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에 대해 사람들은 오랜 옛날부터 관심을 가져왔다. 소크라테스는 항상 자신 곁에 다이몬daimon이 있어 자기가 혹시 틀린 말을 하게 되면 다이몬이 지적해주었다고 믿었다. 로마 사람들은 그것을 게니우스genius라고 불렀다. 이 게니우스는 때로는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어주기도 했는데, 이것이 르네상스 이후에 인간 안으로 통합되면서 지금의 '천재' 개념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신탁을 믿었다. 고대 중국에서 점괘는 거북 껍질의 금을 통해 시각적으로 나타났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그것은 사제의 목소리를 통해 전달되었다. 서양의 종교음악은 합창이다.


최근에 들은 현대시론에서는 이 목소리에 주목하여 시적 화자라는 오래된 개념을 주체라는 목소리로 대체하고자 한다. 즉 시적 상황 안에서 대상들의 관계에서 떠오르는 목소리가 바로 주체라는 것이다. 이 주체는 한 시 안에서도 여러 개로 존재할 수 있다. 예컨대, 풍자시의 경우 우리는 시적 언표를 담담하게 읽는 목소리와, 다른 한편 세태를 비꼬는 목소리를 찾아낼 수도 있다. 가까운 예로 한용운의 시에서 여성적 목소리와 구도자, 혹은 독립투사의 목소리를 발견할 수 있듯이 말이다. 화자 모델이 르네상스 시기에 그려진, 하나의 소실점을 갖는 풍경화에 대응한다면, 다수의 주체는 러시아적 역원근법이나 고대 이집트의 정면법, 소실점을 여러 개 갖는 그림 등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한 사람은 여러 목소리를 낸다. 기쁠 때의 목소리와 슬플 때의 목소리는 분명 다른 것이고, 다른 상황, 예컨대 설득할 때, 변명할 때, 화를 낼 때에서도 각각의 목소리는 서로 다르다. 그러니까 하나의 인격체는 그가 내는 목소리에 따라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목소리의 특이한 점 중 하나는 자기가 낸 목소리를 스스로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 기억을 통해 하나의 목소리는 비슷비슷한 모양으로 계열화된다. 인격체란 다시 말해 이 목소리의 계열이 다발로 묶여 있는 형태를 띠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발상은 어떤가? 우리 안에 '있는' 목소리들 중에서 우리가 낼 수 없는 목소리가 단 한 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들을' 수는 있지만 낼 수는 없다. 이것은 전혀 엉뚱한 상상은 아닌 것 같다. 위에서 언급한 다이몬, 혹은 게니우스가 바로 이런 목소리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또 이 특별한 목소리의 현상이 '기분'이라고 이해한다면 우리는 하이데거까지 언급해볼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언제나 어떤 기분 혹은 정조Stimmung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기분은 존재가 우리에게 보내는 일종의 메시지이다. 기분이란 것은 파악하기가 힘들다. 무엇 때문에 생겨난 것인지 알 수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그것에서 아주 벗어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는 어떤 목소리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중용中庸> 제 1장의 첫 구절을 해석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하늘이 명하는 것을 일러 성性이라 하고, 성에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일러 교敎라 한다. 여기서 '성'은 성격, 성품 등의 단어에 들어가는 한자이다. 그것은 우리의 행동의 최종근거이다. 나는 그것을 서양철학적 의미에서 고정된 본질essence이나 본성instinct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고, 어떤 과정process으로서 이해하는 도올의 입장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매 순간 우리의 행동을 최종적으로 근거짓는 '성'이란 것은 하늘의 '목소리'가 된다. 왜냐하면 하늘이 우리에게 '명하는' 것이 바로 '성'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하늘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보통 동양철학에서는 天의 의미를 그 쓰임새에 따라 몇 가지로 나누고 자연으로서의 천이니 도덕의 주재자로서의 천이니 얘기를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자세히 알지도 못할 뿐더러, 이 논의는 그런 구분을 필요로하는 수준에 미치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 얘기는 접어두기로 하자. 철저히 인문적인 관점에서 생각했을 때 하늘의 목소리는 일차적으로는 우리 안의 목소리이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 우리가 단지 듣기만 할 수 있는 목소리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내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부터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이 우리에게 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성'의 존재론적 근거는 우리 자신의 자의적인 기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스피노자의 실체 일원론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 이론에선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 외적 존재를 필요로하지 않는 유일한 실체인 신이 있고, 개별적 사물들은 그 신 안에 있는 신의 변형태, 혹은 양태mode이다. 마찬가지로, 굳이 표현하자면, 기氣의 세계에서 우리라는 개별자들은 기의 흐름 안에 있는 일부일 뿐이다. 이 때의 '신' 혹은 '기', 달리 말해 '전체'라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 '천'이라는 사실을 추론해낼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의 정식을 빌려 표현하자면 이 전체는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것이다. <중용>의 첫 구절에서 '성'은 우리 안에서 나타나는 목소리이면서 동시에 절대적인 존재, 즉 하늘에 근거를 두고 있는 목소리이다. 다이몬이나 게니우스가 다만 개인이나 가정 혹은 도시를 수호하는 수호신이었던 것에 비해 이 논의는 비교적 더 넓은 지평을 갖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이 목소리가 나한테 던지는 메시지에 따르는 것이 바로 '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의 일차적 의미는 '길'이다. 우리는 흔히 삶을 길에 빗댄다. 길의 상징성은 계열이고 흐름이고 진행이다. 우리가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수행하는 행위의 양태 혹은 계열을 '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용> 1장의 다음 구절은 다음과 같다.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도'라는 것은 잠시라도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떼어놓을 수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예컨대 크기 없는 물체를 생각할 수 없고, 음량 없는 소리를 생각할 수 없듯이 '도'라는 것은 어떤 행위의 방식 혹은 양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행위는 그만의 방법과 양태가 있는 법이니까. 이 행위의 방법은 우리 안의 최종근거인 '성'에 의거하고 있고, 이 '성'은 다시 하늘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하늘의 목소리에 따르는 것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도'는 항상 스스로 반성하는 일을 통해 갈고 닦아야 한다. 이 뒤에 나오는 구절을 보자.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기쁨, 노함, 슬픔, 즐거움이 발현되지 않은 것을 일러 중中이라 하고, 발하여 모두 절節에 들어맞는 것을 일러 화和라 한다. '중'이란 천하의 큰 뿌리요, '화'란 천하가 달해야 할 길이다. 감정이 발현되지 않은 상태를 '중'이라 했다. 여기서 '미발'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우리 마음 안에서조차 생겨나지 않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 안에는 있지만 아직 표현되지 않은 상태이다. 각각 살펴보면, '중'을 첫 번째 경우로 생각할 때, 우리는 마음이 절대적으로 고요한 상태를 떠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논의는 앞으로 더 나아가지 않는다. 한편 두 번째 의미로 '미발'을 해석했을 때, 우리는 앞서 본 '성' 개념과 '중'을 연결시켜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태를 맞이하여 우리 마음 속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생겨날 수 있을 텐데, 이 중에서 가장 '적합한' 감정은 바로 '성'에 부합하는 감정일 것이다. 예컨대 초상집에서 웃거나 강의 시간에 소리를 지르는 행위는 상황에 부적합하다.


이것은 누가 판단하는가? 하늘이 판단한다. 다시 말해, 특정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내가 그것에 반응하는 방식, 혹은 그것이 나타난 기분 상태가 바로 하늘의 목소리요 '성'이다. 행위 하나하나가 '절'에, 다시 말해 그 '성'에 들어맞을 때 우리는 그것을 '화'라고 부른다. '화'는 현실적 사태가 아니다. 그것은 "달성되어야 할 길[達道]"이다. 그런데 앞서 하이데거를 언급할 때 말했듯이 이 기분 혹은 정조라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정적positive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negative인 방식으로 어렴풋이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경험과 시행착오를 필요로 한다.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교'이고, '도'를 닦는 것이다. 도를 닦는다고 해서 방안에서 벽만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중용>의 인간은 거리로 향하는 인간이다.


물론 거리에 나가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체험은 반성을 통해 경험이 된다. 그 경험은 몸에 배었을 때 '도'가 된다. 따라서 한 순간도 '도'를 놓치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여기서 <중용>의 저 유명한 구절이 등장한다.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 숨은 것(숨겨놓은 것)보다 더 잘 나타나는 것은 없고, 미세한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은 없다. 따라서 군자는 그 홀로 있음에 [생각과 말과 행동을] 삼가는 법이다. 여기서 나온 단어가 바로 '신독'이다. 앞서 '도'는 행위의 방식이라고 했다. 이 구절에 이르러서는 그 의미가 조금 더 발전하여 '도' 중에서도 '적합한 도'라는 뜻을 내포하게 된다. 말하자면, "사람이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니지" 이런 느낌. 이렇게 변주된 의미는 앞선 구절로 돌아가 새로운 뜻을 울린다.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즉, 이 '적합한 도'는 잠시라도 나에게서 떨어뜨려서는 안된다는 당위가 떠오르는 것이다. 한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그 '도'는 적합성을 잃게 된다. 모든 행위에는 방식과 양태가 있지만 적합한 것은 하나인 까닭이다. 그래서 이 '중'과 '화'를 끝까지 밀고나간다면, 천지가 바로 서고 만물이 자라날 것이라는 내용으로 <중용> 1장은 끝을 맺는다. 전체적인 내용은 개인의 윤리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이는 결코 유아론적인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 논리적 장치가 바로 첫 구절의 하늘이고 마지막 구절의 천지이다.



아래는 <중용> 1장의 구절 전체이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是故 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도야자 불가수유리야 가리 비도야 시고 군자계신호기소불도 공구호기소불문

莫見乎隱 莫顯乎微君子愼其獨也 막현호은 막현호미 고군자신기독야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희노애락지미발위지중 발이개중적위지화 중야자 천하지대본야 화야자 천하지달도야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치중화 천지위언 만물육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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