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학년도 1학기 서양철학의이해 7차 보고서: 인간(Man)

J. M. Bochenski, PHILOSOPHY: An Introduction

 

I. 주제: 인간

저자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분명한 두 가지 특징은 인간은 동물이라는 사실이며, 그 중에서도 아주 특이하고 독특한 동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여타 동물과는 다른 생물학적으로 뛰어난 특질을 가져서 자연에서 살아남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추위, 더위, 맹수 등의 위험에서 살아남기에는 너무 약하다. 그럼에도 인간이 자연 속에서 살아남고 나아가 다른 생물을 멸종시키거나 하는 힘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인간이 가진 이성reason 때문이다. 물론 유인원이나 고양이도 지성을 사용할 줄 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중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며, 인간만이 가진 지성적 특성도 있다. , 기술, 전통, 진보, 다른 동물과는 달리 생각할 수 있는 능력, 반성의 다섯 가지이다.

유인원 등도 도구를 사용할 줄 알지만, 섬세하고 시간을 들여야 만들 수 있는 도구를 제작하는 것은 오직 인간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개인의 특성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것에서 근거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전통이라는 방식을 통해 기술을 발전시킨다. 인간은 생물학적 진화와는 무관하게, 사회를 통해 기술을 배우고 또 혁신함으로써 진보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 가지 특징은 모두 인간이 다른 동물과는 다른 사유 능력, 즉 추상 능력을 갖는다는 데에서 비롯된다. 과학과 종교는 그 두 가지 특징으로 들 수 있는데, 이는 어떠한 실용적 목적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경제적이거나 생물학적인 법칙에 종속되지 않는 이러한 특성들은 나아가 인간이 스스로 자유롭다는 자각을 갖게 만드는 데에 이른다. 이를 통해 인간의 다섯 번째 특징, 즉 반성 능력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인간은 외부세계뿐 아니라 자신의 내면 또한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플라톤은 인간이 자연과는 달리 영혼을 가진 존재라고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정신은 그 신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뇌에 생기는 작은 손상은 사고를 마비시킬 수 있다. 이 때, 정신과 신체의 연관에 관련된 의문이 떠오른다. 몇 가지 답이 있다. 첫째, 인간은 오로지 물질적 요소들의 기계적 움직임으로 이루어졌을 뿐, 정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극단적 유물론이 있겠다. 한편 의식의 존재는 인정하나 그것은 오직 신체의 기능일 뿐이라는 물질주의적 주장이 있겠다. 셋째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 따르면 정신적 기능을 신체와 단순히 대비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인간은 하나의 전체로서 순수하게 물리적인 기능과 식물적, 동물적, 그리고 정신적 기능을 갖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플라톤주의자들은 인간은 기계적인 신체에 깃들어 사는 정신적 존재라고 생각한다. 순수한 정신으로서 인간은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신체와는 전혀 별개의 존재인 것이다.

 

II. 정신과 신체의 관계와 과학적 물질주의: 인간 영혼에 대하여

물질주의란 정신과 신체의 관계에서 신체를 우선적으로 보는 철학적 입장이다. 어떤 면에서 우선한다고 말하는가? 두 가지 차원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존재의 차원이고, 둘째는 의미의 차원이다. 존재의 차원에서 물질의 운동은 정신적 현상에 선행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신체의 자극과 뇌 물질의 전달이 그것에 상응하는 감각과 정서, 느낌 등을 초래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니까, 이러한 물질적 운동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정신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미의 차원에서, 즉 정신적 세계 안에서 정신은 물질적 신체와 독립된 존재인 것처럼 보인다. , 감정이나 사유, 느낌과 같은 것들은 그것을 이루고 있는, 또는 그것을 초래한 물질적 조건들로 환원했을 때 사라져버리는 것들이다. 물 분자 하나는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로 분해할 수 있지만, 그렇게 환원된 물질은 물의 성질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때, 정신적 영역은 독자적인 관계망과 체계를 갖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인간의 근원적인 공감 능력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인큐베이터에 누운 아기가 옆에 누운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자신도 따라 우는 것을 볼 수 있다. 분명 여기서 찾을 수 있는 물질적 운동은 한 아이의 울음 소리가 공기 중에 전파되어 다른 아이가 그것을 감각한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어떠한 뇌 물질이 그 소리를 들은 아이에게 울음을 촉발한 것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타인의 울음소리를 듣고 항상 따라서 우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어떤 특별한 작용이 있는 것처럼 보이며, 의미의 차원에서 보자면 물질의 운동과는 독립된 것이 있어 보인다.

이렇게 보았을 때, 물질이 정신에 우선한다고 해도 그것은 두 갈래의 함의를 갖는다. 그러나 이 중 하나를 취하고 다른 하나를 도외시할 때 극단적 주장에 빠지게 된다. 존재의 차원만을 고집했을 때 극단적 유물론이 성립하며, 의미의 차원만을 고집했을 때 데카르트 식의 날카로운 이분법이 성립한다. 그러나 이 둘을 서로 평면적인 대립을 이루며 그 대립 가운데에 하나로 통일된 모순적 경향성으로 파악해서도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두 경향은 한 현상을 보는 서로 다른 두 관점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구분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신적인 현상으로 간주하는 것들조차 물질적인 요소만이 그것을 촉발하고 심화시키기 때문이다. 예컨대 뇌에 작용하는 세로토닌, 도파민, 코르티솔 등은 기분 좋음, 행복, 흥분, 스트레스, 슬픔 등등을 촉발시키는 물질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것들이 과잉되거나 부족할 때 사람들은 정신적인 문제를 겪는다. 따라서 의미의 차원으로 구분한 정신적 현상들조차 모두 물질로 환원될 수 있으므로 위의 구분 자체는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조심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신체가 어떤 통일된 경향을 지닌다는 사고를 전제한다. 그러나 유기체는 각각의 부분이 조화를 이루려 추구할, 현실적으로 항상 조화와 통일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우리는 가려움증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가려움증은 신체의 면역 체계와 피부라는 기관 사이에 발생하는 충돌이다. 신체에 위협적인 물질이 침투했을 때 몸은 그것에 대한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그것은 면역체계의 일이다. 그 결과로 몸 안에 있던 독이 몸 밖으로 배출되면서 피부를 자극한다. 신체는 다시 그 가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손발을 써서, 혹은 다른 환경을 이용해 피부를 긁는다. 이 때 가려움이 해소되는 쾌감이 주어지기도 하지만, 피부 조직이 상해 출혈을 일으킬 수도 있으며, 이를 통해 또 다른 유해물질이 몸 안으로 침투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신체가 항상 통일된 질서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생명 유지를 위한 활동 혹은 정신적 활동 모두 그것이 촉발되고 심화되는 과정은 물질의 운동에 의존하고 있다. 이것이 존재 차원에서 물질의 선행성이다. 그러나 이 모든 운동이 하나의 경향이나 질서를 위한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물질 대사에 관계하고, 어떤 것은 항상성 유지에 관계하고, 어떤 것은 생식에 관계하며, 어떤 것은 정신 활동에 관계한다. 따라서 신체 안에서 벌어지는 물질의 운동이 어떻게 기능하는가, 혹은 무엇에 의해 촉발되는가를 들여다보면 그 모든 것들은 서로 다른, 심지어 상반되기까지 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예컨대 가려움증을 두고, 우리의 신체가 모순된 운동을 하고 있다고 단언하는 것보다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경향들이 하나의 신체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더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이 때, 영혼의 문제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현대 서구적 문명에서 영혼이라는 개념은 매우 낡은, 따라서 무효한 개념으로 여겨진다. 또한 종교적 색채가 짙은 말로 굳어지면서 세속주의적 흐름에서 거부된다. 반면 서구 근대의 영향을 받지 않은 문명에서 영혼에 대한 말과 생각과 느낌은 여전히 유의미하다. 영혼은 우리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순수하고, 때에 따라서는 신비스러운 것으로 생각된다. 종종 마음이라는 말과 아주 같은 것으로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러 가지 쓰임에 비추어 볼 때 영혼은 마음과 같은 말이 아니다. 영혼의 문제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인간 개개인이 보편자들의 집합으로 풀어헤쳐지지 않게 담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극단적 유물론은 인간을 물질의 운동이라는 보편자로 환원해버리며, ‘이론적 반인간주의를 표방한 구조주의 철학은 인간을 사회 구조라는 보편자로 환원해버린다. 이는 인간관의 문제로서, 인간의 존엄성 문제나 나아가 사회와 역사에 대한 관점으로 연결될 수 있다. 예컨대 현대 매체가 자주 다루는 것들 중 하나인 인간 복제 문제가 이를 가장 핵심에서 찌르고 있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론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실체론에 따르면 인간 역시 있음으로서의 실체와 그것에 의존하는 여러 속성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인간을 규정하는 속성들은 모두 보편자이다. 예컨대 키가 크다, 살이 희다, 인간이다, 철학자다, 관념론자다 하는 규정성은 그에게만 고유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고유성은 그의 실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의 난점이 있다. 이 실체와 저 실체는 개념상 구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속성의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이 대상과 저 대상을 구분해주는 것은 실정적positive 규정인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스피노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든 개별적 사물에 부여한 실체라는 권리를 유일하고 무한한 실체인 신에게 모두 귀속시켰다. 이는 홉스가 자연 상태에서 개인들이 가진 정치적 권리를 단일하고 절대적인 권력, 즉 리바이어던에게 모두 양도하도록 한 것과 같다. 그러나 권리를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질 수 있는 고체와 같은 것으로 본 홉스의 관점이 권리의 실제와는 괴리가 있는 것처럼, 다시 말해, 인민들이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하고도 여전히 국민투표나 혁명 등을 통해 힘을 행사하는 것처럼, 실체 개념의 권리 역시 스피노자적 환원주의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스피노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를 부정한 것은 각각의 사물이 가진 고유성을 부정한 것이다.

조야한 유비추론에 빠지지 않기 위해 베르그송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베르그송은 물질과 생명으로 나누어진 존재자들이 존재의 관점에서는 하나라고 하였다. , 물질과 생명은 데카르트의 주장처럼 서로 독립적인 두 실체가 아니라 한 존재에 있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경향성이 각각 서로에 대해 우세해진 결과이다. 다시 말해 물질은 존재의 물질적 측면이 우세해진 결과이고, 생명은 반대로 물질적 경향에 비해 생성의 경향이 강해진 결과이다. 따라서 물질이나 생명이나 모두 생성한다. 다만 그 정도가 다를 뿐이다. 이 생성의 운동이 지속이다. 각각의 존재는 시간의 흐름 속에 놓여 있으며, 이 지속은 끊임없이 이질성을 생성한다. 그래서 외관상 같은 두 물체도 완전히 같다고 할 수 없다. 스피노자는 고유성을 가진 개별자가 생성의 단위임을 간과한 채 실체의 권리를 신에게 양도한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각각의 존재자가 생성하는 현존재라는 점이 곧 그것의 고유성을 담보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생성의 개념적 근거가 영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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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쫓겨 쓰느라 뒷 부분이 흐지부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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