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다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부분

 

 

I was the shadow of the waxwing slain

By the false azure in the windowpane;

I was the smudge of ashen fluffand I

Lived on, flew on, in the reflected sky.

 

-Vladimir Nabokov, Pale Fire, Canto I, Line 1-4

 

 

상상(imagination)은 절대 결코 재능(faculté)이 아니라, 결국 다만 주어진 것으로서의 유일한 세계 그 자체

 

-루이 알튀세르,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상상(imagination)의 본질은 선취(anticipation)이다. 선취란 미리 가 있음이다. 다가올 미래의 시간을 현재로 미리 당겨 오는 것이다. 기다리는 일이다. 기다림은 가장 아름다운 일이면서 가장 잔인한 일이다. 예상(anticipation)이 무너지는 순간 희망도 기쁨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때로는 미리 가져온 그 기쁨이 고스란히, 혹은 더 큰 슬픔으로 옮겨지기도 한다. “가슴 애리는일이다. 유리창의 거짓된 색채에 죽은 여새(waxwing)의 그림자처럼.

 

또는, 자신의 눈을 찔러버린 오이디푸스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비극적인 운명을 극복했다는 기쁨에, 스핑크스를 무찔러 테바이 사람들을 구원했다는 영웅심에 취해, 선왕 라이오스를 죽인 범인을 반드시 찾아내겠다는 오만에 차 있던 오이디푸스. 그러나 선왕을, 즉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한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스스로 눈을 찌르고 말았다. 그런데 왜 눈인가? 왜 배도 아니고 가슴도 아니고 다리도 아닌 을 찌른 것일까.

 

눈의 상징은 상상이다. 상상은 실재(reality)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은폐한다. 유리창에 비친 푸른 하늘은 진짜이지만 동시에 가짜이다. 그곳으로 날아가려하는 새는 부딪혀 죽고 만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반사된(reflected) 색채 속에서 살아가며 뛰놀 수밖에 없다. 상상이란 주어진 것으로서의 유일한 세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스피노자]. 상상이 없다면 우리는 현재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다[데이비드 흄]. 우리의 삶은 감각과 기억에서 주어진 것에서 출발하여 주어지지 않은 것으로 나아가는 활동을 통해 채워진다. 직접 주어지지 않은 것을, 다시 말해 지금은 없는 어떤 것을 선취하는 것이다. 상상이라는 표상의 세계[칸트].

 

상상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개인적 세계이다. 그 근저는 개인적 욕망의 세계이다. 하지만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캉]. 타인이 자신에게 바라는 것을 내면화하기도 하고, 그것을 통해 타인이 자신을 원해주기를 바란다. 이데올로기라는 사회적 상상이 개인의 내면으로 침투하는 지점이다[알튀세르]. 가족, 학교, 대중매체 등을 통해 전달되는 이 사회적 상상은 사회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은폐한다. 왜 텔레비전 안의 사람들은 항상 웃고 있는가?

 

이 상상이 국가를 넘어서면 그것은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것이 드러내는 것은 어떤 시대, 어떤 지역에서 행해지는, 국가 간의 상호작용의 형식일 것이다[랑케]. 그것이 은폐하는 것은 무엇인가? 국가 간의 경제적인, 그리고 권력의 불평등. 계급 모순의 변형된 형태[마르크스].

 

There was the day when I began to doubt
Man’s sanity; How could he live without

Knowing for sure what dawn, what death, what doom

Awaited consciousness beyond the tomb?

 

-Canto II, Line 173-176, from Pale Fire

 

한편 인간은 죽음을 선취한다[하이데거]. 인간은 타인의 죽음으로부터 자신의 죽음을 상상한다. 인간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 신경증적이다[프로이트]; 존재를 묶는삶이라는 충동(eros)과 그 끈을 풀어내는죽음이라는 충동(thanatos). 둘은 서로 동적인 평형을 유지하려 한다. 이 때 타나토스의 활동이 표면에 드러나는 것이 신경증이다. 에로스는 기쁨이고 타나토스는 슬픔이다[스피노자]. ‘증오란 어떤 대상을 향한 슬픔의 감정. 이 측면이 발전한 것이 우울증, 혹은 멜랑콜리(melancholy)라 할 수 있겠다. “여기 들어오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Lasciate ogne speranza, voi ch’entrate;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지옥편, 37-9).” 희망이란 미래의 불확실한 사건에 대한 기쁨의 감정이고, 그것에 대한 슬픔의 이름은 공포이다[스피노자].

 

But since they cannot arrive at any solid judgement and as the good things of fortune for which they have a boundless desire are quite uncertain, they fluctuate wretchedly between hope and fear. This is why most people are quite ready to believe anything. When the mind is in a state of doubt, the slightest impulse can easily steer it in any direction between hope and fear, though it may be confident, pompous and proud enough at other times.

 

-Benedictus de Spinoza, Theological-Political Treatise

 

희망과 공포라는 정념의 풍랑에서 휩쓸릴 때, 사람들은 어떤 것이라도 믿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이데올로기가 개인에게 침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근거는 바로 감정에 있다. “상상은 주어진 것으로서의 유일한 세계 그 자체.” 그러나 미래는 불확실한 것. 본래 스피노자가 여기서 지적한 ‘anything’은 종교이다. 종교는 지난 시대에 주류적인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Ideological State Apparatus; ISA)였다[알튀세르]. 그런데 이런 설명이 현대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 현대의 주도적 ISA는 학교와 매체인데 말이다.

 

상상 속으로 침투한 이데올로기라는 구조. 우리 죄수들은 이 흑백의 동굴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플라톤]? 상상을 벗어날 수는 없다. 구조의 변혁을 위한 잠재성[들뢰즈]은 개인적 상상에서 사회적 상상을 영역에 있지 않을까? (순수)욕망이라는 잠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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