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에 대한 이론을 중심으로.


1.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은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개별자들은 그것의 원본을 불완전하게 나타내는 복제본이라고 말하였다. 즉, 그에게서 참되게 존재하는 것은 이 세계 너머에 있는 형상eidos 혹은 이데아idea이다.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상 너머의 세계에 실재성을 부여하는 것을 거부하고, 지금-여기에 주어진 개별자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때,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개별자를 실체ousia라고 부른다.

실체는 속성symbebekos을 지닌다. 이런 식이다. 예컨대 소나무는 여러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파리가 사계절 내내 푸르고, 넓지 않고 뾰족한 이파리를 갖고 있으며, 줄기가 굽어 자라기도 하고, 혹은 병충에 시달려 말라 죽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우연적인 요소에 내맡겨져 있다. 소나무의 이파리가 푸른 색이 아니라 노란 색이라거나, 혹은 그것의 줄기가 수직으로 곧게 자라는 것들은 모두 논리적으로 가능한 사태들이다. 예컨대, 당구공을 생각해볼 때, 어떤 것은 검은 색이고 어떤 것은 빨간 색이다. 어떤 공에는 8이라는 숫자가 써 있고, 어떤 공에는 숫자가 써 있지 않다. 아무 것도 없는 당구공에 숫자를 써넣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당구공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즉, 어떤 현상적 존재자가 이 색깔을 잃고 저 색깔을 갖더라도, 혹은 더 커지거나 작아지거나, 굽거나 곧거나 하더라도 그것들을 '떠받치는' 그것은 여전히 그곳에 존재한다. 그것이 실체이다.

실체는 형상과 질료로 이루어져 있다. 형상이란 어떤 사물을 바로 그것이게 만드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형상은 이 세계에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로) 물질적인 재료를 필요로 하며, 그 재료에 깃듦으로써 현상 속에서 자신을, 비록 유한한 방식에서나마 드러낼 수 있다. 형상은 규정이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규정되지 않은 무규정자-즉-무질서chaos로서의 질료를 일정한 방식으로 제한함으로써 형상은 세계 속에서 현상한다. 그러나 형상은 세계에 유한한 방식으로만, 즉 제한적으로만 현상한다.

그것은 질료의 특징 때문이다. 질료는 항상 어떤 규정성을 거부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성질을 지닌다. 예컨대 "한 점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으로서의 원은 현상적으로 불완전하게 그려질 수밖에 없다. 그것을 그리는 사람이 원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고, 그것을 그리는 장비가 충분히 정밀하지 못해서도 아니다. 완벽한 원이 현실 속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은 그 원의 형상을 담아낼 질료가 그러한 규정성을 끊임없이 거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체는 그 안에 두 가지 방향의 운동을 갖게 된다. 하나는 그것이 그것이게끔 만드는 본질 -즉 형상을 더 완전한 형태로 실현하려는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그 규정성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질료적 방식의 운동이다. 그것은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어떤 실체는 그 운동의 어느 한 국면에서 관찰했을 때, 그것의 형상을 일정하게 실현한다는 점에서 바로 이전 상태의 현실태이며, 그러나 형상의 실현되지 않은 부분이 아직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앞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다음 상태의 가능태이다.

이런 운동의 끝에는 형상이 완전히 실현되어 더 이상의 가능성이 없는 '순수 현실태'가 존재한다. 실체는 형상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에서 이 순수 현실태를 목적으로 하여 운동한다. 그래서 어떤 것의 순수 현실태는 그것의 온전한 형상이라는 점에서 형상인이며, 운동의 끝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목적인이다.


2. 스피노자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점처럼 흩어져 있는 개별자들은 실상 '존재한다'는 점에서 같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실체는 어떠한 공통점도 갖지 않는다. 다시 말해, 특정한 실체가 가진 크기, 부피, 무게, 깊이, 색깔, 운동 등의 우연적 속성을 모두 제외하고 남는 것, 그것은 그 실체가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적 개별자들은 그것이 가진 속성에서만 구별될 뿐이며, 그 실체에 있어서는 같다. 즉, 구별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든 개별자에게 부여했던 실체라는 이름을 회수하여 절대적이고 무한한 하나의 존재에 부여한다. 그것은 존립의 근거를 오로지 자신 안에 갖는다는 점에서 자기 원인이며, 따라서 유일하게 참되게 존재하는 실체이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두 가지가 서로에 대해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에 착상하여 정신 실체와 물질 실체라는 이원적 세계관을 구성했다. 그러나 그것 모두 시간 상에서 연속적으로 파악되기 위해서는, 정신과 물질을 넘어선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그 연속성을 담보해야 했다. 그것이 데카르트의 신이며 무한 실체이다. 정신과 물질은 신 안에서 유한한 실체로서 양립한다. 그러나 실체의 엄밀한 정의에 따르면, 정신과 물질은 서로 독립적이기는 하지만 위로 보았을 때 신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참된 실체라고 할 수 없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정신과 물질에서 실체의 지위를 박탈하고, 그것들이 무한 실체인 신을 유한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속성이라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소나무라는 실체가 크기, 색깔 등의 속성으로 표현될 수 있듯, 신은 무한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인간은 그 중 단 두 가지의 속성, 즉 정신과 물질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속성이 현실적으로 드러난 것을 스피노자는 신의 양태mode, 즉 변형태라고 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실체라고 불리웠던 개별자들은 스피노자에게서는 유일한 실체인 신의 양태이다.

따라서 정신과 물질은 서로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두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를 표현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물의 연결 및 질서는 관념의 연결 및 질서와 같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유명한 심신평행론이다. 이렇게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주요한 의미를 지녔던 형상과 질료의 구분 역시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 형상과 질료는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에 각각 대응하여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형상은 질료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우위를 가지지만, 즉 그것을 지배하지만, 스피노자에게서 정신과 물질은 존재론적으로 평등한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어떤 양태는 정신의 측면에서 고찰될 때에는 정신적 형상과 정신적 질료로 이루어져 있으며, 물질의 측면에서 고찰될 때에는 물질적 형상과 물질적 질료를 갖는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서 이것들의 운동은 고찰되지 않는다. 다만 세계는 곧 무한하고 유일한 실체인 신이며, 신은 무한한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는데 정신과 물질은 그 방식들 중 인간이 인지하는 두 가지이다. 양태들은 신의 본성을 필연적이고 결정된 방식으로 표현한다 -스피노자의 세계는 매우 정태적이다. 이렇게 보면, 정신으로 고찰된 개별자의 운동과 물질로서 고찰된 개별자의 운동은 하나의 운동이 지닌 다른 표현일 뿐이어야 한다. 그런데 정신은 바로 이전 상태의 자신을 반성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면서 스스로 운동할 수 있지만, 물질은 과연 그러한 운동을 하는가? 이 점이 헤겔의 시작점이다. 헤겔은 물질은 스스로 운동할 수 없지만, 정신은 매 순간 스스로를 부정하고 새로운 목적을 부여함으로써 끊임없이 운동한다고 보았다.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3. 베르그송

정신과 물질의 날카로운 대립은 해소되었다. 스피노자는 그것이 무한하고 유일한 실체의 본성을 표현하는 두 가지 방식 -즉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맞붙어 있는 서로 다른 방식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은 운동을 설명하기에 불충분하다. 베르그송은 스피노자의 '실체-속성' 구조를 "한 존재-두 질서"라는 양상으로 파악하였다고 볼 수 있다. 잠깐 스피노자로 돌아가볼 필요성이 있다.

스피노자에게 현상적 개별자는 모두 무한하고 유일한 실체가 변형된 양태이다. 이렇게 보면, 신은 모든 개별자와 독립적으로 그것을 초월해서 존재한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개별자가 새로 등장하거나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신은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신은 초월적이면서 동시에 내재적이다"라고 말한다. 내재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개별자와 무한자가 단절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진정한 무한자는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개별자와 무한자를 대립시키는 것은, 무한자를 개별자와의 대립에 의존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개별자는 무한자를 유한한 방식으로 표현하며, 달리 말해 무한자는 개별자 '안에서' 유한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무한자 그 자체는 직접적으로 표현될 수 없다. 왜냐하면 무한하다는 것은 곧 규정지어지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한자는 오로지 유한한 방식으로 유한하게 표현될 수 있을 뿐이다. 이 때, 무한자는 개별자 '안에서' 표현된다는 점에서 내재적이다. 따라서 모든 개별자의 합을 '초월한' 실체의 어떤 잉여분을 상상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베르그송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개별자는 그 존재에 있어 '하나'이다. 그런데 그것들은 생명과 물질이라는 속성을 통해 동등하게 표현될 수도 없고, 또 그것들을 동등하게 '나눠가지지도' 않는다. 어떤 사물은 생명의 특징이 두드러지며, 어떤 것은 물질의 특징이 우세하다. 어떤 것은 운동을 통해 가장 잘 설명되며, 어떤 것은 정지를 통해 설명된다. 베르그송은 생명과 물질이 결합되어 있던 최초의 존재에서, 생명이 우세한 존재와 물질이 우세한 존재라는 두 종류로 분기하는 계기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갈라짐은 불연속적이다. 생명이 우세한 존재는 정신의 관점에서 균형을 이루며, 물질이 우세한 존재는 물질의 관점에서 균형적이다. 동물과 식물을 비교해볼 때, 동물은 운동의 관점에서 다른 모든 기관이 그것에 적합하게 되어 있어 균형적이며, 식물은 정지 상태에서 양분을 섭취하기에 적합하게 되어 있어 역시 균형적이다. 이 단절은 베르그송이 생의 약동e'lan vital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발생한다.

생의 약동은 맨 처음에는 생명과 물질을, 그 다음은 생명 안에서 동물과 식물을, 동물에서는 막시류 곤충과 척추 동물을 분기시켰다고 말한다. 그 과정은 전적으로 내재적이다. 이는 앞서 논의했던 내용들과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생의 약동에 의한 의식의 분화는 초월적 인격신의 창조의 산물도 아니며, 우연한 요인들의 무질서한 마주침의 산물도 아니다. 그것은 생명이 그 자신 안에 갖고 있는 힘에 의한 결과이다. 또한 그것은 시간적인 과정이다. 의식의 분화는 한 순간에 쁌!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생명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특정한 기능을 발달, 완성시켜가려는 과정의 산물이다. 이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조금 조심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은 목적론적 운동이다. 목적론적 운동은 운동의 결과가 논리적으로 미리 주어져 있다. 또한 그것은 항상 특정 운동이 진행되는 미래에 존재한다. 즉, 운동의 목적은 운동의 전 과정을 통틀어 공통적인 미래에 있으며, 또 완벽한 형상이란 질료 없는 형상이며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현실적 운동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그러나 베르그송의 논의에서 생명의 운동은, 첫째로 내재적인 시간을 따른다는 점에서 비-목적론적이지만, 둘째로 특정 환경에 처해 그것에 맞는 기능을 발달시키는 과정에서는, 즉 그 기능의 관점에서는 한시적으로 목적적이다. 이 미묘함을 잡아내야 한다.

베르그송의 존재론은 '하나의' 존재를 상정하고 그것을 개별자의 내재성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와 같고, 생명의 내재적 운동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와 구분된다. 한편, 운동의 전 과정을 하나의 목적이 지배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르다. 또한 개별자의 운동이 그것의 형상, 즉 바깥에서 주어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과는 달리, 운동의 원인을 내재적 힘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또 구별된다. 한편 생명의 힘은 어떤 계기를 통해서 서로 섞여 있던 두 가지 방향을, 서로가 서로를 보존하는 한에서 서로 확연히 구분되는 존재의 두 경향으로 분화시킨다는 점에서 단절적이다. 베르그송의 존재론은 이런 점에서 내재적이며, 도약적이며, 시간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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