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학년도 1학기 서양철학의이해 5차 보고서: 사유(Thinking)

J. M. Bochenski, PHILOSOPHY: An Introduction

 

I. 주제: 사유

사유란 관념과 개념의 움직임(교재 49) 혹은 이행이다. 이 중 과학적 사유, 즉 학문적 사유란 보통의 사유와는 달리 어떤 지식을 목표로 하는 규율된 사유이다. 이 때 우리는 지식의 대상이 되는 것이 우리 앞에 현전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가정해볼 수 있다. 얼핏, 대상이 현전한 경우 우리는 단지 감각기관을 통해 그것을 지각하기만 하면 될 것이나, 대상이 없는 경우에 그것에 대해 감각하려 하거나 사유하려 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지식에 전혀 가까워지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유는 오히려 이 두 경우 모두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첫째로 대상이 현전한 경우, 우리의 감각은 그 대상의 무한히 많은 특성을 한 번에 잡아내어 인식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의 여러 측면을 각각 면밀히 관찰, 분석하고 그것들을 비교함으로써 그것에 대한 지식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활동은 모두 사유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의식에 주어진 현상을 분석, 종합하여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려 하는 현상학적 방법을 활용할 수 있다. 둘째로 대상이 현전하지 않은 경우에도 과학적 사유는 대상을 파악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부재한 대상을 파악하려는 시도를 추론reasoning이라고 부른다. 추론이란 현전한 대상에 대한 파악을 바탕으로 주어진 것에서 주어지지 않은 것으로 나아가는 사유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각과 추론, 이 외에 다른 사유 활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믿음이나 의지 혹은 자유의 도약(야스퍼스)”은 다만 사유의 전 단계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 지식의 원천은 될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추론은 두 종류가 있을 수 있다. 먼저 연역deduction은 하나 이상의 전제에서 결론을 도출해내는 사유의 활동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밀히 말해 지식을 확장해주지는 못할뿐더러 대부분의 추론은 연역이 아닌 귀납추리로 이루어져 있다. 귀납induction은 개별적 사실에서 출발하는 개연적 추론의 형식이다. 대부분의 과학적 추론은 귀납의 형태를 띠며 따라서 오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과학은 필연적 지식의 체계가 아닌 개연적 지식의 체계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과학은 첫째로 실용적 관점에서 볼 때 유용하며, 둘째로 이론적으로 볼 때에도 자연의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 적합하다. 셋째로, 인간적 권위, 예컨대 이데올로기와 과학이 대립할 수 있는데, 이데올로기와는 달리 과학은 항상 열린 체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 , 넷째로, 과학의 체계에 모순되는 자명한 명제가 등장할 경우, 그 이론은 폐기되거나 수정될 수 있다. 끝으로 과학은 오직 그것이 전제하는 영역 안에서만 설득력을 갖는다. 다시 말해 그것이 다루는 특수한 영역 바깥의 사태에 대해 과학은 설득력 있는 주장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예컨대 물질과학의 영역을 넘어선 영혼이나 신 등에 대해 과학은 어떠한 합리적인 설명도 제공하지 못할 것이며, 그것은 철학의 영역으로 남겨질 것이다. 이 마지막 특징을 어기고 과학이 그 자신의 영역을 넘어 철학화하려 할 때 그것은 권위주의적이며 위험한 것이 될 것이다.

 

II. 마르크스의 유물사관

마르크스는 두 가지 큰 전제에서 시작한다. 첫째, 물질적 생산력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달하는 경향을 보인다. 둘째, 경제적 구조의 본성은 생산력의 발달을 통해 이해할 수 있으며, 정치, 사법, 종교, 예술 등의 상부구조는 경제적 하부구조혹은 토대의 본성으로부터 설명될 수 있다. 마지막 전제에서 추론할 수 있는 바,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서 정치나 사법 혹은 종교의 모순은 일차적으로는 경제적인 구조의 모순을 반영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소외Entfremdung’ 개념을 통해 하부구조의 모순이 어떻게 상부구조의 모순을 낳는지 설명하려 한다.

먼저 소외란, 자기가 자신으로부터 낯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헤겔의 개념에서 빌려온 것인데, 헤겔에게서 의식은 자기정립과 자기소외의 두 계기를 통해 변증법적 운동을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에게서 자기소외는 인간이 자신의 인간성, 즉 유적 본질Gattungswesen을 상실하는 계기이다. 유적 본질이란, 개별자 안에서 특수한 방식으로 구현되는 보편성을 일컫는 것으로, 인간의 유적 본질은 인간이 외부의 대상과 관계 맺는 모든 활동을 포함한다.

사유재산 제도 내에서 일차적으로 일어나는 소외는 노동 주체의 상품으로부터의 소외이다. 노동하는 주체는 자신이 생산한 최종 결과인 상품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할 수 없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사유재산이 발생한 노예제에서부터 드러나는 것이다. 또한 근대 선대제 수공업에서 상품을 생산하는 장인은 자본가에게 돈을 미리 투자받는 대신 자신이 앞으로 생산할 상품의 소유권을 자본가에게 모두 넘기는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이후 여러 사람이 분업을 통해 생산에 참여하는 매뉴팩처 양식이 등장한 후 이러한 소외는 두 번째 단계로 심화되었다. 두 번째 소외는 상품의 생산과정에서의 소외이다. 이는 근대 공장제 매뉴팩처에서 잘 드러나는 것인데, 즉 생산과정에 참여하는 노동자는 그 자신이 수행하는 노동이 전체 상품 생산과정에서 어느 부분을 차지하는지에 대한 앎에서 소외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생산노동에서 각각의 생산 부문 혹은 생산 단계는 노동자의 인격적 보편성을 구현하는 것에서 멀어지게 된다.

세 번째는 인간의 유적 본질로부터의 소외이다. 위의 두 가지 계기로 인해 인간 개별자의 노동은 자신의 고유한 내적 능력을 외부의 객관적 형태로 구현하는, 즉 외화Entäußerung하는 인간적인노동에서 그 인간성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사유재산 이전에 인간의 유적 활동으로서의 노동은 이제 비인간적 노동으로 전락하였다. 그 인격성의 빈 자리를 이제는 화폐가 차지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격적인 특수성은 사장되며, 화페의 일반적 속성이 그 관계를 매개한다. 여기에서 네 번째 단계의 소외, 즉 인간의 인간으로부터의 소외가 나타난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개별자가 화폐에 대하여 맺는 관계에 따라 결정되며, 나아가 생산수단과 맺는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는 자본가로, 그렇지 않은 자는 임금 노동자로 분류되며,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사람들은 중간이 아닌 양 극단으로 몰리게 된다. 노동자는 오로지 노동자로서만, 자본가는 오로지 자본가로서만 사회적 관계에 참여한다.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더 많은 임금을 받기 위한 경쟁이 발생하며, 자본가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더 많은 이윤을 위한 경쟁이 발생한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는 억압과 투쟁이 지배한다.

이 네 단계는 앞의 두 계기인 경제 구조에서의 소외가 인간의 정신과 사회에서의 소외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때,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화폐이다. 소외의 과정을 거치면서 화폐는 상품과 상품을 매개하는 역할을 넘어 상품과 인간을 매개하고, 나중에는 인간과 인간을 매개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나아가 인간은 화폐를 통해 사랑, 명예, 용기 등의 덕목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옴으로써 자신이 원래 가진 속성과 다르거나 모순되는 속성을 지닐 수도 있게 된다. 예컨대 돈을 통해 대중매체에 비치는 자신의 이미지를 특정 방향으로 고착화하거나,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기념관을 만드는 식으로 개인은 화폐를 통해 특정한 이미지나 덕목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화폐가 모든 것을 매개할 수 있으며, 인간적 속성까지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믿음이 생겨난다. 이에 모든 욕망은 소유욕으로 변질되며, 나아가 화폐를 소유하려는 욕망으로 귀착된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화폐 물신이라고 부른다. 화폐 물신은 경제적 구조에서 발생한 모순이 상부구조로 드러난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여러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하여 만드는 생산물의 소유권을 소수의 혹은 한 사람의 자본가가 가지는 모순, 즉 사유재산 제도의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아가 마르크스는 이것을 역사의 일반적 원리로 확장한다. 화폐 물신이 발생한 배경에는 사유재산이 있다. 그런데 애초에 이러한 사유재산 제도는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그것은 사유재산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권력을 요청하지 않는가? 역사 속 한 계기로서의 자본주의는 그 이전 시대의 모순을 자신의 시작점으로 삼는다. 중세 봉건제 말기에는 상공업을 통해 재산을 축적한 시민계층이 이전에는 영주들이 살던 성 안으로 들어와 살 권리를 요구하게 되고, 몰락한 귀족에게서 귀족 신분을 사기도 하였다. 특히 프랑스 혁명의 경우 부르주아 출신의 신흥 귀족과, 더 이상 귀족 신분을 살 수 없게 된 부르주아가 하급 성직자를 끌어 들이며 기존의 사회 구조를 뒤바꾸어 놓았다. 이러한 변화의 근본에는 이미 발달한 생산력을 중세의 농노제가 수용할 수 없었던 이유가 놓여있다. 예컨대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과 같은 국가권력의 개입에 의한 자본의 최초의 축적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물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이러한 생산력의 발전이 논리적으로 앞서 있어야 그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이런 식으로 마르크스는 역사의 발전 단계를 원시 공동체 사회,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구획하고 각각의 시대가 다음 시대로 넘어가는 계기의 근본적 원인을 경제적 구조, 다시 말해 생산력의 발전과 생산관계의 변화에 두었다.

한편 그는 근대 자본주의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에 대한 탐구도 하였다. 공장제 매뉴팩처의 특징은 대규모의 기계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기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녹이 슬고 성능이 나빠지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기계를 구입한 후 최대한 빨리 그 효율을 뽑아내려고 한다. 이에 인간의 노동을 기계에 맞추려는 추동이 생긴다. 한편 자본가는 노동자를 고양하기보다는 성능이 좋은 기계를 구입하려는 경향이 크다. 사람보다는 기계가 비용 대비 효율이 높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공장 내 노동자 수는 줄어들고 기계의 비중이 커지게 된다. 이에 노동자들 간의 경쟁이 심화된다. 그런데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윤은 잉여가치에서 나오고, 잉여가치는 오직 노동에서만 발생한다. 이는 노동력이라는 특수한 상품의 특성에서 도출되는 것인데, 다시 말해 다른 상품이나 부품은 결과가 되는 최종 상품 안에 그대로 보존되지만, 노동력은 생산과정에서 소비되면서 동시에 상품에 어떤 특성을 더해주는 생산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장에서 사용되는 노동력이 줄면서 자본의 이윤율은 하락하는 경향을 보이고, 이에 따라 노동 조건이 악화된다.

여기에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과잉생산이 더해진다. 상품의 생산에서 시장에서의 교환과 최종 소비까지 복잡한 단계들이 존재하는데, 이 사이에서 끼어드는 변수들은 매우 많다. 운송 중에 파손되는 물품이 생길 수도 있고, 시장의 선호도에 따라 상품이 팔릴 수도, 팔리지 않을 수도 있다. 한 때 잘 팔렸던 상품이 어느 순간 인기가 식을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상품의 생산과 소비의 과정에는 무수히 많은 우연적 요소가 개입한다. 자본가들이 상품의 소비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얻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며, 자신들끼리의 생산에 관한 정보로 원활하게 교류되지 않는다. 따라서 자본가들은 호황기에 이윤을 늘리기 위해 기계에 투자하고 상품 생산을 늘린다. 그러나 이 경향이 과잉생산으로 접어들게 되면 오히려 과잉생산된 상품은 시장에서 팔리지 않고 창고에 쌓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윤율이 하락하면서 공황이 발생하고, 소자본가가 몰락하거나 전쟁이 발발해 활성화된 군수산업이 파급효과를 일으키면서 다시 공황이 극복된다. 이런 생산의 무정부성으로 인해 자본주의는 주기적인 공황을 겪게 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분석이다.

사유재산으로 인해 발생한 생산관계의 모순은 미시적으로는 화폐 물신을 통해 인간의 인간성을 박탈하고, 거시적으로는 생산의 무정부성으로 인한 주기적인 공황을 낳는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경향이 경제적 양극화를 가속하여 중간층이 몰락하고 결국 생산수단을 가진 부유한 부르주아지와 생산수단을 전혀 갖지 못한 프롤레타리아트만이 남아 대립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 때 프롤레타리아트는 생존을 제외한 모든 것을 박탈당한 존재로 그려지며, 그들의 해방이 곧 인간의 해방으로 이어진다고 주장된다. 마르크스는 이들이 혁명을 일으켜 새로운 사회를 열 것이라 보았다. 기계 그 자체는 자연력에 대한 인간의 승리이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었을 때에는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예속을 심화시킨다는 그의 말로 미루어보아, 이들은 발달된 생산력을 바탕으로 사유재산을 폐지하고 공동 생산, 공동 분배를 기초로 하는 사회를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사유재산 제도에서 모순을 낳았던 점은 상품의 생산은 여러 노동자가 참여하는 과정이나 그 결과의 소유가 소수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인데 생산력의 발달을 되돌릴 수는 없으므로, 생산의 방식을 사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재산의 방식을 사회적으로 바꾸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III. 결론

텍스트에서 저자 보헨스키는 사실적 지식을 추구하는 과학과 인간적 혹은 사회적 권위로서의 이데올로기가 대립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데올로기는 인간적, 사회적 권위에 호소하기 때문에 비합리적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 예로 든 것이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이다. 그러나 여기서 저자가 간과하고 있는 점이 있다. 어떠한 실천적인 관심을 배제한 순수한 앎을 위한 과학은 존재하기 힘들다는 것이며, 모든 이데올로기가 비합리적인 주장에 근거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 맥락에 앞서 저자가 과학의 특징을 말한 첫 부분은 바로 실생활에서의 유용성이다. 과학이란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유용하다는 것이었는데, 실용주의적 관점이란, 지식이 삶의 개선을 위한 실용적 쓰임새를 갖추어야만 참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관점이다. 여기에서는 과학의 실천적 특성을 제시해 놓고 뒤에 가서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또한 실증주의적인 과학 이해에서 볼 때, 과학은 주어진 현상을 설명하고 미래의 일을 예측하는 합리적인 탐구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권위에 호소하는 이데올로기라고 말하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이러한 과학관에 부합한다.

오히려 이 둘 사이에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체계의 개방성의 문제이다. 마르크스의 주장은 내적으로 매우 일관적이다. 이런 면에서 지식을 목표로 하는 규율된 사유에 속한다. 그런데 현실 경험과의 정합성은 여전히 개연적인 것에 머문다. 예컨대 공황에 대한 예견은 역사적으로 옳은 것으로 여겨지나, 공산 혁명에 관한 것은 아직 역사적으로 증명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 이론 자체의 존재가 그것이 대상으로 삼는 사회에 영향을 주고 있으므로 그로 인한 괴리 또한 발생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결정적 속성은 과학의 대상 또한 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관성과 정합성을 배제한 척도는 개방성일 수밖에 없다. 즉 참된 과학은, 그것의 체계에 모순되는 진실이 밝혀졌을 때 그것을 수정하거나 폐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 다시 말해 그러한 사실조차 자신의 체계 안에 포함하려 하다가 결국 내적인 모순을 범하게 되는 것은 참된 과학이라고 할 수 없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위와 같이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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