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학년도 1학기 서양철학의이해 2차 보고서: 철학(Philosophy)

J. M. Bochenski, PHILOSOPHY: An Introduction

 

I. 주제: 철학

저자 보헨스키는 철학philosophy’이라는 단어가 가진 중의성에 주목하여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가리키는지 분명히 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먼저 다른 철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한다. 첫째로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을 비롯한 실증주의자positivists들에 따르면 철학이란 과학적으로 탐구될 수 없는 것들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다.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현대의 분과 과학들에서 다루는 것들이 모두 철학이라는 학문 아래 다루어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의학, 물리학, 심리학, 논리학 등이 철학에서 분리되어 독립된 영역을 가지게 되었듯, 철학의 고유한 대상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가지 반박이 있다. 위 주장에 따르면 현대의 철학은 과거에 비해 더 협소한 영역의 문제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 지금의 철학은 오히려 과거에 비해 더 많은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시간의 흐름을 통해 여러 분과학문이 철학에서 독립하였지만, 동시에 그와 나란한 철학 분야가 생겨났다. 과학철학, 심리철학이나 논리철학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에 대한 두 번째 견해. 이는 여러 분과학문들이 철학에서 독립하였어도 철학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철학은 지성의 한계 혹은 그 너머에 있는 초-합리적인superrational , 개념으로 포착할 수 없는ungraspable 것들을 다룬다. 실존주의자로 불리는 일군의 철학자들이 이러한 견해를 펼치는데, 그들은 철학과 시poetry의 본질적 차이는 없다(장 발; Jean Wahl)거나 철학이란 과학science과 음악의 경계에서 사유하는 것(잔느 헤르쉬; Jeanne Hersch)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철학자는 그의 감정, 의지, 상상 등을 통해 철학을 하며, 철학의 기본적 요소들은 지성이 접근하여 파악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그렇다면 철학에 남겨진 것은 지성의 한계 위에 혹은 그 너머에 있는 것들이 되겠다.

이에 대해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을 비롯한 철학자들은 지성을 사용하지 않은 감정 경험 등은 인식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무언가를 파악하여 지식으로 만드는 것은 항상 인간 지성의 개념화conceptualization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성을 거치지 않은 자료들은 사실 명제, 즉 검증 가능한 경험과학적 명제로 불릴 수 없다.

여기서 저자는 철학사를 통하여 철학자들이 언제나 추구하였던 목표를 환기한다. 그것은 즉 지성의 도움을 통해 실재reality를 합리적으로 해석interpret rationally하고 세계와 삶 속에 명료함clarity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철학은 항상 엄밀한 의미의 학문(science; Wissenschaft, 지성을 통해 대상을 설명하려는 시도)’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철학이라는 학문의 대상이 의문시된다. 철학은 무엇을 탐구하는 학문인가?

크게 네 가지 답이 제시된다. 첫째, 철학은 지식 그 자체의 가능성과 한계를 탐구한다(인식론). 둘째, 다른 분과과학이 있는 것을 탐구할 때 철학은 있어야 하는 것을 탐구한다(가치론). 셋째, 철학은 자연과학natural science과 정신과학moral science가 간과하는 바, 실재 세계의 조건과 근거로서의 인간을 탐구한다(실존주의적 인간학). 마지막으로, 철학은 여타 학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구조를 탐구한다(논리 실증주의). 저자는 각각의 주장을 옹호하는 철학자들이 서로에 대해 배타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네 개의 영역, 혹은 그 밖의 특수한 분과학문에서 독점할 수 없는 문제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예컨대 법칙과 같은 주제가 그에 해당한다. 비단 개별적 주제뿐 아니라 하나의 학문이 그러한 경우도 있다. 예컨대 존재론은 특정한 개별자를 대상으로 취하지 않으며 존재 자체, 실존, 존재하는 것들의 질 등을 탐구한다. 여기서 저자는 크게 세 가지로 철학의 특징을 정리하고자 한다. , 철학은 그 대상의 영역과 탐구 방법에서 제약이 없으며, 관점이 여타의 학문과는 달리 좀 더 근본적이라는 것이다.

 

II. 논의

1. 러셀과 논리실증주의

러셀은 물리학과 같은 실증과학의 명제와 일상 언어의 차이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일상 언어는 충분히 추상적이지 않기 때문에not sufficiently abstract 물리학이 제공하는 것과 같은 엄밀한 설명에 부적합unsuited하다. 이에 러셀은 논리학을 도구로 하여 세계를 더 명료하게 그려내고자 한다. 그는 논리적 이상 언어logically ideal language가 자연 언어와는 달리, 세계의 본성을 오류의 가능성 없이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세계의 사태들state of affairs이 더 작은 단위인 분자적 사태, 나아가 원자적 사태로 쪼개질 수 있다고 보았다. 어떤 물질의 성질을 가진 최소의 단위를 분자, 그것을 이루는 더 기초적인 단위를 원자라고 하듯이 세계의 사태 또한 그것을 이루는 더 작은 단위로 분해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사태에 대응하여 명제 또한 가장 작은 부분인 원자적 명제들의 복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때, 원자적 사태와 원자적 명제는 정확하게 대응한다. 이상 언어는 원자적 사태들과 그것들의 관계를 기초로 하여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논리적 원자론logical atomism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분석의 재료가 되는 사태는 감각 경험으로 주어지는 감각 자료sense data이다. 이 점에서 러셀은 경험론 전통에 서있다고 볼 수 있다. 로크, 흄 등에서 감각 경험이 단순 관념과 그것들의 연합인 복합 관념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러셀은 원자적 사태들이 모여 복합적인 사태물리학의 유비를 이어나간다면, 분자적 사태를 이룬다고 보았다. 세계에 대한 탐구는 이러한 감각 자료를 더 분명한 작은 사태로 쪼개어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때, 철학의 대상이 되는 지식은 어떤 종류로 제한되어 있다. 러셀을 지식을 두 종류로 구분한다. 직접적이고, 직관적이며, 분명하고 오류가능성 없는 지식과 이와는 반대로 간접적이고indirect, 파생적derivative이며, 불분명하고 오류가능성 있는 지식이 그것이다. 전자의 지식은 후자에 비해 더 자명하다self-evident. 따라서 전자의 지식은 상대적으로 근본적fundamental이며, 후자의 지식은 전자에서 파생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러셀은 전자를 앎에 의한 지식knowledge by acquaintance, 혹은 직접지라고, 후자를 기술에 의한 지식knowledge by description, 혹은 간접지라고 부른다. 이 둘은 모두 사물에 대한 지식knowledge of things을 포함하고 있지만 오로지 전자만이 감각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참을 포함한다.

특기할만한 점은, 근대 이성론에서는 경험 이전에 존재하는 본유 관념innate idea이 명석·판명한, 즉 자명한 것이었던 데에 반해 러셀에게는 감각적으로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자명한 것으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이 감각적으로 자명한 것이 실증과학의 대상이다. 이런 면에서 러셀은 실증주의positivism의 전통 위에 서 있다. 여기에서 대상 자체에 대한 지식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것은 간접지의 영역으로 물러나게 된다.

이상을 정리했을 때,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학문의 목표가 진리 추구라는 전제를 더했을 때, 그 대상은 참인 명제에 대한 탐구가 될 것이다. 러셀에 따르면, 참인 명제는 감각적으로 직접 경험될 수 있는 것에 한정된다. 이는 다시 논리적 원자로 환원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복잡한 사태를 그 존재의 특성이 더욱 잘 알려진 작은 단위로부터 추론함으로써 정확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철학의 과제는 각각의 실증과학이 탐구하는 명제들 자체를 검증하는 것에 있다. 왜냐하면 전통 형이상학의 대상들과 같이 감각을 떠나있는 것들은 간접지에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실증주의적logical positivist 입장에서 철학은 그 고유한 영역을 갖지 않는다. 다만 실증과학들이 감각 경험을 해석하는 방식에 오류가 없는지를 판단하는 방법론methodology로서의 가치를 지닐 뿐인 것이다.

 

2. 키에르케고르와 실존주의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지성뿐 아니라 불안, 공포, 절망 등의 정서에 영향을 크게 받으며, 오히려 그것이 인간의 존재 이해에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인간의 실존 양식을 세 단계로 나누었는데: 심미적aesthetic 실존, 윤리적 ethical 실존, 종교적religious 실존이 그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정신적 존재로서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만남 사이에서 자유의지를 갖고 자신의 존재 양태를 결정한다고 보았다. 이 때, 정신이 오로지 시간적인 것에만 머물 때, 인간은 쾌/불쾌에 근거하여 행복을 추구하는 심미적 실존의 단계에 머문다. 그러나 그 결과는 끝없는 불안과 권태, 절망이다. 심미적 실존은 결국 쾌를 추구하지만 결과적으로 불쾌의 상태에 빠지게 되는 모순을 안고 있다.

윤리적 실존 상태에서 정신은 이와 반대로 자신을 영원한 것과 동일시한다. 여기에서의 윤리는 헤겔의 인륜성Sittlichkeit과 유사한 것으로써, 사회적 표준social norm과 관계되는데, 이 점에서 윤리보다는 도덕이 더 적확한 단어일 수 있겠다. 그러나 윤리적 실존 역시 모순을 안고 있다. 여기에서는 개인의 쾌/불쾌를 너머 선과 악의 문제가 제기되며, 사회적인 도덕이 그 표준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는 사회와 국가를 절대시한 나머지 개인을 파괴해버릴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자신으로 돌아와 참된 실존을 찾게 된다.

종교적 실존은 신앙의 역설paradox of faith에서 시작한다. 키에르케고르는 구약의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논리를 전개한다. 아브라함Abraham은 늙은 나이에 신앙에 의해 아들을 얻으리라 믿었고, 아들 이삭Isaac을 얻었다. 그러나 야훼는 아들을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는 순간 신은 이삭을 숫염소로 바꾸어 놓았으며 아브라함의 신앙을 확인하였다. 신을 위해 아들을 죽이는 행위는 윤리적으로는 살인에 불과하지만, 종교적으로는 헌신에 해당한다. 이러한 부조리가 종교적 실존을 가능하게 한다. , 좀 더 높은 가치를 위해 윤리적인 판단을 중지하는 신앙적 용기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인간은 절대적인 것과의 절대적인 관계 속에서, 즉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주체로 서게 된다. 이 단계에서 인간은 윤리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고 상대적으로 파악하게 된다. 다시 말해, 윤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종교적으로 초월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절대적 방편을 통해서 자기 내면 존재에 대한 고유결단을 내리기 때문에 보편윤리를 초월하게 된다.

실존Existenz이란 인간의 고유한 존재방식으로, 자신의 존재 양태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을 이른다. 여기에서 스스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존재 양태의 결정권이 자신 안에 고유하게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결단의 판단 근거가 자신 안에 있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 이후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사르트르Jean P. Sartre 등에 의해 전개된 실존주의는 두 가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지만, 키에르케고르에게는 첫 번째 의미의 고유성만이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 사르트르에게 실존의 과정은 큰 틀에서 같다. 먼저, 인간을 지배하는 정서는 불안Angst이다. 그는 절대적인 것과 마주한다. 그 대면을 통해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 보편적인 것을 극복하고 스스로의 실존을 결정하게 된다. 다만 그 절대적인 것을 키에르케고르는 신으로, 하이데거는 죽음Tod으로, 사르트르는 무rien로 제시하였다는 점이 다르다. 후자의 둘은 모두 비인격적인 것이며, 인간은 그것과 대면하여 각각 자기 자신의 삶(죽음과 대비되는)과 존재(무와 대비되는)로 돌아온다. 이 때, 죽음과 무에 대면한 인간은 자신으로 돌아오는 판단의 근거를 오로지 자신에게서 찾는다. 반면 키에르케고르는 신에 대한 신앙의 결단만을 자신에게서 찾는다는 점에서 앞서 제시한 실존 개념에 상대적으로 덜 충실하다고 할 수 있겠다.

실존주의에서 인간은 온전히 지성적인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철학은 인간을 지배하는 불안 등의 정서를 중심으로 한다. 이 때, 순수하게 지성적인 탐구는 불가능한 것으로 남겨지며 오히려 지성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의 교섭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여기에서는 진리마저도 주관적이고 주체적인 것, 개별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3. 비트겐슈타인과 분석철학

논리 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로 대표되는 비트겐슈타인 전기 철학은 러셀의 언어 그림 이론Picture Theory of Language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첫째,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비트겐슈타인은 일상 언어의 가치를 인정한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일상 언어를 세계를 그려내기에는 오류가 많고 부적합한 것으로 여겨 이상적인 인공 언어를 만들자고 주장할 때, 비트겐슈타인은 일상 언어를 분석함으로써 그것이 그려내는 세계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둘째로 러셀의 주장과 달리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를 이루는 사물-대상object은 경험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인 반면, 사태state of affairs만을 알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러셀에게서는 대상이 모여 원자적 사태를 이루고, 이에 대응하여 단어들이 모여 원자적 명제를 이룬다. 이 때, 러셀은 대상과 원자적 사태 모두를 감각적으로 알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 반면,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사태의 실질적 속성property들은 대상 자체가 아닌 대상들이 모여 배치된 사태에 귀속되는 것이라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명제가 그것이 지칭하는 사태를 정확히 재현한다represent는 생각은 고수하고 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그림의 한계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가 곧 사고의 한계이며, 사고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라고 보았다. 그에게 철학의 목표는 세계의 한계를 밝히는 것이며, 그것은 곧 언어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감각 경험을 통해 참과 거짓을 가려낼 수 있는 명제를 의미 있는Sinn 명제로 보았고, 그럴 수 없는 명제를 비의미적unsinnig 명제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사이에는 진리 값이 항상 참인 동어반복tautology, 항상 거짓인 모순contradiction인 명제들이 있으며 이를 무의미한sinnlos 명제라고 한다. 무의미한 명제는 명제 자체에 대한 명제이기 때문에 사태를 재현하지 않으며, 유의미한 명제와 비의미적 명제의 경계에 위치한다. 윤리, 미 혹은 고전 형이상학의 명제들은 비의미적 명제에 속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직접적인 감각 경험을 통해 참/거짓을 가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 유의미한 명제는 말해질 수 있는can be said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무의미한 명제와 비의미적 명제를 묶어 보여질 수 있는can be shown 명제라고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철학은 후자의 두 명제를 포함하는 영역이다. 따라서 철학은 세계 바깥에 있는 것이며, 세계에 대한 이론이나 설명이라기보다는 활동activity이고 실천practice이다.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사다리에 오르고 사다리를 제거해야 하듯, 철학은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한 다음 침묵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는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칸트의 구분을 떠올리게 한다.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로 대변되는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에서는 이러한 언어 그림 이론이 거부된다. 명제의 의미는 그것이 재현하는 사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쓰임use에 있다는 언어 게임 이론language game theory이 전개된다.

예컨대 건축가가 조수에게 벽돌, 기둥 등의 단어를 외치면서 가져오라고 할 때, 조수는 그 단어가 재현하는 의미를 떠올리지 않고서도 그가 늘 가져오던 돌을 가져온다. 그것은 단어가 그들 둘의 활동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것이 건축가와 조수 둘의 관계가 아닌 더 많은 사람들이 관계된 집단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단어와 사태 사이의 논리적 거리는 더 멀어질 것이다. 현실의 언어는 그런 것이다. 이는 근대 경험론에서 버클리George Berkeley가 지적한 바, 언어는 지시의 기능 외에도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기능을 달리한다는 주장을 이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기를이라는 말을 할 때, 그들은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념을 전달하기보다는 듣는 이에게 권위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 때, 각각의 사용자가 쓰는 단어의 쓰임을 연결할 수 있는 원리가 가족유사성family resemblance이다. , 한 단어에는 그것의 여러 쓰임을 가능하게 하는 기체substratum’로서의 핵심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쓰임이 서로에 대해 갖는 유사성에 의해 연결되어 의미의 범위span를 이루는 것이다. 한 가족은 그 구성원 모두가 공통의 성질을 공유하기 때문에 가족으로 인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딸, 어머니와 아들, 아들과 딸 사이에 서로 다른 유사성이 있고, 그것이 그물처럼 엮여 한 가족의 범주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단어의 의미도 각각의 쓰임들 모두에 공통된 의미를 통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각의 쓰임들 그 자체가 서로의 유사성에 의해 엮인 그것이 단어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후기 철학에서 철학의 역할은 조금 달라진다. 그의 전기 철학에서 철학은 각각의 실증과학의 언어를 의미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분류하고 분석함으로써 오류를 없애고 그 외의 영역에 대해서는 침묵과 실천을 일관하는 활동이었다. 그러나 후기에 철학이란 일상 언어의 놀이라는 활동에 주목하여 그것이 세계를 그려내는 방식을 파악하는, 조금 더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4. 베르그송과 비합리주의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자아에서 시작한다. 자아란 전통적으로 파악되던 공간의 이어짐과 시간의 계속succession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구분에서 자아는 본질과 현상으로 구분되며, 현상들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로서 정태적이고 자기-동일적인 자아가 요청된다. 칸트는 이러한 전통적 의미의 시간과 공간을 인식의 선험적 범주로 설정하고 자아를 그것의 밖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 결과 자유의 근거를 인간 바깥의 물 자체Ding an sich에 두게 된 것이다.

이는 뉴턴 과학의 절대 시간, 절대 공간을 철학적으로 사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이러한 시간 이해는 시간을 공간화하여 사유한 오류라고 보았다. 공간의 특징은 동질화이고 병치juxtaposition이다. , 시간을 좌표계에서 시간 t를 설정하듯 불연속이고 동질적인 것의 계기로 보는 순간 시간의 본질은 훼손되고 만다. 베르그송은 시간은 이질적이며 병치될 수 없는 것들의 상호침투적 연결이라고 보았으며 내적 연속성을 지닌다고 보았다. 그래서 시간은 계기succession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durée하는 것이다. 이 지속은 내적 연속성에 의해 움직이고 변화하는 자료들이며,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이다. 또한 그 지속의 총체가 의식이며 곧 자아이다.

지속은 이질적인heterogeneous 것을 생산해 낸다. 예컨대 어떤 자극이 강도를 두 배, 세 배로 하여 주어진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을 두 배, 세 배 강하게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의식은 각각의 자극을 질적으로 서로 다른 것으로 지각한다. 자아는 항상 바깥의 대상과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 이 때, 의식은 매 순간 서로 겹쳐질 수 없는 이질적인 것들을 표상한다.

한편 그는 당대에 발전된 전자기학을 수용하여 물질 역시 정적인inert 것이 아니라 진동하는 것, 내지는 흐르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렇게 볼 때, 지속과 물질은 모두 흐르는 것이며 한 존재의 두 갈래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식은 생명의 길과 물질의 길이라는 두 질서를 갖게 된다. 생명은 다시 본능과 지성이라는 두 길로 갈라진다. 본능에는 직관intuition과 공감sympathy이 속한다. 이때의 직관은 칸트적 의미의 직관과 유사하다. 칸트는 사물을 인식할 때, 감성의 역할은 직관이고 지성의 역할은 개념적 범주화라고 보았으며, 이 둘의 상호보완을 말하였다. , 개념의 도움이 없는 순수한 직관은 맹목적이며 직관이 결여된 개념은 공허하다는 것이다.

이는 베르그송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나타난다. 베르그송은 지성이 물질을 설명하는 의식의 한 경향이라고 보았다. 즉 그것은 사유 전체의 한 부분일 따름이며, 본능적 인식을 무시하고 한 가지 길만을 고집하는 것은 실재를 파악하기에 적합한 방법이 아니다.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철학자들은 지성의 방법만을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지성의 관점에서 본능은 설명될 수 없는 것으로 남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성은 정지를 통해 운동을, 무를 통해 존재를, 공간을 통해 시간을달리 말해 정적인 것을 통해 동적인 것을 파악하려 했으며, 기계론과 목적론이라는 인간중심적인 사유 경향을 낳았다. 라플라스Pierre S. Laplace의 낙관은 극단적 기계론을 대변한다. 그는 어느 순간에 우주 전체의 에너지 총량과 모든 물체의 위치를 알 수 있다면, 그 다음 순간의 우주의 모든 운동을 추론해 낼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극단적 목적론은 라이프니츠Gottfried W. Leibniz의 모나드monad론에서 드러난다. 라이프니츠는 개체가 활동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그것을 이루는 단자, 즉 모나드에 빈위attribute라는 형태로 모두 들어있다고 보았다. 개체들은 매 순간 자신에게 이미 들어 있는 빈위를 실현할 뿐이며, 개체들의 활동은 신에 의해 예정조화pre-established harmony를 이룬다. , 기계론에서 현재는 과거에 주어져 있으며, 목적론에서 현재는 미래에 주어져 있다. 두 사유 경향 모두 현재를 이미 주어진 다른 것에 종속시키며, 밝혀야 할 것을 이미 전제하고 시작하는 전치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 방식은 대상이 되는 사물의 주위를 돌면서겉면만을 살피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없다. 베르그송은 그러한 지성적 설명을 실증과학에 맡기고, 철학은 오히려 그 대상의 으로 들어가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방법이 직관이며 공감이다. 그것을 통해 칸트가 인식의 지평 바깥으로 미루어 놓은 사물에 대한 절대적 지식absolute knowledge이 가능해진다. 그것은 대상을 양적quantitative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질적qualitative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이러한 방법론은 지성understanding의 한계 혹은 그 너머에 있는 것을 탐구의 영역 안에 끌어오며, 그것을 지성이 아닌 직관과 공감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비합리주의적이다.

 

III. 맺는말

이상 철학에 대한 네 가지 견해를 살펴보았다. 크게 보아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은 지성을 사용한 탐구를, 키에르케고르를 비롯한 실존주의와 베르그송은 지성을 넘어선 탐구를 주장했다고 정리할 수 있다. 러셀과 논리실증주의자에게 철학은 각각의 실증과학이 사용하는 명제를 분명히 하는 것이며, 그를 위해 이상적인 인공 언어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전기에는 역시 실증과학의 언어를 검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나, 전기와 후기에서 모두 일상 언어의 완벽함을 긍정하였다. 후기 철학에 영향을 받은 분석철학은 일상에서 언어가 쓰이는 의미를 좇아 그것이 그려내는 세계를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보편적인 것을 추구하는 지성의 한계를 신앙의 역설을 통해 드러낸다. 보편 윤리는 오히려 개인을 파괴할 수 있으며, 인간은 보편 윤리를 초월하는 신과 직접 대면함으로써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역시 지성적 탐구를, 실존적 결단을 위한 부차적 수단으로 간주한다. 끝으로 베르그송은 지성이 정적인 것을 통해 동적인 것을 파악하려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지속이라는 시간 개념을 통해 그는 살아 있는 실재를 파악하기 위해 지성과 직관 두 가지 방법이 모두 필요하다는 주장을 피력한다.

한편 논리실증주의와 베르그송은 개별 실증과학의 탐구를 보충하고 보완하는 역할을 철학에 부여하였다. 반면, 실존주의와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은 실증과학과 독립된 철학의 고유한 영역을 설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논리실증주의는 개별 과학이 사용한 명제와 언어를 바르게 함으로써 그것들이 세계를 더 정확히 그려낼 수 있게 하고자 한다. 베르그송은 지성적 탐구가 지닌 한계를 직관과 공감이라는 방법을 통해 극복하며 지성적 탐구를 보완하고자 한다. 실증주의에서 철학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활동의 일부이며, 비트겐슈타인에게 철학은 인간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분석함으로써 세계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우리는 논리실증주의에 대해, 철학의 역할이 과연 개별 실증과학의 언어를 검증하는 것에 머무를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 명제를 분명히 하고 언어를 바르게 하는 것은 철학적 탐구의 결과이지 그것의 목표는 아니다. 그것은 끝을 시작에 놓는 전도된 발상이다. 왜냐하면, 특히 과학이 사용하는 언어를 바르게 한다는 것은 어떠한 정합적 체계 안에만 머무를 때에는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논리실증주의에서 사용하는 원자적사태나 명제는 원자론을 기초로 하는 물리학에서 유비된 개념이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에서 모든 입자는 동시에 에너지이며 흐름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설득력 있는 이론으로 여겨지는 이 시점에 우리는 그러한 유비가 과연 유효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한 의문은, 그 타당성의 여부를 떠나, 논리실증주의라는 정합적 탐구의 내적 논리에 충실할 때에는 제기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탐구의 언어를 바로잡는다는 것은 그 체계 바깥의 시선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시선은 논리실증주의적 의미의 철학의 영역 밖에서, 즉 그 대상이 되는 개별적 실증과학에서 탐구되는 것이다.

또한 논리실증주의는 철학과 개별 과학의 위치를 전치시키고 있다. 역사적으로 지성을 사용한 최초의 탐구에서 물리학, 심리학 등의 개별 과학이 독립해 나갈 때, 그것은 경험적으로 더 정확한 방식으로 존재를 탐구하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 철학적 탐구의 목적이 먼저 선재하는 것이고, 개별 과학의 분립은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철학이 본래 목표로 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그것은 세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통찰을 빌리자면, 세계는 있는 것발생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후대의 논리적 탐구가 증명하듯, 있음으로써 순수하게 있는 것도, 발생하기만 하는 것도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있으면서 동시에 발생하는 것을 우리는 생성하는 것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철학은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며, 생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것의 구체적 성격에 따라 우리는 개별 실증과학의 논의를 빌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종합하고 하나의 통찰로 만드는 것은 여전히 철학의 역할이다. 왜냐하면 지성을 통한 사유는 시간적으로 정적인 것을 표상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을 종합하여 생성의 양태를 구성해 내는 것은 실증과학의 영역 밖에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의 연구는 그러한 성격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다. 창조적 진화L’évolution Créatrice에서 그는 진화론 가설과 지속에 대한 그의 논의를 결합하여 정합적 존재론을 구성해 낸다. 여기에서 그는 또한 당대 전자기학의 성과를 참조하여 의식과 물질 모두를 흐르는 것으로 파악하여, 그 둘을 한 존재의 두 질서라는 틀 안에 종합하여 근대적 이원론을 극복하였다. 그러나 그의 탐구는 생물학이라는 개별 과학 아래에서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없는데, 근대 과학의 성과를 철학적으로 종합한 근거가 되는 지속이라는 개념이 그 어느 개별 과학에서 도출된 것도 아니며 순수한 철학적 탐구의 결과에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철학은 기본적으로 사변적speculative이지만, 개별 과학의 성과를 활용하여 더 정합적이고 실재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그려낼 수 있다. 이상의 주장은 저자 보헨스키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다. 다만 그가 철학을 대상과 방법에서 무제약적이고 관점에서 근본적인 학문이라고 한 데에 비해, 나의 주장은 여기에서 개별 과학과 그것과 대별되는 철학의 존재론적 위치를 다시금 확인하였을 뿐이다. , 넓은 의미에서의 철학은 세계 자체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그 대상과 방법에 제한되는 것이 없다. 다만, 그것을 경험적으로 더 엄밀하게 탐구하기 위해 개별 과학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보헨스키가 말한 바, 관점의 근본적radical 성격은 철학과 개별 과학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 개별 과학은 가시적인 경험적 결과에 머물러 더 이상 사유를 진척시키지 못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철학은 언제나 그것의 관점의 타당성validity을 의문에 부치고 검증하는 역할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Leave a Comment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