭귄의 날개는 하늘을 날 수 없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시인은 자유로운 상상력을 통해 날 수 있는 에 비유되어 이해되었다(이 세계가 선별적으로 취한 기존의 관습). 이 관계를 통해 우리는 시인과 펭귄의 관계가 ‘?’날개의 관계에 대응되는 것이 적법하다는 사실을 이끌어낼 수 있다. , 이 세계 안에서 시인은 펭귄이다라는 언명은 참이다.

 

5. 너의 의미

어쩌면 장면 1에 제시된 은유의 세계를 만들어낸 최초의 이미지를 추측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펭귄의 날개에 대응하는 시인의 ‘?’를 통해 말할 수 있겠다. , 장면 1을 만들어낸 근원적 은유는 시인은 (더 이상) 날 수 없다.”에 가깝지 않을까? 그것의 표현 방식이 어찌되었든, 우리는 이와 비슷한 이미지로부터 커밍스의 파격적인 주장(!)이 성립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언명의 진리성 혹은 의미는 어떻게 결정되는 것인가? 세계를 보는 눈은 세계 바깥에 있다. 따라서 세계 내의 논리로는 그 관점 자체를 정당화할 수 없다. 그것은 결과를 들어 원인을 설명하려는 오류이다.

분명 그것은 세계 내의 논리로는 파악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그 발화자(혹은 발상자)인 커밍스 자신이 처했던 상황이나 그의 사상의 맥락을 이해함으로써 그것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 하나의 은유의 세계를 가능하게 만든 근원적 이미지는 자연세계에서 그 근거와 의미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점이다. 이는 앞서 제시한 집합의 비유와도 얼추 맞아 보인다. 은유의 세계가 집합이라면, 자연세계는 멱집합이다. 멱집합에서는 본래 집합의 원소들을 아무리 조합해도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 하나 드러난다. , 공집합ø이다.[각주:4]

비유를 조금 더 밀고 나가면, 오직 자연세계만을 염두에 둘 때, 의미의 의미근거가 찾아질 수 없는 이유는 ZFC 공리계의 두 번째 공리인 정칙 공리axiom of regularity[각주:5], 즉 자기 자신을 원소로 갖는 집합은 존재할 수 없다는 원리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다. 의미의 의미근거 역시 공집합에 호소해야 하는 것이다.

공집합은 그러나 어떠한 신비적인, 혹은 자연세계에 외적인 존재자가 아니다. 앞서 커밍스의 예에서 살펴보았듯, 또한 이 책 2장의 뒷부분에서 제시되고 있듯, 그것은 사람이다. 은유의 세계에 속하거나 그 세계 자체가 아니면서 그것의 의미를 가능하게 하는 무엇은 바로 사람인 것이다. 사람에 대한 고려 없이 은유의 세계는 주인 없이 하늘을 떠다니는 헬륨 풍선과 다르지 않게 된다. 한 번 보고 예쁘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서 어떤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이제 은유의 문제는 해석학의 문제로 이어진다. 물론 이때의 해석학은 딜타이 이후의 삶의 해석학이다. 삶의 체험과 표현의 이해를 중심 문제의식으로 삼는 이 해석학은 은유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딜타이 해석학이 갖는 객관주의적인 분위기를 떨쳐내기 위해 다음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 첫째는 이해의 대상이 되는 것은 나와 관련 없는 제 3자인 그 누군가가 아니라, 내가 지대한 관심을 쏟는 내 앞에 선 여야 한다는 점이다. 이때 은유는 의 세계의 가까운 정도에 따라 그 유의미성의 정도를 가질 것이다. 둘째로 의 제스처는 의 관점에서 우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각주:6] 왜냐하면 은유의 진리성은 그것이 속한 세계 안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6. 매듭짓기

나는 저자들이 은유의 문제를 통해 다다르고자 한 지점에 대한 개인적 이해를 통해 이 글을 구성해 보았다. 내가 파악한 바로 저자들은, 첫째 은유가 철학에 유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참이며 또한 불가피하다는 점, 둘째 이를 통해 삶의 생명성과 에너지를 철학에 담아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이는 책 전반에서도 드러난 점이기도 하다. 소박한 경험적 사실에서 출발하여 우리가 가진 자유와 판단의 권리를 철학적으로 옹호하려는 이러한 움직임에 나 자신도 매우 동조하고 있다. 하지만 그 방법에서 조금 차이가 있긴 한데,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난 지점이 바로 은유의 문제였다. 저자들은 소박한 자연주의의 입장에서 우리의 경험적 삶을 하나의 거대한 세계 안에 위치시켜 논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은유의 문제에 접근하는 데에 꽤 많은 우회로를 지나야 했고, 단순함을 추구했던 논의가 언어의 복잡성을 시인하는 데에 이르렀다.

이 논의가 본래 영미권의 독자들을 위해 쓰인 점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 책의 논의가 갖는 효과는 어떤 파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은유에 대한 언어 분석이라는 지점에 집중하느라 그 이상, 즉 삶의 문제를 다루는 데에서 부족함이 느껴졌다. 은유의 문제를 둘러싼 이 두 가지는 사실상 동등한 권리를 지니는 날개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은유가 창조하는 세계를 자연세계 안에 위치시킴으로써 이 문제에 접근하고자 했다. 세계라는 이미지를 통해 우리의 경험은 자연세계에 산발된 것 혹은 관습과 제도에 종속적인 것이 아니라 그 나름대로 견고하게 조직된 자율적 운동이라는 점을 부각했다. 오히려 이 세계는 관습과 제도를 자신의 관심에 따라 선택적으로 취하며, 때로는 그것을 위반하며 새로운 의미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 운동의 근원을 따진다면, 우리는 몸의 느낌-이미지()와 상상의 운동(별자리를 만드는 것)과 마주칠 것이다.

이 상상을 통해 개인의 세계는 그 자체의 완결성과 진리성을 갖는 것으로서 정당화될 수 있으리라 본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의 말을 참으로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표현하는 세계를 인정하는 것이 곧 그 사람의 고유한 삶과 실존을 인정하고 자연세계의 다양성을 보존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광인에게 태양은 폭력이다. 실제로 우리는 객관 혹은 객관성의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사람의 생각은 과학적으로 실증되어야 하며, 사람의 가치는 점수와 자격증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자신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다는 느낌 속에 살아야 한다. 나아가 그 누군가의 목소리가 나를 지배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사실의 문제가 의미의 문제에 앞서며 오히려 그것을 무화無化하는 세상에서 인간의 고유한 실존은 설 자리를 잃는다.

한편, 미처 해결하지 못한 문제도 있다. 61-62쪽에 등장하는 장면 1과 장면 2의 차이에 대한 논의가 그것인데, 사실 장면 2의 경우 나는 상징symbol’ 개념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장면 1에서 시인펭귄은 둘 다 추상적 이미지로서 기능하는 반면, 장면 2에서 시인펭귄이라는 구체적 대상과 관계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상징은 질서가 하나의 이름에 압축되어 다른 세계에 들어간 뒤, 그 다음부터 활동을 시작한다. 장면 2에서 시인은 우선 펭귄을 지시하는 말로 인식된 뒤에, 그 의미를 드러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시인과 펭귄의 관계는 은유적인 관계와는 다르다고 나는 보았다.

이 문제뿐 아니라 다른 여러 주제들도 이 글이 이 책 2장의 내용을 온전히 담아냈다고 말할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일로 남겨두고, 이만 이 글을 줄이고자 한다.


  1. Aristoteles, On Prophecy in Sleep(in; Parva Naturalia), in; The Loeb Classical Library, trans. by W. S. Hett, London and Cambridge, 1964. 464a33-464b6 이하, 김동규, "멜랑콜리 – 이미지 창작의 원동력", <철학탐구> 제 25집, 2009, 119-149, 143쪽에서 재인용. 한국어 번역은 김동규. [본문으로]
  2. 김동규, 위의 논문, 127쪽 참조. [본문으로]
  3. Octavio Paz, The Bow and the Lyre, trans. by Ruth L. C. Simms. Austin and London: University of Texas Press, 1973. p. 24 [본문으로]
  4. 집합론을 활용하는 이런 발상의 근거를 알랭 바디우, <존재와 사건>, 조형준 역, 새물결, 2013에서 발견하고 배운 것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본문으로]
  5. ZF2. 기초 공리axiom of foundation이라고도 불리며, 다음과 같이 형식화된다. . 즉, 자기 자신과 서로소disjoint인 원소만을 자신의 원소로 삼을 수 있다는 말인데, 뒤집어 말하면 자기 자신은 자신의 원소로 삼을 수 없다는 말과 동치이다. [본문으로]
  6. 이해의 관점의 문제에 관해서는 이승종, 「여성, 진리, 사회 -새로운 관계 정립을 위한 철학적 시론-」, 『철학연구』 Vol. 33, 2007 참조. [본문으로]

Leave a Comment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