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부터 헤브라이즘을 거쳐 현대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서양 사상(이 글에서 사상이라는 단어는 예술, 철학, 종교를 가리킨다; 헤겔의 절대정신)의 일관된 주제를 꼽으라면 하나는 고독한 주체의 철학이고(여기서 주체는 주체 일반이 아니라 "고독한" 주체를 가리킨다. 프랑스 철학자였다면 "대문자 주체"라고 표현했을 테다), 다른 하나는 상실과 회복의 역사일 것이다. 이것이 서양 사상의 주된 흐름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상당히 비역사적이다. 과연 3000년이 넘는 서양 사상의 역사 내내 같은 주제가 되풀이되기만 했다는 것인가? 오히려 이러한 주제들은 어떠한 실체화된 것이라기보다도, 서양 사상들의 수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희미하게나마 역사를 통틀어 공통적으로 보이는 경향성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러한 경향성이 서양의 모든 사상을 지배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거기에는 주류에 반대하는, 은밀한, 억압된, 그러나 면면히 이어져온 또다른 전통이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그것에 대해 스케치해 보려고 한다.


§ 고독한 주체의 철학

서양 사상의 주체는 고독하다. 먼저 자기가 바로 선 다음에야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 한다. 달리 말하면, 타인과 함께 함으로써 자신을 세우려 들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라는 모티프는 굉장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대화라는 것은 이미 스스로 선 주체들끼리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에게 논파당하는 것에 괴로워하는 이유는, 그들이 바로 그렇게 세워놓은 자신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고르기아스』 편에서 등장하는 바, 소크라테스에게 논파당한 자는 논리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동원하여 자신을 지키려는 몸부림을 보인다. 정의가 강한 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시마코스의 말을 부정하면서, 진리를 강한 자인 자신의 편으로 끌어온다. 그러나 예컨대 선문답에서 스님들은 결코 논파하거나 논파당하지도 않을 뿐더러 자신이 무너지는 것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말'이 무너지는 것과 '자신'이 무너지는 것을 구분한다) 그것은 서양의 주체가 바로 고독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종교에서 그들은 원칙적으로 '혼자' 신과 대면한다.  제도적으로는 평신도가 랍비나 신부를 통해 신과 만나지만, 그들이 눈을 감고 기도할 때, 그리고 특히 루터 이후 성경을 정독할 때 그들은 홀로 신과 마주한다. "신 앞에 선 단독자"다. 또한 기독교에서는 종교적 결단을 중시한다. 개인의 윤리를, 사회의 도덕을 뒤로 하고 신의 말씀을 첫째로 따를 결단을 요구한다. 예컨대 아브라함은 늦게 얻은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는 신의 음성을 듣고는 고뇌 끝에 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 때 신이 아들 대신 염소를 제물로 바치게 하였다.


16.말씀하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내 자신으로 말미암아 맹세하노니 네가 이 일을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 즉 17.내가 네게 정녕 복을 주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들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하리니 네 자손이 그 원수들의 성물을 차지하리라 18.또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백성이 복을 얻으리니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한 연고니라 하셨다 하니라


『창세기』 22장 16-18절.


이렇게 성경에 나타난 종교적 주체는 모든 것을 물리치고 신의 음성과 자신, 이렇게 둘만을 마주세운다. 한편 예수는 어떠한가? 그 또한 고독한 영웅이 아니던가. 다른 모든 비극의 영웅들도 그렇다. 가장 주체적인 인물들이 가장 고독하며 가장 비장하고 가장 비극적이다. '진리'을 자처하였지만 '진실'과 마주서게 된 오이디푸스, 인륜성을 대표하며 차가운 법과 마주선 안티고네, 불의를 상징하는 클로디어스에게 복수하려는 햄릿, 적극적으로 모비 딕에게 모든 악을 부여한 뒤 그와 맞서는 에이해브 선장 등.


§ 상실과 회복의 역사

플라톤; 영혼은 육체와 결합하기 이전에 완전한 원본의 세계인 이데아 계에 있었다. 그러나 육체로 전락하면서 망각의 강 레테를 건넌다. 육체에 갇힌 영혼은 본래의 모습을 찾기 위해 기억 속 희미하게 남아 있는 이데아를 회복하기 위해 분투한다(aletheia). 영혼이 육체를 탈옥하는 방법은 아름다움을 획득하는 것(eros)이다. 그리고 로고스를 사용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것, 이데아 중의 이데아는 선의 이데아 -여기서 진, 선, 미는 하나가 된다.


기독교; 낙원에 살던 최초의 인간은 선악과를 먹은 뒤(선악과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든), 낙원에서 추방당한다. 그의 자손들은 고통의 삶을 살며 죄의 값을 치룬다(cf. 현세를 지옥으로 보는 단테). 신의 아들이 나타나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 죽는다. 되찾은 낙원을 다시 얻기 위해 종교적 결단이 요구된다.


루소; 이제 그 낙원이 '자연'이라는 개념으로 내려온다. Nature는 자연이면서 동시에 본성이다. 최초의 상태이다. 가장 완전한 자연상태, 그러나 문명에 의해 파괴된 자연상태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바로 계몽이다.


마르크스; 자연상태의 이름을 '원시 공산제'라고 부른다. 자연상태를 파괴한 문명의 이름을 '사유재산'이라고 부른다. 사유재산을 극복하는 방법을 혁명이라 부른다. 그러나 자연상태가 몰락하는 원인arche에 대한 설명이 신비주의적이기 때문에 그 실천강령telos 또한 불명확하다. '혁명'이라는 단어는 어떤 것도 가리키지 않는다.


헤겔; 정신이 스스로를 상실한 뒤 다시 돌아가는 과정. 그것이 절대정신이며, 예술, 종교, 철학이다. 각각 미, 선, 진에 대응한다. 플라톤의 변주.


§ 은밀한 전통

상실과 회복은 아르케와 텔로스다. 아르케는 과거의 끝이고, 텔로스는 미래의 끝이다. 시간의 양 극단이다. 스피노자는 그 끝을 절단한다. "인간은 원인을 모르는 채 태어났다"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원인자로서의 아르케의 부정, "그들은 언제나 이루어진 것의 목적원인만을 알려고 한다"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목적으로서의 텔로스의 부정. 아르케와 텔로스가 부정된 그곳에는 평범한 원인과 평범한 목적이 남는다. 아르케와 텔로스는 어떤 것의 실제 결과를 원인의 자리에 갖다 놓으며, 원인을 결과의 자리에 갖다 놓는다. 예컨대 본질이라는 개념이 그렇다. 합리적 이성이 만들어낸 혼란. 그것들이 직조해 내는 공간이 바로 상상이다. 따라서 우리의 실천은 '참된 원인'을 앎으로써 그 상상을 벗어나는 자유를 얻는 것이다.


프로이트; 그 상상을 '나르시시즘'이라고 이름 붙인다. 나르시시즘은 원초적이다. 그것은 원인을 왜곡하고 결과를 은폐한다. 병리적 증상, 특히 정신의 병을 다루기 쉽지 않은 이유가 바로 '진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나르시시즘 때문이라고 프로이트는 진단한다. 성인이 된다는 것, 성장한다는 것은 그 나르시시즘의 장막을 걷어내는 일이다. 끊임없는 수행(프로이트의 용어로는 작업arbeit)의 길이다.


알튀세르; 사회적인 나르시시즘을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자본이 스스로를 재생산하기 위해 사람들을,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를 진실로부터 격리시키려는 움직임이다. 법으로, 정치로, 경찰력으로, 미디어로, 교육으로, 종교로 이데올로기를 무의식에 심는다. 가장 좋은 결과는, 개인이 그 이데올로기를 스스로의 의지로 믿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의 실천은 역시 스피노자의 반복이다.


아르케와 텔로스에 대한 부정은 필연성에 대한 부정으로 나아간다. 궁극적 원인이란 알 수 없는 것, 그러나 신비주의에 머물지는 않는다. 그것이 바로 우발성이라는 개념이다. 우연의, 마주침의, 응고의, 주어짐의 철학. 그러나 제기되자마자 즉각적으로 반박되고 매장된 철학(알튀세르). 그러나 은밀하게, 땅 밑을 흐르는 마르지 않는 지하수 같은 전통이다. 열차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열차에 몸을 싣는 자의 철학이다. 이방인의 철학이다.


나는 이 전통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형태를 띠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앞으로의 과제가 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참된 자유의 철학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Comments

  1. 네온하늘 2014.06.28 04:52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스케치보다는 크로키라는 말이 더 적합했을 것 같다. 아이디어찡, 날쌘돌이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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