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 때리고 있는데 갑자기, 이데올로기의 재생산과 바이러스의 일생 주기가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점을 깨닫고 소름이 돋았다.

1.
바이러스의 일생. 특히 HIV 같은 바이러스는 숙주 세포에 침투한 뒤, 숙주의 DNA에 자기 유전 정보를 끼워넣어서 숙주가 DNA를 복제할 때 자신의 유전 정보도 함께 복제되도록 한다. 이 때, 숙주 세포의 생명활동에는 지장이 없다. 그러다가 일정 자극이 주어지면 숙주 세포를 깨고 나와 다른 세포를 감염시킨다.

2.
이데올로기의 활동. 알튀세르의 통찰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가족, 학교, 미디어, 종교, 사법, 정치 등을 통해 개인의 내부로 침투한다. 그 가운데 그가 강조하는 것은 가족, 학교, 종교를 통한 이데올로기이다.

내 개인적인 경험에 따르면, 학교에서는 특히 어린 아이들을 두고 질서에 따르는 법, 다른 사람들과 문제 없이 지내는 법 등을 가르치면서(이것은 긍정적인 면일 것이다), 동시에 '숫자로 불리는 법'을 가르친다. 즉, 학교에서 나는 고유한 나가 아니며 오직 '1학년 3반 30번'이라든지 '도서부 부원 A' 같은 식으로만 식별된다. 잘 안 와닿으면, 행정실에서 과연 나를 이름으로 식별하는지 반 번호로 식별하는지 생각해보면 될 것 같다. 또한 시험 결과(점수나 등수)를 통해 나를 파악하려는 시도를 많이 경험할 수 있다. 초등학생 때 한 번은 수업에서 출석을 부르는 선생님한테 나를 번호로 부르지 말고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다가 혼쭐이 난 적이 있다. 학교는 그런 곳이다.

이것은 급식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고, 다른 모든 집단적 활동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대체 가능한 '자원' 내지는 '물건'으로 파악하는 시선에 익숙해지다 보면, 스스로도 자신의 고유한 특성이나 성격, 자질 같은 것에 관심이 없어진다. 이런 맹목적인 평등주의 속에서 살다보면, 어느 순간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것도 나보다 잘난 것도 없어 보이는 누군가가 선생님의 주목을 받는다든지, 혹은 다른 일로 '튀게' 되는 경우에 이상한 분노가 생긴다. 왜 나는 인정받지 못하지! 이런 상황에서 자신도 돋보이고 싶어서 더 노력을 한다면 그나마 나은 경우겠지만, 반대로 튀는 사람을 찍어눌러서 평등한 '우리'와 같게 만든다면, 그것이야말로 이데올로기적인 결과인 것이다.

이것을 두고 전적으로 인간의 '본성'의 악함을 탓할 수 있을까? 그 나쁜 짓을 한 아이들도 알고 보면 심성이 곱고 칭찬 한 번에 신이 나서 열의를 보인다. 그렇다면 순간의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미숙함이 문제일까?  사실 이런 질문이 문제다. 모든 것을 개인의 탓으로 돌려버리는 사고방식! 만약 그렇다면 이런 일들은 거의 모든 곳에서 동등한 빈도로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학교폭력의 경우만 보더라도, 전국적으로 빈도의 편차가 크다. 구조의 문제를 덮어두고 개인의 탓만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인데, 여기서의 구조는 바로 평등주의 이데올로기, 혹은 사람에 대한 양적 환원주의이다.

3.
학교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이데올로기도 마찬가지다. 당장 학교 앞에 '예수천국 불신지옥' 피켓 들고 계신 분들만 보아도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다. 문제는 경제적인 이데올로기,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지금의 관심이 아니므로 미뤄두고, 이데올로기들이 어떻게 활동하는지 보자.

나의 생각은 이렇다: 이데올로기는 사람의 행동 자체를 바꾸지 않고, 대신 그 행동의 동기motive를 바꿔놓는다.

솔직히 초중딩들끼리 싸우고 때리는 것은 과거로부터 있어왔다. 그런데 왜 최근에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된 것일까? 지금의 어른들은 회고하기를, 예전에는 싸우는 애들끼리만 싸우고 자기들끼리 서열을 세우는 것에 관심이 있었지, 지금처럼 약한 애들, 튀는 애들을 괴롭히는 데 관심이 있지 않았다고 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폭력의 동기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말하자면, 저 친구가 나보다 낮은 서열에 있으면서도 내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에 응징하는 것이었다면(이것도 충분히 나쁘기는 하다), 요즘은 저 친구가 동질적인 '우리'에 섞이지 않기 때문에 때리는 것이다.

나도 학교 다닐 때 뒤통수 맞아 봤는데(literally), 생각해 보면 그 이유는 후자보다는 전자에 가까웠다. (싸움에 관심 없는 모든 사람은 그들에게 아웃카스트out-Caste 이다. 흔한 말로 불가촉천민. 천민은 아닌데...) 내가 아무리 학교에서 이상한 짓하면서 다니고 외떨어진 무리에서 놀아도, 말로 괴롭힘 당한 적은 있어도 맞고 다니진 않았다.

어쨌든, 흠흠, 이렇게 사람들의 행위의 동기가 이데올로기에 물들면, 어느 순간에는 마치 레트로 바이러스가 숙주 세포를 깨고 나오듯, 전에는 관찰할 수 없던 이상현상들이 발생하게 된다. 예컨대 병역 기피자에 대한 사람들의 비난 같은 것이 그렇다. 양측의 입장 모두 이해는 할 수 있지만, 특히 비난하는 사람들의 논리의 부실함이나 얕은 분노, 원한심 같은 것은 좀 지나친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들의 논리를 보면, 의무와 권리는 대칭이 되어야 한다든지, 너가 나고자란 평화의 시간들은 모두 누군가 군복무를 했기 때문에 있었다든지, 특히 외국으로 날은 사람들에게는 겁쟁이, 도망자의 호칭을 부여한다든지 등등... 몇 가지 패턴으로 압축될 수 있다.

이것은 사람들의 사고 수준이 저급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반성 없이 타인의 목소리를 흉내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북한,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이 호시탐탐 우리나라를 노리고 있다는 식의 말을 하는 사람들이 한국 군대가 그들을 모두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희망한다.) 여기까지는 양반이다. 다음 단계가 남아 있다.

그것은 알튀세르가 지적한 바: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주체로 호명한다.

이제 이들은 자신이 품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비판받았을 때, 스스로 논리를 만들어 대응하거나, 직접 행동으로써 스스로를 증명한다. 기독교 단체가 하는 활동을 비판했더니 성경에 없는 내용을 근거로 대응하는 사람이나, 정부 정책을 비판했더니 이상한 통계를 들고 나오는 사람들 등등을 이런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단지 이데올로기에 '감염'되어 있을 때는 조용한 (그러나 고유한 얼굴이 지워진) '개인'이던 사람들이, 어떤 자극을 받으면 스스로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며 '주체'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근래에 이슈 되고 있는 일베나 어버이연합, 또 최근에 사제폭탄을 제조했던 19살 누구 등등... 이전 시대에는 인종주의 테러단체, 혹은 서북청년단, 혹은 (문화혁명기의) 홍위병, 마녀사냥에 앞장 섰던 하급 사제 등등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이와 관련한 기사: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1341)

이들은 스스로 정당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이데올로기의 호명을 받아 홀린 사람들처럼 일제히 박수치고 또 요동친다. 그것은 다른 누구의 비판으로써 무너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활동하는 그들의 뒤에는 활동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4.
뭐 대한민국 군대가 없으면 우리는 벌써 사회주의에 점령되어서 평생 조모임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논리는 우습다 쳐도, 팩트와 논리로 무장한 사람들은 좀 고급화된 형태에 속한다. 위 기사를 보면, 이들의 주 동기 중 하나는 무임승차에 대한 분노이다.

솔직히 무임승차에 대한 분노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가지는 도덕감정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도덕감정이 적용될 수 있는 곳이 있고 아닌 곳이 있는데, 그들에게는 이런 구분조차 흐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복지 문제의 경우, 정말로 무임승차 하는 사람을 그렇게 못하게 해야 하는 것이지 복지를 없앤다고 되는 문제는 아니다. 군 문제의 경우, 멀쩡한 사람이 안 가는 것을 막아야 하는 문제지, 군에 부적합한 사람까지 다 집어넣는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고보니, 한 세대 전만 해도 지금처럼 현역 입대율이 95%에 이르는 이상한 사태는 없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자연스러운 도덕감정이 부적절한 곳에 사용되었을 때 일어나는 참사를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는 말이다. 평등에 대한 관념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많을 때 줄 서고 세치기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점수로 줄세워지고, 고유한 이름이 지워지는 식의 평등주의는 옳지 않다. 점수로는 세치기를 못하니까 괜찮다는 논리인가?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가 필요하지 않은 것을 숙고하지 않고 사거나 먹고난 다음에 오는 불만족스러운 기분이 싫어서 돈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돈을 아껴서 자본을 축적해야 미래를 대비할 수 있다는 식의 설교를 늘어놓는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돈이 있어도 쓰고 싶어도 안 쓰고 꽁꽁 싸맨 다음, 무덤에 갖고 가지도 못할 그 돈에 매여 산다.


5.
이것이 사람다운 삶인가? 이것이 세상을 사람 살 만하게 만드는가? 이데올로기는 이미 우리 안에 있다. 그것이 잠복하고 있건 아니면 이미 활동하고 있건 간에 누구든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알튀세르의 한계는 그 극복 가능성을 차단한 데에 있다. 사실 나조차도 어떻게 이것을 극복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스스로의 행동 동기를 잘 반성하지 않는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데올로기의 투사(鬪士)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당장에, 높은 성적을 거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으로 이 대학에 입학한 이유가 무엇인가, 왜 돈을 더 벌고 싶은가, 왜 저항하면 안되는가 등의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공부하지 말라, 돈 벌지 말라, 순응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 동기를 잘 성찰하라는 것이다. 10년 뒤에, 아니 그보다 더 뒤일지도 모르는 그 어느 때에 나 자신이 추한 무리에 속해있고 싶지 않다면, 생각해야 할 것이다.


모든 고귀한 것은 드물고 또 어렵다.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