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학년도 1학기 서양철학의이해 3차 보고서: 인식(Knowledge)

J. M. Bochenski, PHILOSOPHY: An Introduction

 

I. 주제: 인식

이 장은 고르기아스의 세 가지 명제에서 시작한다: 첫째,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무언가 있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셋째, 무언가 존재하고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다른 이에게 전달할 수 없다. 이러한 질문은 얼핏 보기에 우리의 삶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명제들을 납득하는 순간 삶의 모든 진지함과 세계는 다만 환상illusion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참된 인식의 가능성을 묻고자 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모든 감각적 지식은 의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직사각의 건물이 멀리서는 둥글게 보이고, 아픈 사람에게는 단 것도 쓰게 느껴지는 식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손과 발을 가졌다는 사실이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팔다리를 절단한 사람도 잘린 손과 발 부위에서 통증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편 수학적 지식조차도 완전한 참인 것은 아니다. 지성을 사용한 수학조차도 문제를 인지figuring하는 데에서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다. 데카르트는 감각이 자신을 속일지라도, 속고 있는 자신은 그에 앞서 확실하게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유하는 자아를 가장 확실한 지식의 근거로 놓았다. 그리고 다른 모든 지식 역시 그것에서 연역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생각의 자취를 따라 갔던 많은 철학자들은 그러한 결론이 부당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가 두 가지 서로 다른 것을 혼동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사유된 내용과 사유하는 자신이다. , 세계가 그곳에 있다고 아는 것은 사유된 내용에 대한 지각이다. 그러나 사유하는 자아cogito는 오직 사유함이 있다는 것 외에는 드러내지 않는다. 따라서 자아에서 세계를 연역하려는 시도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르기아스의 명제들에 대해 세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첫째, 고르기아스 자신이 논의 안에 모순을 갖고 있지 않은지, 둘째, 그의 가정이 경험과의 일치 여부를 통해 과연 확립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확정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고르기아스가 부정하는 모든 것이 경험적으로 명백한가를 검증할 수 있겠다.

저자는 이 중 세 번째 질문에 주목한다. 그는 세계는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을 다른 이에게 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명백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곧 세계가 우리가 인식하는 그대로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식은 어떻게 성립하는 것인가?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인식하는 자기 자신보다 더 확실한 존재는 없으며, 그것으로부터 다른 것을 추론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둔스 스코투스의 주장처럼, 세계는 오직 지성을 사용한 지식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 체험까지도 포함해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 역시 난점을 안고 있다. 분명한 것은 절대적 지식에 대한 가능성이 아주 적을지라도 그 가능성은 존재한다는 것이며, 회의주의와는 결코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II. 논의

1. 데카르트와 근대이성론

데카르트는 당대에 행해지던 연금술이나 점성술과 같은 유사과학들의 주장에서 벗어나서, 또 스콜라철학이 별다른 반성 없이 쓰던 형이상학적 개념과 명제들에서 벗어나서 확실한 근거를 가진 지식을 찾고자 했다. 그는 그가 기존에 배워 알고 있던 모든 지식의 확실성을 일단 의심했으며, 그로부터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명석·판명한clear and distinct 명제로부터 다른 모든 것을 연역해 내고자 했다.

첫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감각을 통해 경험하는 사실들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감각을 통해 우리는 자연과학적 지식을 얻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확실한 근거를 가진 인식은 아니라고 한다. 데카르트는 지성적intellectual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본유관념innate idea, 즉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가지며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관념을 근거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다음으로는 지성을 사용한 수학적 지식이 후보에 오른다. 하지만 그것들조차 확실한 지식이라고 하기엔 어렵다. 데카르트는 만약, 인간의 지성 전체를 속이는 악마가 있다고 한다면, 인간은 그에 속아 수학적 지식을 확실하다 믿겠지만 그 연역 체계 전체가 거짓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은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 수학적 연역 체계는 그 안에서 완결성을 지니는 것이지만, 그 체계 자체는 실재와의 어떠한 확실한 연관성도 없다는 것이다.

감각과 지성을 통한 모든 외부적 지식은 그 확실성을 의심받게 되었다. 데카르트는 여기서, 모든 인식 대상이 그 근거를 갖고 있지 않음에도, 그것들을 의심하는 인식 주체 자신은 모든 의심에 앞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의 비유를 이어가자면, 악한 신이 모든 거짓된 지식을 참이라 속일 때, 그 대상이 되는 자신이 없고서는 그러한 속임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이때의 생각하는 자아cogito를 데카르트는 모든 인식의 가장 확실한 근거이자 명석·판명한 존재라고 보았다.

그런데 자아는 인식론적으로는 가장 확실한 존재라고 할 수 있지만, 존재론적으로는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 안에서 명멸明滅하는 생각들은 그 바깥에서 다른 것을 원인으로 가져야 한다. 데카르트는 이 때, 결과가 되는 어떤 것의 원인은 그 결과보다 항상 큰 실재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자아에서 더 많은 실재성을 가지는 존재로 소급하다 보면 가장 완전한 존재, 즉 실재성을 본질로 갖는 신이 연역될 수 있다.

신은 모든 것의 원인이다. 다시 말해 신은 창조한다. 이 때, 세계에는 두 타협 불가능한 존재양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사유하는 자아를 포함하는 정신 실체이며, 다른 것은 연장extension을 본질로 갖는 물질 실체이다. 그러나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라는 뜻의 실체라는 표현과는 달리 정신과 물질은 신에 의존해 있다. 이런 면에서 신만이 유일하게 참된 실체라고 할 수도 있다. 시간적으로 신은 매 순간 창조에 개입한다. 사유하는 자아는 불완전한 존재인 자신 안에 갇혀 있다. 그것이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근거인 신이 역시 다음 순간에도 창조에 개입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연속창조론이라고 한다. 이 때, 객관적 지식의 근거즉 지식의 소통가능성의 근거는 신에게서 나온다.

근대 대륙이성론 철학자로 분류되는 스피노자Benedictus B. Spinoza와 라이프니츠Gottfried W. Leibniz 역시 데카르트의 인식 이론과 몇 가지 점을 공유하고 있다. 첫째로 인식은 순수하게 감각적인 경험만으로는 성립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해석하기 위한 선험적인 관념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고(본유관념Innate Idea), 둘째는 어떤 것의 원인은 항상 그 결과보다 더 많은 실재성을 지닌다는 것이다(충분이유율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

 

2. 둔스 스코투스와 주의주의

스코투스는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신 존재 증명이 연역적인 불완전성을 지녔다고 보았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식을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즉 감각적으로 혹은 지성에 직접 주어지는 개별 사물에서부터 그것의 운동, 능동, 필연성, 완전성, 목적 등의 원인을 역으로 추론하는 방식이다. 스코투스는 이것이 결과의 본성에서 원인의 본성을 추론하는 방식이라며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신의 의지는 동일한 본성을 상이한 결과 속에서 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스코투스는 아퀴나스의 이러한 자연주의적 추론이 신의 초월성과 인간의 자유를 훼손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 모든 사물은 신의 본성에서 필연적으로산출된 것이 아니라, 신의 의지에 따라 창조된 것이라는 것이다. 의지란 합리성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자기결정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오히려 지성에 비해 우위에 있는 능력이다. 스코투스에 따르면 지성은 자기결정성을 지니지 않기 때문에 합리성이란 의지의 활동에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그것의 본래적 의미에 충실한 것이라고 한다.

한편, 창조된 사물을 인식함에 있어 스코투스는 인간이 감각과 지성이라는 두 능력을 지녔다고 보았다. 먼저 감각은 물적material인 반면 지성은 비물질적immaterial이다. 지성이 물질적인 대상을 다루기 위해서는 그것의 이미지를 추출해 내는 과정이 필요하고 스코투스는 이것을 추상화abstraction라고 한다. 이 때, 지성이 사물을 추상하기 위해서는 보편개념이 필요하다. 지성은 보편개념 없이는 사물을 인식할 수 없다. 이 보편개념에 해당하는 것이 고대·중세 철학의 형상eidos 개념인데, 스코투스는 이것을 환영phantasm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추상적 인식abstract cognition은 인식되는 개별자들의 존재 양식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는다. 스코투스는 추상적 인식을 넘어서는 다른 형태의 인식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직관intuition이다. 직관은 보편개념을 매개로 하지 않는 인식 방법이다. 따라서 그것은 지금-여기에 주어진 개별적 사물의 전체성을 그대로 파악한다.

우리의 논의와 연관하여 보자면, 스코투스의 논의는 세계를 인식하는 데에서 지성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직관의 역할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 어떤 개별자의 유적인 특성을 아는 것은 지성을 통해 그것을 특정한 보편개념에 귀속시킴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 존재하는 그것을 전체적으로 아는 것은 그것을 그것으로서 받아들이는 직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직관은 무매개적 인식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예컨대 스피노자는 감각마저 초월하여 신--실체의 전체성을 이해하는 방식으로서의 직관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스코투스는 감각적으로 받아들인 사물을 보편개념의 매개 없이 인지하는 방법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3. 윌리엄 제임스와 실용주의

제임스William James는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를이 때의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는 근대 경험론과 근대 이성론에 제한되지 않는다포함한 전통 철학들이 자신들이 보일 수 있는 논리나 증거 이상의 명제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예컨대 로크, 버클리, 흄으로 이어지는 근대 경험론의 역사에서 그들은 이전 학자가 내세웠던 주장 중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것을 배제하면서 나름대로의 철학을 전개하였다. 그것은 지식의 객관성을 강조한 나머지 그것에 포착되지 않는 주관적 지식이나 감정 등을 배제한 결과이다.

그러나 철학은 순수한 이성과 논리의 산물이 아닌 인간에게서 나온 기질의 결과라고 제임스는 얘기한다. 그는 경험주의와 합리주의가 그 기질의 두 경향인데, 이 두 기질은 서로 모순적이다. 그런데 인간은 한편으로는 실증주의적 태도를 유지하려 하면서(경험주의) 동시에 종교적 가치를 추구하고자 한다(합리주의). 이러한 충돌 사이에서 제임스는 실용성utility을 기준으로 한 실용주의가 그 둘을 중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용주의자로 분류되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인간이 우연한 진화의 산물일 뿐이며, 플라톤이나 크리스트교가 주장하는 인간만의 특수한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만이 초월적인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비주의적 발언에 불과하다. 이로부터 실용주의의 진리론을 해명할 수 있을 것이다.

실용주의는 어떠한 명제 혹은 개념이 대립할 때에 그 중 하나가 참이라면 그것이 수용자에게 어떠한 실질적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이렇게 보면 관념 역시 경험의 일부가 된다. 경험으로서의 관념은 우리 경험의 다른 부분과 만족할 때 참true이 된다. 이 때, 참이란, 개개인의 사적 만족을 의미하는 말이 된다. 이 때, 인간의 객관적 만족이란 것은 없기 때문에, 진리truth란 건강이나 부와 같이 좋음good의 한 종류가 된다.

여기서 제임스는 의지적 인식론voluntaristic epistemology 혹은 주의주의적 인식론을 전개한다. , 인간은 초월적 진리에 대한 탐구가 아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마치 하늘의 수많은 별에서 별자리를 구성carve해내듯, 지식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무naught로부터 진리를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또한 인간성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 우리는 특정한 상황에 처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도구로서의 진리를 요청하며, 그를 통해 우리의 신념beliefs도 함께 성장을 하는 것이다.

 

 

4. 딜타이와 해석학

딜타이는 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삶을 다루기 위해서는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과는 다른 정신과학만의 독특한 해석 방식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것을 이해Verstehen라고 한다. 이 때 역사적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인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 칸트적 자기의식을 넘어 역사적으로 자신을 구성하는 헤겔식의 자기의식이 요구된다. 타자에 대한 이해는 외적으로 주어진 표현들을 자신 안으로 가져옴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먼저 딜타이가 주목하는 것은 삶 그 자체이다. 삶은 몇 가지 잘 정의된 개념과 그것들의 단순한 인과 작용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들은 물리적이 아니라 화학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러한 구조연관은 개체의 삶 속에서 생동적인 것이다. 타인의 삶은 자신의 삶 에 있는 이러한 구조연관을 이해한다면, 그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전이轉移함으로써 역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지성을 통해 대상을 설명하지만, 삶의 경우 우리의 모든 심정을 몰입하여 추후체험Nacherleben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딜타이는 정신과학에서도 객관적 인식을 수립할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삶이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이해되는 것이라는 주장의 배경에는 칸트의 시간론에 대한 딜타이의 비판이 숨어있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묶어 감성에서 주어진 잡다雜多를 범주화하는 선험적 형식이라고 하였다. 딜타이는 그것이 외적인 것을 끌어 내적인 범주로 만드는 것이라고 보았다. , 공간은 외적인 것이며 분할 가능한 것인데 비해 시간은 그와 같은 것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적인 것으로서 의식의 사실로 현실적인 것이다. 그것은 매 순간 질적인 것을 표상하며, 따라서 추상적인 단위로서는 파악될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은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체계이다.

이러한 참여, 즉 체험Erlebnis은 외적인 형식을 갖춰 표현Ausdruck된다. 이 때, 일상적인 삶의 표현양식은 순간적으로 지나가버리기 때문에 다만 직관적으로만 포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 순간의 해석은 다른 순간과 비교될 수 없다. 이에 반해 학문적 표현양식, 즉 작품이나 행위는 지속성을 가지고 주관적인 파악의 조건에서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에 더 넓은 연관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특히 언어를 통해 고정된 삶의 외화는 인간의 내면을 가장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 다른 표현양식에 비해 우위를 지닌다. 해석학은 이렇게 외적으로 끌어내어진 표현에서 다시 체험을 통해 개별자의 내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편 표현으로부터의 체험에 대한 이해는 인간 전반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즉 그의 객관화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는 것이며, 이러한 객관화는 종교, 예술, 학문, 정치 등의 인간의 문화체계를 구성한다. 물론 객관화된 정신을 이해한다는 것이 고정된 점으로서의 삶을 표상하는 것은 아니다. 생동하는 삶과 객관화된 표현 사이에는 끊임없는 순환 작용이 있다. 이렇게 딜타이에게서 삶에 대한 객관적 지식의 확립은 객관화된 문화체계, 즉 역사적 세계상과 그것을 통한 추후체험을 통해 가능해지는 것이다.

 

III. 맺는말

이상으로 인식의 가능성과 방법에 대한 네 가지 견해를 살펴보았다. 먼저 데카르트와 스코투스는 인식의 가능성을 개별적 인간이 아닌 초월적 존재인 신에서 찾는다. 반면, 윌리엄 제임스와 딜타이는 비록 제임스가 개개인의 유용성에서, 딜타이가 개인의 체험이 외화된 객관적 역사 세계에서 인식을 수립할 수 있다고 한 점에서 차이가 생기나 둘 모두 세계 내재적인 척도를 갖는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라고 할 것이다. 이 때, 데카르트와 스코투스 모두 세계에 대한 신의 의지를 강조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인식 역시 그것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특기할 만하다. 데카르트는 가장 확실한 지식의 근거를 사유하는 자아에서 찾기는 하였으나, 그로부터 연역된 실체인 신이 매 순간 창조에 관여하지 않는 이상 인식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하였다.

Leave a Comment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