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학년도 1학기 서양철학의이해 8차 보고서: 존재(Being)

J. M. Bochenski, PHILOSOPHY: An Introduction

 

I. 주제: 존재

존재론은 존재하는 것 일반에 대한 탐구이다. 이는 매우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분야이다. 그러나 두 가지 전통, 즉 실증주의와 인식론적 관념론은 이러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첫째로 존재론이 가능한가를 물어야 하고, 그것이 가능할 때에 존재에 대해 탐구해야 할 것이다.

먼저 존재존재자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존재자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들 모두를 일컫는다. 존재는 존재자에서 추상된 개념이다. 그런데 이 논의에서는 추상의 영역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무의미를 피하기 위해 구체적인 존재자를 대상으로 한다.

존재자에 대한 이론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은 인식론적 관념론에서 처음 제기되었다.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지식은 이미 개별 과학이 탐구해 놓았기 때문에 철학의 문제는 그것들을 어떻게 명료하게 인식할 것인가에 국한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존재론자들은 가능성 일반, 범주 등에 대한 탐구는 개별 과학이 다루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사유 일반조차 존재하는 어떤 것이기 때문에 관념론적 탐구는 사유와 존재라는 두 가지 존재자를 가정해야만 가능해지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이것은 명백히 존재론의 영역이다.

존재론을 부정하는 것은 둘째로 실증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실증주의자들은 어떠한 언표에 대해, 중요한 것은 그 언표의 대상이 아니라 쓰임일 뿐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실체라는 말은 실재에 대해 어떠한 말도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언표의 문법적 쓰임이다. 따라서 그들에 따르면 존재론은 일반 문법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 그런데 존재론자들은 실증주의자들이 문제시하는 일반화의 정도가 비합리적이라고 한다. 즉 그들은 육식 동물에 대해 말할 수 있고, 포유류, 척추동물, 동물 일반, 생명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다음에 그들은 바로 언어로 비약한다. 존재론자들에 따르면 모든 개별 과학은 수학적 의미론이라고 불리는 영역으로 환원될 수 있다. 예컨대 우리가 생명 일반을 동물과 식물로 나눌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일반적 영역으로 내려갈 수 있을 것이고 생물학을 넘어 존재론의 영역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논의는 존재론의 가능성을 넘어 그것이 다루는 영역으로 옮겨간다. 먼저, 무가 있다. 무엇인가 있는 것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다. 달리 말해 무가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무가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함을 암시한다. 무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무가 어떤 대상임을 말하는 것이고, 따라서 무는 존재하는 것이다. 무라는 것은 있으면서 없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이러한 모순이 무를 실체화한 것에서 비롯된 오류라고 한다. 그들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나눈 후, 무를 후자에 포함시킨다. 즉 무는 인간이 생각한 것이며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무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의 결핍이다. 그런데 현실적 존재자는 모두 결핍을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제한된 것이고 한정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정식화하듯, 모든 규정은 부정이다. 다시 말해 모든 유한한, 즉 한정된 것은 결여된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예컨대 어린이는 철학자가 될 가능성이 있지만, 의자는 아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의 인식이나 관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즉 실재에 속한다. 실재는 현실적인 것과 가능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겠다. 이에 대해 파르메니데스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르트만이나 사르트르는 현실태와 가능태가 기본적으로 같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이런 구분을 거부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학파는 이 둘을 분명하게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 번째 문제는 범주에 관한 것이다. 세계는 특정한 속성을 갖고 또 서로의 관계 속에 있는 것들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이를 통해 볼 때 존재자하는 개별자를 세 측면으로 나누어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특정한 속성들과, 그것을 담지하는 실체 그리고 그것들의 관계이다. 이러한 구분은 현실/가능의 구분이나 물질/정신의 구분과는 무관하다. 이 셋에 대한 철학자들의 입장은 서로 다르다. 먼저 라이프니츠의 경우 실체, 속성은 인정했지만 관계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고, 반대로 헤겔은 실체는 관계의 집합이며 속성은 관계의 표현이라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셋 모두를 인정했다.

이를 통해 볼 때 두 가지 중요한 존재론적 문제가 떠오른다. 그것들은 본질과 내적 관계에 대한 것이다. , 현실적 존재자는 속성과 관계의 집합일 뿐인가, 아니면 그것들을 밑에서 받치는 실체가 있고 속성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한가? 많은 철학자들은 본질이란 것은 주관적 관점에 의존한다고 본다. 둘째, 존재자의 모든 관계는 그것의 내적 관계인가, 아니면 실체가 우선하고 본질적 관계와 비본질적 관계가 나누어지는가? 이는 사회철학에서도 중요한 문제이다.

 

II.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시아ousia, 즉 참으로 존재하는 것을 현실적으로 혹은 가능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개별적 존재라고 보았다. 예컨대 분필, 자동차, 위스키 등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특수한 존재자들 모두가 참된 실재이다. 그런데 이러한 실체들은 그것들을 서로 구별해주는 특질들을 갖고 있다. 예컨대 분필은 흰 색이고 딱딱하며, 길고, 그것을 사용하여 칠판에 글씨를 쓸 수 있다. 이것들은 모두 분필 안에 있는 것들이다. 또한 이런 특질들은 분필에 대한 술어로 등장한다. 예컨대 분필은 하얗다, 분필은 딱딱하다, 분필은 칠판에 글씨를 쓸 수 있게 한다 등.

그런데 주어인 분필과 술어들인 특질들은 서로 있음의 방식이 다르다. 하얌, , 딱딱함 등은 홀로 있을 수 없다. 즉 하얗다는 것은 반드시 어떤 것이 하얗다는 식으로 존재하고 생각되어야 하지, 모든 개별적 존재자와 분리된 하얀 것 그 자체가 있을 수는 없다. 달리 말해 하얀 것, 긴 것, 딱딱한 것 등은 분필이라는 어떤 것의존해야만 실재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속성이라고 부른다. 속성 중에는 우연적인 것도 있고 필연적인 것도 있다. 개별적 분필은 그것이 하얀 색이어도 분필이고, 노란 색이어도 여전히 분필인 반면, 그것이 칠판에 글씨를 쓸 수 있는 속성을 잃고 종이에 글씨를 쓸 수 있다는 속성을 얻으면 그것은 더 이상 분필이 아니게 된다. 이 필연적 속성을 본질, 즉 어떤 것이 바로 그것이게 만드는 속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개별적 속성들은 한편 더 높은 층위의 술어에 속한다. 예컨대 하얀 것은 색깔이다. 이렇게 속성들의 일반적인 층위를 추적하다 보면 몇 가지 최고 유가 존재하게 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총 10가지로 제시한다. 실체를 제외하면 9가지가 남는데, 그것은 양, , 관계, 장소, 시간, 위치, 상태, 능동, 수동이다. 이것들은 의존적으로 실재하는 것들의 최고 유이며, 이보다 더 일반적인 유는 없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한편 이러한 속성들은 어디에 의존하고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기체hypokeimenon라고 한다. 기체는 여러 가지 속성들이 그것에 귀속되지만, 자신은 다른 어떤 것에 귀속되지 않는다. , 홀로 서 있다. 그런데 이 기체는 어떤 것인가? 어떤 존재자에서 여러 실재적 속성들을 제거하고 남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무규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순수 질료가 무규정적인 것이기에 기체가 곧 질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이내 이를 반박하는데, 기체는 분리되어 있으면서, ‘어떤 이것tode ti’이어야 한다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질료는 형상을 떠나서는 가능적으로만 존재할 뿐이고 형상 또한 마찬가지이므로 기체는 형상과 질료를 모두 가져야 한다. 한편 어떤 이것이라는 것은 개별적 존재자의 개별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이것이라는 조건은 실체가 그것의 속성이나 관계들의 집합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을 암시한다. , 교재에서 언급된 바 헤겔의 주장과는 반대가 된다. 즉 어떤 개별자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인 조건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는 유적 본질이다. 그것이 바로 그것인 바라는 표현은 전통적으로 본질을 정의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예컨대 소크라테스는 머리가 작아도 소크라테스이고 훤칠하게 생겼어도 소크라테스이지만, 이성을 갖지 않는다면 그를 소크라테스라고 부르기는 힘들다. 이런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이성을 본질로 갖는다. 그런데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점에서 인간이라는 본질을 지녔지만, 그것은 여전히 보편자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티마이오스가 아닌 바로 소크라테스인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두 번째 의미에서 어떤 이것은 개별자의 개별적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다른 어떤 사람이 뚱뚱하고 머리가 크고 지적이며 다른 사람과 논쟁하기를 즐겨한다고 해도 그가 소크라테스의 어떤 이것을 결여하고 있다면 그는 결코 소크라테스가 될 수 없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떨어질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후자의 개별적 측면을 강조해서 그것을 1차 실체라고 하고, 전자의 유적 측면은 2차 실체라고 한다. 존재론적으로 존재자의 보편성보다는 개별성이 우선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라이프니츠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속성의 필연성의 측면에서 다르다. 라이프니츠의 경우 개별자가 그보다 더 작은실체인 모나드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활동하는 힘인 모나드는 서로 독립해 있으며 그 안에 모든 속성(빈위)을 갖고 있다. 모나드의 활동은 자기실현의 과정이며, 모든 과거와 모든 미래는 모나드 안에 있다. 이 때, 서로 독립된 실체인 모나드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나란히 활동할 수 있는 것은 신이 보장한 예정 조화pre-established harmony 때문이다. 여기에서 실체가 갖는 모든 속성들은 본질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연적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모나드 안에 필연적으로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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