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에 대하여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단적으로 말해 '틀린' 질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제기되어서는 안 될 질문이라든가, 혹은 논의를 나쁜 쪽으로 몰아가는 질문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우리말에서 '틀리다'는 것은 어긋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뒤틀리다', '수틀리다' 혹은 '비틀다' 등에 그 뜻이 남아 있다.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사태의 질서와 어긋난 질문이라는 것이다. 무슨 사태를 말하는가? 내가 철학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나는 문학이나 역사학 혹은 경제학, 사회학과는 구분되는 분과학문으로서의 철학을 의미하는 것일 테다. 이 암시는 철학과 여타 학문 간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보아, 철학은 일차적으로 철학적 글이며, 이는 다른 학문 역시 마찬가지이다. 철학이란 '글'이 취할 수 있는 여러 속성 가운데 하나가 극대화된 형태를 말한다. 그렇다면 다시, "글이란 무엇인가?"를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틀린 질문이다. 왜냐하면 글 자체의 속성을 말하는 것으로는 어떠한 삶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관심은 글을 읽고 쓰는 것이니, 이렇게 고쳐 물을 수 있겠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은 (나에게) 무엇인가?"


시험 공부를 하다가 문득 나는, 마치 이상이 <권태>에서 지천이 다 초록으로 가득 찬 광경을 보고 경악하였듯이, 내 대부분의 시간과 활동이 글자로 가득 차 있음에 놀랐다. 수업 텍스트를 읽다가 다른 책을 읽다가 인터넷을 보다가 다시 텍스트를 읽는 이 순환 속에서 나는 글자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나는 오직 글자들이 뛰노는 환경에서 자라 지금에 이르렀다(물론 초딩 때는 거의 책을 읽진 않았지만, 지식에 대한 호기심은 참 많았다). 그리고 앞으로 철학이든 무엇이든 연구를 하는 사람이 된다면, 나의 인생은 마치 막걸리집 벽지와 같이 온갖 글자로 가득찬 무엇이 될 것이다. 만약 여기서 어떤 유의미한 것을 끌어올리지 못한다면, 수십 년 뒤의 나의 지적 삶은 거세된 양말처럼 되어버리지는 않을까? (소름 끼치는 일이다.)


본래 철학책을 읽던 목적 가운데 하나가 지식을 늘리는 일에 있었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돌이켜 보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세계에 대한 기존의 탐구를 흡수하면 나 또한 분명한 시각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간 읽었던 수많은 글 가운데 나에게 꼭 맞는 옷과 같은 글은 정말 몇 개 없었다. 그나마도 한때의 탐구거리로 머무는 경우도 많았다. 어쩌면 모든 관점과 체취를 지운 '초월적'인 지식이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에 그 시간들이 지탱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성급한 결론은, 각자의 관점에서, 각자의 상상에서 자유로운 철학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나의 지성이 어떤 하나의 철학 안에 포섭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또 그러고 싶은 욕망은 오직 '생각하지 않는 편안함'에 안주하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어쨌든 근래에 나는 오직 나의 삶에서 시작하는 사유만이 고유하고 또 (나에게) 유효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한편, 이런 생각이 어렴풋이 들던 무렵인 지난 학기부터 나는 철학자들의 글을 보면서, 그들이 그들만의 현실에 어떤 태도로 접근하는지를 유심히 보기 시작하였다. 개중에는 정말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문제에 대한 고뇌부터, 사회와 세계에 대한 (때로는 과도한) 고민까지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었다. (딱히 멜랑콜리하거나 실존주의적이지 않은 나에게 후자의 글들은 일종의 위안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나는 논리라는 것이 실은 자신의 고유한 고뇌와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을 하였다. 시적인 글을 쓰고 싶어했던 나의 오랜 소망과 철학의 엄격한 논리가 충돌했던 그간의 갈등이 해소되는 것 같았다.


방법! 다시 글의 문제로 돌아가자. 나는 시도 좋아하고 소설도, 희곡도 읽는 것을 좋아한다. 또 역사책을 손에 들면 아직도 설레고,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물리학이나 생물 책을 읽기도 한다. '글'의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이 모두 뿌리에서 같듯, 방법의 차이는 그 갈라지는 줄기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여전히 그 길들 사이에는 뚜렷한 구분이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위대한 글들은 특히 시와 논리 사이에 구분이 없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글이 담는 생각이며, 방법은 그 내용에 꼭 맞는 길을 택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그것이 시이든 철학이든, 남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현실과 그 사람의 상상과 그 사람의 목소리를 읽는다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해, 시는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소설은 이야기를 전달하며, 철학은 세계를 탐구한다는 식의 낡은 구분은 무너지는 것이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분명해졌다. 나는 나만의 현실에서 겪는 문제들을 내 고유한 방식으로 풀어가면 되는 것이다. 나의 글은 그 기록이 될 것이며, 또한 잠언이 되고, 예언이 될 것이다. 글투가 굳이 애써 진지해지지 않아도 되고 또 논리가 애써 엄밀하지 않아도 된다. 은유를 써도 되고, 상징을 써도 된다. 때론 이야기를 풀어 써도 괜찮다. 나는 부족하지 않다. 누군가 나에게 논리와 엄숙을 강요하는 자에겐 아침처럼 상쾌한 비웃음을 선사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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