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터스텔라>는 서구적인, 나아가 미국적인 상상력을 현대 과학과 기술을 통해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역사의 첨단에 서 있다. 그러나 그 무의식에 흐르는 서유럽 전통은 이 영화를 진부하게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 특히시간에 대한 그들의 뿌리깊은 의식에 나는 주목했다. 초반 영화의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프로젝트의 이름은 ‘Lazarus’, 즉 예수에 의해 부활의 기적을 체험한 나사로의 이름을 따왔다. 전 지구가 사막화되고 해마다 병충해가 휩쓰는 가운데 식량이 부족해지고, 사람들의 모든 관심과 역량이 생존에 집중되는 상황이었다. 인류 차원에서죽음이 임박하는 가운데 소수의 과학자들이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서 인류를 부활시킬 계획을 하고 있었다. 우연히 이 일에 참여하게 된 주인공 쿠퍼가 기약 없는 탐험(?)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가족에 대한사랑’, 특히 딸에 대한 각별한 사랑이었다.

 

죽음과 사랑이라는 이 사태는 서로의 중력장 안에서 서로를 끌어당기며 회전하는 펄서pulser와 같이 한 번씩 번갈아 등장하며 영화의 줄거리를 짜 나간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우주로 떠난 이들이 토성 근처의 웜홀을 통해서 맨 처음 도착한 곳은 물로 뒤덮인 행성이었다. 이곳에서 이들은 동료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곳에서 지구 시간으로 23년을 보내고 돌아온 그들은 부족한 연료로 남은 두 후보 행성 중 한 곳을 선택해야 했을 때, 사랑과 이성reason 사이에서 갈등한다. 결국이성을 선택한 그들의 기대는박사의 기만으로 배신당한다. 하지만 달리 보면, 죽음이 임박한 그 행성의 환경에서 탈출하고 살아남기 위해 데이터를 조작하는 일은 만 박사에게이성적인선택이었다. 생존을 위해서그러나 생존을 앞세운 이성이 충돌할 때, 오직 죽음만이 그들을 기다린다. 이성이 가져오는 파국을 뒤로 하고 쿠퍼와 아멜리아는 각자의 사랑의 장field로 갈라졌다.

 

사람들은 이어지는 블랙홀 내부 장면을 영화의 복잡한 갈등을 한 번에 잘라버리는기계장치 신Deus ex Machina’으로 이해했다. 실제로 이 장면은 정말 뜬금 없이 등장해서는 영화 내내 불가능할 것으로 비쳐졌던 플랜 A를 극적으로 성공시켰고, 심지어 과학적으로도 상식에 어긋난다. 그러나 영화의 논리에 따르면, 이 장면은 불가피했다. 영화 초반에 등장한 대사오직 중력만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전달될 수 있지가 여기서는오직 사랑만이 시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지로 변주된다. 이 지점에서 시간(시공간)과 중력의 대립은 죽음과 사랑의 대립으로 치환된다. 중력이 시공간의제약을 뛰어넘듯, 사랑이야말로 죽음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생각이 담겨있는 것이다. 주인공 쿠퍼는 딸 머피에게 비밀스러운사랑의 언어로 그 열쇠를 건네주었다시간이 멈추는 곳에 사랑과 생명이 있을지니.

 

여기까지만 보면 이 영화는 훌륭하게 진부한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한 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단순한 블록버스터보다는 더 신선하게 만들면서, 한편 다른 방향으로 또 진부하게 만든 요소가 하나 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죽음, 사랑, 시간, 중력 등을 다시 하나로 묶어내는 논리, 멜랑콜리Melancholy의 상징이다. 서유럽의 지적 전통에서 태초로부터 슬금슬금 제 모습을 드러내던 멜랑콜리가 <인터스텔라>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과시했다. 주인공 일행이 새로운 가능성을 위해 통해 갔던 곳, 토성은 고래로 점성술astrology에서 멜랑콜리를 상징하는 행성으로 알려져 있다. 통상우울내지는우울증으로 알려진 멜랑콜리는, 이 글의 주제인 시간과 관련해서 보자면, 항상 죽음과 직면하고 있는 기분 내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항상 죽음과 마주하고 있다는 것은 미래를 향해 있던 모든 주의와 의식이 과거와 현재, 그 중에서도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어둠 같은 이 순간으로 철회되는 것을 말하며, 내면의 공허와 모든 것의 무의미에 짓눌려 있는 것을 말하며, 눈먼 분노와 자책 가운데 심지어 고통을 욕망하는 상태를 말한다. 실재가 어떻든 간에 이 상태에서 사람들은 끝, 사라짐, 마지막을 계속 의식한다. 멜랑콜리에게 시간이란 단지 죽음으로 가는 여정을 의미할 뿐이며, 하루를 산다는 것은 죽음에 하루 더 가까워진다는 것을 가리킬 뿐이다. 오늘과 내일이 다르지 않게 될 때, 시간은 가고 순간moment은 멈춰버린다.

 

그래서 멜랑콜리는 초월을 꿈꾼다. 시간의 흐름에 의미가 닳아 없어지지 않을 진리를 원하며, 공허한 존재를 가득 채워줄 아름다움을 원한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에서부터 등장하는 이러한 가치 가운데서도 으뜸은 사랑eros이다. ‘에로스의 원래 뜻은 서로 다른 것들을 끌어당겨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 만유인력이다. 모든 의미와 아름다움과 선함을 잃고 세상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는 자기 자신을 끌어당겨줄 어떤 것을 원하는 것, 또 그러한 다른 이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이다마치 블랙홀 속의 쿠퍼와 지구의 머피처럼. 플라톤은 우리의 영혼이 에로스를 통해 점점 더 높은 상태, 이데아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면 육체를 벗고, 즉 시간의 제약을 넘어, 죽음을 넘어 영원한 아름다움의 세계로 초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터스텔라>에서 이런 원형적 사유는 가감 없이 드러났다.

 

문제는 현실에 있다. 그래서 결론이 무엇인가—‘사랑하라, 내일 죽을 것처럼’? 놀란 감독이, 혹은 그 누가 되었든 혼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존중한다. 그러나 타인에게 그 생각이 미치면 조금 곤란해진다. 얼음 행성에서 만 박사가 쿠퍼에게 그렇게 강조했던생존본능이 바로 그 직접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생존본능에 충실히 따랐던 합리적인 만 박사는 더 없이 부끄럽고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다윈의 진화론을약육강식’, ‘적자생존으로 받아들였던 그 정신상태가 지금 평범한 우리네 삶을 이렇게 각박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도 지적할 수 있다. 내일 죽을 것처럼 살라는 메시지가 대단한 교훈인 것처럼 메스컴에 떠돌며, 그 육화incarnation인 스티브 잡스가 영웅처럼 숭배 받고 있다. 실재가 어떻든 간에 당장에 모든 것이 망해버릴 위기가 눈 앞에 항상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말한다. ‘밀러의 행성에서처럼 1시간을 7년처럼 써야 하는 모든 곳에서 우리는 숭고한 죽음의 파도 앞에 서게 된다. 멜랑콜리에게 생존본능은 삶을 향한 욕동impetus이고 투쟁이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것은 삶의 모든 의미와 아름다움을 퇴색시키고 무화(無化)하는 칼날이다. 죽음을 극복하려는 자의 논리가 죽음을 조장한다.

 

중요한 것은 시간관이다. 물론 멜랑콜리에 대한 공감이나 반발은 논리와 이성 이전의 영역이기는 하다. 그러나 논리와 기분은 또 상호작용하는 측면이 있어서, 이미 널리 퍼진 서유럽적, 종말론적 세계관을 극복하고자 하는 이에게는 다른 시간관의 가능성은 유용할 것이다. 서유럽의 멜랑콜리한 시간관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으로 힌두의 시간관을 꼽을 수 있다. 흔히 순환적 시간관으로 알려져 있는 이 관점은 한 삶의 끝과 또 다른 삶의 시작이 맞닿아 있다. 또한 <성경>에서 천지창조로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이 수천 년에 지나지 않는 반면, 힌두에게 우주는 43 2천만년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다가온다.

 

이 말을 본 이는 바로 이렇게 반박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 거대한 시간 속에서 나 하나의 삶과 죽음쯤은 거대한 도서관 가운데 떨어진 티끌 하나와 같이 미미한 것 아닌가? 이렇게 그는 자신의 죽음을 정당화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두 가지의 핵심은 단순히 삶이 순환하며 우주가 장구하기 때문에 삶에 집착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열쇠는 시간의 경계를 의식하지 않음에 있다. 오직 그 시작과 끝을 생각할 때 43 2천만년이라는 시간은 위압적이고 심지어 숭고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은 그 가운데 100년도 안 되는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장구한 우주의 역사의 시작이나 끝에 대해서는 어떠한 암시도 포함하지 않는다. 또한 여기서 삶과 죽음의 경계는 날카롭지 않다. 서유럽 시간관에서 죽음은 나의 존재가 심연 속으로 사라져 흩어지는 절벽과 다르지 않다. 그들에게 죽음은 영원한 형벌이며, 삶은 기약 없는 집행유예이다. 그러나 힌두에게 이 생과 다음 생은 연속적이다. 시간을 흐름에 비유할 때, 힌두의 시간은 죽음을 개의치 않고 도도하게 흐르는 것이다.

 

나는 심정적으로 이러한 시간관에 동의할 수 있다. 삶이 순환한다거나 우주가 43 2천만년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시간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 말이다. 실로 우리가 서유럽 시간관에 동의하는 것은 삶과 죽음이라는 부동의 사실로부터 우주를 유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의미의 차원에서 보면 삶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태어남과 죽음은 경험할 수 없는,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는, 기억 속에 남지 않게 되는 그러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시작도 끝도 분명하지 않은 순간과 순간의 흐름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끝을 의식한다면 우리는 유한한 삶 안에 더 많은 시간을 우겨 넣고 싶은 의욕에, 또 사회에서 주어진 그러한 의무에 시달리게 된다. 내가 볼 때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1시간을 7년처럼 '아껴 쓰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7년을 1시간처럼 보내는 것도 아니다.

 

물론 이 역시 양면성을 갖는다. 순간의 감정과 순간의 의욕과 순간의 요구에 충실하게 따라 산다면 분명 삶은 풍요로운 의미의 도원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방향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인도 사람들에게 그러한 일관성을 부여하는 것이 카스트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시간관을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은 또 다른 위험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서유럽적인 세계관에 깊이 물들어 있는, 그 속에서 고통 받는 우리 입장에서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위로가 될 듯하다. 누구나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으니 말이다.

 

이리하여 <인터스텔라>의 포스터를 다시 본다. 영화관에서는 잔뜩 몰입해서는 울며불며 보았지만, 막상 영화의 캐치프레이즈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라는 문구를 보니 그것에서 배어 나오는 미국적인 무엇이 가슴 속에 괜한 반항심을 만든다. 또 최근 나는 '사람답게 사는 것'에 관심을 갖고 나의 머리 속을 점령하고 있는 온갖 생각들을 하나하나 시험대에 올려보고 있다. 시간에 대한 생각은 그 가운데에서도 중요한 것에 해당했는데, <인터스텔라>를 통해 훌륭한 계기를 얻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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