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학년도 2학기 맑스의 자본론읽기 수업 보고서

 

맑스주의의 철학적 수용

루이 알튀세르의 맑스주의 철학을 중심으로

 

 

I. 들어가며 : 비 오는 날의 맑스주의

비가 온다. 그러니 이 책이 그저 단순한 비에 관한 책이 되기를.”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는 것은 다만 문장 한 줄로도 충분하다.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비의 철학자였다. 그렇다면 그 비는 어떤 비인가? 그것은 허공[공백](le vide) 속에 평행으로 내리는 에피쿠로스의 원자들의 ’(루크레티우스), 스피노자[1632~1677], 또한 마키아벨리[1469~1527], 홉즈[1558~1679], 루소[1712~1778], 맑스, 하이데거와 또 데리다 같은 이들에게서 보이는, 무한한 속성들의 평행(parallélisme)이라는 에 대한 것이다.” 원자들, 허공, 원자들의 빗겨남과 우발적 마주침, 그것들의 응고마주침의 유물론(materialism of encounter)’ 혹은 우발성의 유물론(aleatory materialism; aleatory라는 말은 주사위 놀이를 가리킨다)’이라고 불리는 이 이론은 알튀세르의 맑스주의 철학을 관통하는 주제이다.

이 글에서는 먼저 후기 이론에 해당하는 우발성의 유물론에 관한 알튀세르의 논문을 검토하고, 중기 이론인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Ideological State Apparatuses)와 과잉결정(Overdetermination)에 관한 논문을 각각 살펴볼 것이다. 이후에는 알튀세르의 맑스주의 철학과 맑스주의 철학의 흐름의 관계, 그리고 그것이 우발성의 유물론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에 대해 볼 것이다. 끝으로 그의 이론이 자본에 등장하는 상품, 화폐 등의 미시적 관계에, 그리고 역사 일반에 적용될 수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것이다.

 

II. 알튀세르의 맑스주의 철학

1. 우발성의 유물론 :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

에피쿠로스의 세계관에서 세계가 형성되기 이전에 원자들은 허공 속에서 비처럼 평행하게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평행 가운데 미세한 빗겨남(클리나멘, clinamen)이 생겨난다. 평행궤도에서 빗겨난 원자들이 다른 원자들과 마주침으로써, 그리고 그 중 일부가 응고함으로써 세계는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에서 모든 이유와 목적론은 거부된다. “세계는 기성사실(le fait accompli), 일단 사실이 완성된(accompli) 후에 그 속에 근거, 의미, 필연성, 목표의 지배가 확립되는 그러한 기성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사건은 우발적이고, 모든 의미는 사후적이다.

에피쿠로스의 비는 먼저 하이데거를 통과한다. 그것은 하이데거의 있음의 철학으로 연결된다. 독일어에서 무엇이 있다는 것은 “es gibt ~”라는 말로 표현된다. 직역하면 그것(비인칭 주어)~를 준다’, 다시 말해 무언가가 주어져 있다.’ 하이데거는 세계의 존재이유와 목적(종말)에 관한 질문을 거부한다. 그는 다만 주어져 있는 것 자체, 즉 어떤 것의 현사실성을 사유하며, “세계의 선험적 우연성을 복원한다. 이는 세계의 근거, 목적, 원인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즉 로고스(logos)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유물론적이다.

원자들의 목적 없는 운동은 마키아벨리를 통해 응고한다.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가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적 상황에 대하여 생각했던 바, 즉 분열된 국가를 통일할 인물을 찾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당시의 이탈리아는, 작은 도시라는 원자들이 서로 마주칠 일 없이 평행하게 내리고 있는 상황에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를 통일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이름 없는 인물 안에서 그의 능력(virtú)과 운(fortuna)이 마주쳐야 한다고 보았다. 이탈리아의 응고는 국가와 군주가 아닌 공백’, 즉 변방에서 출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공백에서 출발한 원자를 통해 도시 국가들이 응고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마주침은 지속적인 것이어야 할 것이다.

공백은 또한 전체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세계에서, 혹은 인간에서 출발하여 신으로 올라가지않는다. 스피노자는 신--실체, 다시 말해 신--전체에서 출발한다. 신 바깥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총체이다. 그 안에서 인간의 인식 행위는 인간은 사유한다(homo cogitat)”라는 현사실성으로 제시되며, 목적론이란 인간 중심적인 사유의 상상일 뿐이다. 그러나 상상(imagination)은 절대 결코 재능(faculté)이 아니라, 결국 다만 주어진 것으로서의 유일한 세계 그 자체이다.

두려움은 그 상상의 산물이다. 홉스의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두려워하는 동물이다. 그들은 자신을 보존하려는 힘인 코나투스(conatus)를 갖고 있는 사회적 원자들이다. 그들은 꽉 차 있는 세계에서 자신의 앞길에 공백을 만드는 방식으로, 다시 말해 만인에 대해 투쟁하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은 곧 죽음의 두려움에 이끌려 사회적 계약을 맺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군주에게 양도하는 대신 전쟁상태의 위협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선택한다. “전쟁상태로부터 인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에 의해서만 인민에 연결되어 있을 뿐인 군주와, 이데올로기적 동조의 방식을 포함하여, 전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약속에 의해서만 군주에게 연계되어 있는 인민.” 이 국가는 모든 공포가 방어적이라는 점에서 소멸해야 하는 맑스의 국가와 유사하다.

자연상태의 공백에 대한 논의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루소로 이어진다. 루소는 로크나 홉스가 제시했던 자연상태가 사실은 전쟁이나 평화에 처해있다는 점에서 사실은 사회상태의 투영이라고 보았다. 순수한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마주칠 일 없이 허공을 낙하하는 원자와 같은 존재이다. 사회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마주침이 발생해야 하는데, 여기서 특이한 점은, 마주침의 지속에서 발생하는 언어, 감정, 애정 혹은 투쟁 관계가 축적됨에 따라 인간의 본성이 점점 사회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후 힘센 사람들에 의해 체결된 부당한 계약은 이를 사회상태라는 형태를 취한 마주침으로 만든다. 홉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사회상태는 자연상태로 재추락하는 공포 위에서 유지된다.

이렇게 철학사 속에 은밀한 전통으로 흘러온 마주침의 철학은 모든 본질, 이성, 기원과 목적을, 따라서 모든 질서를 거부하고 분산무질서를 옹호하는 철학이다. 그것은 필연성의 우연성과 우연성의 필연성을 사유한다. 이는 이성의 관념론과 대립하는 유물론이다. 알튀세르적 의미에서 맑스의 유물론은 필연성과 목적론의 유물론이라는 점에서 다만 관념론의 위장된 형태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한 카오스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마주침이 실현되고 나면, 원자들의 마주침은 구조화된 형태를 따른다. 한편 우발성으로 인해 이 구조는 언제든 다른 형태로 바뀔 수 있다. 이것은 후기-구조주의적 사유이다. 요컨대 알튀세르의 마주침의 유물론은 사회의 공시적 구조의 지배를 강조하는 한편 구조의 변혁까지 사유하는 후기-구조주의 철학을 형이상학적으로 근거지우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겠다.

 

2. 기성사실의 구조와 재생산 :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알튀세르는 토대(base; 하부구조, infrastructure)와 상부구조(superstructure)의 범주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맑스와는 다른 입장을 취한다. 그것은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의 정치철학을 잇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과는 달리 알튀세르는 재생산의 관점에서 이 두 구조의 관계를 재설정하고자 한다.

알튀세르가 주목하는 것은 현존하는 생산관계의 재생산(the existing relations of production)”이다. 일차적으로 생산관계의 재생산은 부르주아적 교육에 의해 이루어진다. 중요시되는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직업 수행에 필요한 기술 혹은 능력의 교육이고, 다른 하나는 직업에 순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올바른 행동 규율의 교육이다. 이런 교육은 현존하는 이데올로기 안에서, 그리고 그것의 [영향]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알튀세르의 이론에서 상부구조는 다시 두 단계(levels) 혹은 심급(instances)으로 나뉜다. 하나는 법과 국가를 포함하는 정치-사법적(politico-legal)’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데올로기, 종교, 윤리 등을 포함하는 이데올로기적(ideological)’인 것이다. 이 구조에서도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은 경제적 토대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여기서 상부구조는 상대적 자율성(relative autonomy)과 심급끼리의 상호적 작용(reciprocal action)이라는 특징을 갖게 된다.

먼저 국가에 대해 살펴보자. 알튀세르에 따르면 전통 맑스주의에서 국가는 곧 억압적 국가장치였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국가를 국가권력(state power)과 국가장치(state apparatus)로 나누고, 국가장치를 다시 억압적 국가장치(repressive state apparatus; RSA)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ideological state apparatuses; ISAs)로 나눈다. 전통 맑스주의에서도 국가권력과 국가장치는 구분되며, 계급투쟁의 목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국가권력을 차지하여 부르주아적 국가장치를 해체하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알튀세르의 관점에서 이것은 단지 부분적인 설명에 머무를 뿐이다.

알튀세르가 지적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는 종교, 교육, 가족, 사법, 정치, 무역조합(trade-union), 커뮤니케이션(언론, 라디오, 텔레비전 등), 문화(문학, 예술, 스포츠 등) 등이 있다. RSA와 달리 ISAs는 다수로 존재하며 그 실체가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기능방식에서 RSA가 주로 공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상대적으로 ISAs는 사적인 영역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작동한다. 그 가운데 주목할 것은 바로 학교이다. 가족 이데올로기와 함께, 학교는 어린 아이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도록 가르치며 16세가 되어서는 곧 생산 현장에 투입한다.

한편 본질적으로 이데올로기는 순수한 상상(pure dream)에 불과하다. 이는 앞서 언급한 스피노자의 상상 개념에 대응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역사가 없다.” 이것은 개별 이데올로기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자체를 설명하는 말이다. 그것은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무의식은 영원하다(unconsciousness is eternal)”라는 주장과 맥을 같이한다. 그것은 상상과 같이 주어진 것으로서의 유일한 세계 자체이며, “개인들의 실제 존재 조건의 상상적 관계의 재현(representation)”이다. 왜 인간은 자신의 존재 조건을 표상하기 위해 상상에 갇힐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그들이 처한 물질적 조건이 소외적(alienating)이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이 이데올로기가 단순한 상상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넘어 물질적 존재를 갖는다고 말한다. 즉 이데올로기는 주체(subject)와 실천(practice)에 의해 유지되고 재생산된다. 예컨대, 신을 믿는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 무릎 꿇고 기도하는 행위를 적극적으로 실현함으로써 그 이데올로기를 확고한 것으로 만든다. 개인은 의식적으로 어떤 관념(idea)이 자신에게 영감을 불어넣는다고(inspires), 또 그가 자유롭게 그것을 받아들인다고(freely accepts) 믿음으로써 이데올로기를 실천한다.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들로 호명한다.”

 

3. 축적된 모순의 우발적 발현 : 모순과 과잉결정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에 대한 내용을 우리는 알튀세르의 다른 논문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Contradiction and Overdetermination”이라는 제목의 연구노트에서 알튀세르는 경제적 모순이 그 자체의 힘으로가 아닌 정치적 정황 등에 의해서 촉발될 때에 구조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바, 심급끼리의 상호적 작용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먼저 모순개념에 천착하여, 맑스가 헤겔의 변증법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맑스는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이 두 발이 아닌 머리로 서 있는 전치된 형태라고 말하며 유물론적 변증법을 주창하였다. 그러나 알튀세르의 관점에서 이는 여전히 관념론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껍질에 쌓여 있는 것이었다. 그는 먼저 러시아 혁명에 대해 분석한다.

어떻게 당시 유럽에서 가장 후진국이었던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그 이유는 러시아를 초월해(transcended)’ 있다. 알튀세르는 레닌의 약한 고리(the weakest link)’ 이론에 주목한다. 사슬의 힘은 그것의 가장 약한 고리가 결정한다. 러시아는 서유럽 제국주의 국가 사슬의 가장 약한 고리였다. 따라서 서유럽 국가들에서 발생한 자본주의적 모순이 러시아로 집중되는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순이 축적된다고 해서 그것이 자체적으로, 혹은 내재적인 힘에 의해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 모순이란 결정하는 또 결정되는 층위 혹은 심급의 형식적 조건(formal condition)과 전혀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심급들 간의 상호적 작용을 필요로 한다. 이런 의미에서 맑스적 모순은 항상 원리적으로 볼 때 과잉결정’(in principle overdetermined)된다.

헤겔의 변증법에서 모순은 복잡하다. 의식이 변증법적 상승과정을 거치면서 모순도 함께 복잡화되는 것인데, 이는 의식의 역사가 그것의 과거의 본질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그 과거는 그것이 함축하는 미래의 내적 본질이다. 따라서 헤겔의 변증법에서 모든 변화는 내부적으로 일어나며, 순수하게 외적인 결정(true external determination)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과잉결정되지 않는다. 이 모순이 상대적으로 단순한 형태를 취하기 위해서는 그 역사적 시기의 본질을 구성하는 내적 원리가 단순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단순성은 주어진 역사적 시기의 무한히 다양성을 내적인 정신적 원리로, 즉 종교나 철학적 의식으로,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로 축소하고 환원할(reduce) 때에만 가능하다. 헤겔의 변증법에는 기본적인 단절도 없다. 어떤 시기가 극적으로 끝나거나 시작하는 일도 없다. 헤겔의 변증법은, 물적 기반을 배제한다는 점까지 고려하여, “정신[의 활동]이 정점을 달릴 때에만 옹호 가능한(only defensible from the Spirit’s topmost peak)” 종류의 이론이다.

헤겔의 정신을 물적 조건으로 단순히 대체한다고 해서 변증법이 올바로서게 되는 것은 아니다. 유물론적 설명에서 외화-소외(exteriorization-alienation)나 추상화(abstraction)는 없다. 우리는 예외를 사유해야 한다.

 

If it is true, as Leninist practice and reflection prove, that the revolutionary situation in Russia was precisely a result of the intense overdetermination of the basic class contradiction, we should perhaps ask what is exceptional in this ‘exceptional situation’ and if, like all exceptions, this one does not clarify a ruleis not, unbeknownst, the rule itself. For, after all, are we not always in exceptional situation? The failure of the 1849 Revolution in Germany was an exception, the failure in Paris in 1871 was an exception, the German Social-Democratic failure of the beginning of the 20th century in producing the chauvinism of 1914 was an exception, the success of 1917 was an exception exceptions, but with respect to what? Nothing but the abstract idea (후략).

-Louis Althusser, “Contradiction and Overdetermination”, 1962, 26. 강조는 원문.

 

만약, 레닌주의적인 실천과 반성이 증명하듯, 러시아의 혁명적 상황이 다만 단순한 계급 모순의 강력한 과잉결정의 결과라면, 또 그것이 다른 예외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법칙을 분명히 보여주지 않는다면(물론 그것은 법칙 자체를 얘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런 예외적 상황에서 어떤 것이 예외적인가를 질문해야할 것이다. 1849년 독일 혁명의 실패는 하나의 예외였다. 1871의 파리도, 20세기 초에 독일 사회-민주당의 실패와 그 결과인 1914년의 쇼비니즘도 예외였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의 성공 또한 예외였다. 예외들. 그러나 무슨 관점에서 예외들이란 말인가? 다름 아닌 추상적 관념의 관점에서다. (번역은 필자)

 

맑스와 엥겔스가 이미 지적했듯이, 계급 모순이란 단순하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실제 역사적 상황 속에서 구체화되어야(specified)’ 한다. 그 상황이란, 상부구조의 형태, 그것을 결정하는 내적, 외적 역사적 상황이다. 그렇다면 알튀세르의 이 주장은 맑스의 국가론 속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헤겔과는 반대로 맑스는 사람들의 물질적 삶이 역사를 설명할 수 있으며, 이데올로기와 의식적 측면은 물적 삶[noumena]의 단순한 현상[phenomena]일 뿐이라고 얘기한다. 여기서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경제적 심급, 즉 특정 사회의 생산양식이 반영된 결과이다. 이 때, 생산양식과 생산관계는 하부구조(infrastructure)를 이루고, 국가와 사법, 정치, 이데올로기적 체계는 상부구조(superstructure)에 포함된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 관계는 헤겔 변증법이 이성의 간계에 의해 작동되는 것과 같이 경제적인 이성의 간계(economical ruse of reason)’만에 의해 작동되지는 않는다. 맑스는 여기서 최종 심급에서 생산양식에 의한 결정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과 그것의 특수한 영향력이라는 두 테제를 암시했다.

이 두 가지에 따르면, 맑스적 의미에서의 지양(sublation)’은 변증법적 의미를 탈색하고, 새로이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하부구조의 혁명은 그 자체의 이유로는(ipso facto), 다시 말해 직접적으로는 현존하는 상부구조, 특히 이데올로기를 변형하지 않는다. 둘째, 혁명에 의한 새로운 사회는 이전의 상부구조를 어느 정도 존속하고 재가동할 것이다. 볼셰비키의 이념과는 배치되는 스탈린의 범죄와 억압은 이렇게 과잉결정을 사유하지 않고서는 설명될 수 없을 것이라고 알튀세르는 말한다.

 

4. 다시 우발성의 유물론으로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앞서 소개한 부분이 우발성의 유물론을 계보학적으로 탐구한 전반부인데 비해, 후반부에서 알튀세르는 우발성의 유물론을 통해 맑스를 사유하고 있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돈 많은 사람과 프롤레타리아의 마주침의 응고에서 발생하였다. 이런 마주침은 사실 그 이전에도 여러 번 일어났었다. 18세기와 19세기 포 강 유역의 이탈리아 국가들에서는 돈 많은 사람들, 테크놀로지, 숙련인력이 모두 있었으나 그들은 자본주의적으로 응고하지 않았다. 알튀세르는 가능한 생산을 흡수할 내부시장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을 들어 이를 설명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맑스가 지적하는 것과는 달리, “대공업의 산물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금융적 축적, 생산의 기술적 수단들의 축적, 생산 소재의 축적 이전에 그것들과 마주치지 않고 떠다니는상태로 존재했다. 이 요소들은 모두 각자가 역사적 산물이며, 서로 다른 것의 산물이거나 목적론적 산물이 아니다.

모든 생산양식이 서로 독립적은 요소들로 구성된다는 사실은 자본의 이른바 시초축적(so-called primitive accumulation)에 관한 장을 다룬 알튀세르의 논의에서 잘 드러난다. 영국의 경우에서, 농민들이 생산수단을 박탈당한 사건과 도시 노동자가 대공업으로 흡수되는 사건은 전적으로 외적인 사건이다. , 이 과정은 비목적적이며, 우발적이다. 그러나 맑스는 이 우발성을 옆으로 치워두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자본주의적 확대재생산이 아닌 생산과정으로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부르주아에 대한 맑스의 이론도 신비주의적이다. 맑스의 테제에서 부르주아는 봉건적 지배계급의 적대자로 등장한다. 봉건적 지배구조가 해체되고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것이 부르주아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부르주아지는 봉건제의 대립자가 아닌 그것의 정점, 완성이라는 주장을 내세운다.

알튀세르에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하나의 구조이다. 또한 그것은 원자들의 마주침이 응고된 상태이다. 그 원자들은 앞서 언급된 바, 부르주아, 프롤레타리아, 생산수단, 내부시장 등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결과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기원에 관한 맑스의 설명을 비판하면서 알튀세르가 강조하고자 했던 점은 그것이다. 이 요소들은 구조에 선행한다. 이는 맑스가 주장했던 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특수한 시기에 국한되는 생산양식이라는 테제를 더 철저하게 발전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한편 이 구조, 즉 생산관계는 부르주아적인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의해 재생산된다. 이 생산관계의 상상적 재현을 통해 개인들은 스스로를 주체로 여기게 되며, 생산관계의 실재는 은폐된다. 그러나 이 모순은, 충분히 축적된 이후에, 국가 외적인 상황과의 마주침을 통해 과잉결정된다. 이는 마키아벨리의 논의에서, 군주 내부의 능력과 외부의 운이 마주쳤을 때 이탈리아의 통일 과업이 달성될 수 있는 것과 같다.

 

III. 맺는 말

알튀세르의 유물론은 헤겔적 의미의 관념론을 전복하려는 맑스의 시도를 이어받은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그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맑스의 분석에서 나타난 목적론적인, 혹은 종말론적인 경향을 수정하고자 하였다. 그 시도가 바로 우발성의 유물론이다. 그는 기성사실의 기원을 필연적인 방식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에서 벗어나서 허공을 떠다니는 요소들의 우발적 마주침을 사유했다.

그는 기성사실이라는 구조가 어떤 필연성에 의해 형성되었는가라는 질문에서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를 재생산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옮겨갔다. 기존의 맑스주의 국가론에서 다만 부수적이고 피상적인 위치만을 갖고 있던 상부구조에 대한 조명이 여기서 이루어진다. 알튀세르의 논의에서 상부구조는 상대적 자율성을 갖는다. 그것은 상상을 통해, 자세히 말해 생산관계의 실재를 상상적으로 재현함으로써 계급모순을 은폐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 상상은 자본에서 다뤄지는 상품물신, 화폐물신, 노동물신 등의 물신론(fetishism)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상품물신이 상품에 내재된 사용가치와 가치의 모순을 은폐하는 것처럼,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생산관계의 모순에 따른 계급모순을 은폐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지 역시 이런 이데올로기에 종속되는 것으로 보인다. 자본3권에서 이윤에 대해서 다뤄지는 바와 같이, 부르주아지 역시 그들만의 상상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윤이란 잉여가치가 전화된 형태에 불과하지만, 자본가 계급에게는 그것이 은폐된다. 즉 상품가치의 구성의 실재가 불변자본의 감가상각액(c) + 가변자본(v) + 잉여가치(s)로 이루어지는 반면, 자본가의 관점에서 그것은 비용(k)과 이윤(p)의 합으로 단순화되어 제시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윤율 저하 현상은 설명될 수 없는 영역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잉여가치의 발생과 증감은 그것의 원천인 가변자본(, 노동)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반면, 자본가의 관점에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차이는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은 알튀세르의 과잉결정 이론에서도 나타난다. 사실 과잉결정이라는 용어는 과소결정(underdetermination)’과 쌍을 이루는 말이다. 과소결정이란 혁명이나 이행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들에 의한 모순의 결정을 뜻한다. 과잉결정이 유럽 국가들 중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하지 않는 낙후된 지역인 러시아에서 어떻게 혁명이 일어났는가를 사유하기 위한 것이라면, 과소결정은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한 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앞서 다룬, 이데올로기에 의한 생산관계의 재생산과 관계하여 사유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족이지만, 이 글에서 과잉결정론보다 과소결정과 관계된 이데올로기론을 순서상 먼저 다룬 이유는, 알튀세르 철학에서 구조의 지배보다는 구조의 변혁에 중점을 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구조주의적인 면보다는 포스트-구조주의적인 면을 부각하고자 함이었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에서 이어진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바디우(Alain Badiou, 1937~)의 국가론으로 발전되는 것으로 보인다. 바디우는 상황상태(l’état de la situation)’라는 개념을 통해 알튀세르의 국가론을 수학적 존재론으로 계승한다. 바디우에 따르면 모든 상황은 다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에서 일자는 이 원소들을 동질화한 뒤 다시 그것들의 부분집합을 셈한다.’ 이 셈의 셈, 다시 말해 구조의 구조가 바로 상황상태이며, 이 안에서 모든 상황은 직접적으로 현시되지 않고 재현(représentation)’된다. 그리고 이 상태(état)는 곧 국가(Etat)와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바디우의 재현 개념은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상상 개념과 비슷해 보인다.

한편 이 상상 개념은 맑스주의 철학의 두 흐름을 잇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 두 흐름이란 프로이트-맑스주의와 스피노자-맑스주의이다. 프로이트-맑스주의에서 강조했던 것은 바로 정신적인 면,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유지하는 무의식적 구조였다. 이는 알튀세르에게서 ISAs 이론에서 이데올로기를 강조한 측면으로 구체화된 것처럼 보인다. 이 때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심급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서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위치한 전의식과 비슷한 지위를 갖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과잉결정이라는 개념 자체도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차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볼 때, 알튀세르는 한 편으로 프로이트적 전통에 서 있다. 한편 스피노자-맑스주의의 주제는 인권의 정치이다. 스피노자가 에티카1부 부록에서 말했듯 인간은 상상이라는 세계를 통해서만 부분적으로나마 실재를 인식할 수 있다. 여기서 상상은 실재를 드러내는 동시에 은폐한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뒤에 자신의 눈을 찌른 것은 바로 눈의 상징, 상상이라는 상징성을, 그리고 그것에 포함된 모순을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맑스주의의 문제설정은 이러한 상상에 의해 은폐된 생산관계의 모순을 사유하고자 함에 있다. 이런 측면에서 스피노자-맑스주의는 실천적 이론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 이는 알튀세르에게서 ISAs 이론에서 이데올로기의 상상적본질을 강조한 측면으로 나타난다. 사태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인간의 가장 사적인 영역인 가족까지 지배하고 있다. 알튀세르가 적고 있듯, “국가 안에 존재하는 모든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 중에서도 가장 끔찍하고, 지독하고, 소름끼치는 것은 바로,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이다.”

ISAs 이론에서 드러나는 알튀세르의 이론은 오히려 구조의 확고한 지배를 인정하는 쪽에 가까워 보인다. 마키아벨리에게서 이탈리아를 통일할 군주는 제도권이라 칭할 수 있는 곳이 아닌, 이름 없는 공백에서 등장한다. 반면 알튀세르의 군주는 등장할 곳이 없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가장 사적인 영역까지 지배하려 하고 있고,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상상과 실재라는 이분법을 조금 더 완화시킬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는 라캉의 ‘RSI 이론을 접목함으로써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이론은 실재계(the Real)’-‘상징계(the Symbolic)’-‘상상계(the Imaginary)’의 삼원적 구조로 세계를 설명하고자 한다. 즉 알튀세르의 상상개념은 다시 기성사실의 구조인 상징계와 개인적 욕망의 공간인 상상계로 세분화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상징계에 속하며, 개인들을 주체들로 호명함으로써 상상계까지 지배하려하는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때, 구조를 변혁할 수 있을 잠재력의 근거는 이 상상계라는 공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모순과 과잉결정이라는 테제가 생산관계의 구조와 혁명이라는 거시적 차원뿐만 아니라 상품과 화폐 수준의 미시적 단계에서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과잉결정은 물질적 모순과 상부구조의 상호적 작용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상품에서 나타나는 물적 모순은 상품의 사용가치와 가치 사이의 모순으로 볼 수 있을 것이고, 여기서의 상부구조는, 앞서 언급했듯, 상품교환과 상품물신으로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순은 노동력이라는 특수한 종류의 상품 내에서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분할로 표면화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잉여가치의 축적이고 자본의 재생산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알튀세르의 과잉결정 이론은 이 수준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 또 그것은 상품물신 이외의 다른 종류의 물신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 것인가? 이는 물신이론과 관련하여 앞으로 탐구해 보아야할 주제로 남을 것이다.

끝으로, 나의 현재 전공과 관련하여 볼 때, 알튀세르의 우발성의 유물론, 이데올로기론, 과잉결정 이론이 역사를 설명할 수 있는 일반이론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또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탐구하고 싶다. 지금까지 논문 세 편을 통해 살펴본 것은 알튀세르의 이론들이 하나의 구조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국제적인 관점에서 다수의 주체가 서로 물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 안에서 알튀세르의 이론은 얼마나 큰 설명력을 지니게 될 것인가? 예컨대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주도이념(die leitende Idee)’ 개념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국제적(international)’ 변용(variation)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주도이념이란 헤겔의 결정론적 진보사관을 비판하기 위해 랑케가 내세웠던 개념인데, 모든 시대는 그 시대가 작동하는 고유한 지배적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중세 유럽에서 교황의 (상징적) 지배는 그 시대의 고유한 주도이념이었다. 이는 어떤 면에서 초-국가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국가적(inter-national)’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개념을 통해 현재 시도되고 있는 트랜스내셔널리즘(transnationalism) 역사학에 접근하는 것도 유의미할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이러한 상황에서의 과잉결정은 어떤 것인가? 의문은 꼬리를 문다.

처음 알튀세르의 우발성의 유물론에 주목한 것은 그것이 형이상학적으로, 특히 존재론적으로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이단적위치 때문이었다. 그러나 알튀세르를 공부하면서 그 이단적 이론이 실재를 얼마나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다. 사변철학이란 일반적 관념들의 정합적이고 논리적이고 필연적인 체계를 마련하여, 그를 통해 우리 경험의 모든 요소들을 해석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알튀세르의 이론은 이러한 시도에 적합해 보인다. 나는 희망을 걸어본다.


IV. 참고문헌

1. 단행본

루이 알튀세르, 철학과 맑스주의, 서관모·백승욱 옮김, 새길, 1996.

윤소영, 알튀세르의 현재성, 공감, 1996.

진태원 엮음, 알튀세르 효과, 그린비, 2011

Alfred North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Corrected Edition, ed. David Ray Griffin, Donald W. Sherburne, NY : The Free Press.

Louis Althusser, L'avenir dure longtemps (suivi de Les Faits), ed. Stock / IMEC., 1992, 2007.

 

2. 논문

김기봉, 랑케의 ‘wie es eigentlich gewesen’ 본래 의미와 독일 역사주의, 湖西史學39.

변상출, 에드워드 톰슨의 알튀세르 비판의 실제, 철학논총74집 제 4, 2013.

서용순, 알튀세르와 바디우 : 정치적 주체성의 혁신을 위하여, 사회와 철학20, 2010.

진태원, 스피노자와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 상상계라는 쟁점, 근대철학31, 2008.

홍준기, <주체 없는 과정> 인가, <과정으로서의 주체>인가: 정신분석학과 알튀세르, Journal of Lacan & Contemporary PsychoanalysisVol, 5 No. 1 Winter, 2003.

Louis Althusser, “Contradiction and Overdetermaination”, 1962.

Louis Althusser, “Ideology and Ideological State Apparatus”, 1970.

 

3. 웹사이트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http://plato.stanford.edu/entries/althusser/

Wikiquote, http://fr.wikiquote.org/wiki/Louis_Althusser



주석은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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