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책 읽어주는 남자><오뒤세이아>

-영화 속의 <오뒤세이아> 영향 관계 파악하기

 


I. 들어가며 : 방황하는 자들의 폴리포니

사람들은 호메로스의 주제가 귀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오뒤세이아>는 유랑에 대한 책이다. 집이라는 곳은 다만 [돌아가고자] 꿈꾸는 곳이지(Everyone believes Homer’s subject is homecoming. But in fact, The Odyssey is a book about a journey. Home is a place you dream of; 번역은 필자).” -영화 중에서.

<오뒤세이아>는 상실한 자의 이야기이다. 집을 상실한 자의 유랑하는 이야기이다. 상징성으로 보면 그것은 마음 둘 곳 없이 방황하는 자의 이야기이다. 영화 <책 읽어주는 남자>에는 여러 명의 오뒤세우스가 등장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비슷한 선율들이 시간차를 두고 등장하며 진행하다가 함께 모이는 다성음악처럼, 어느 지점에서는 함께 울리기도 하고, 어느 지점에서는 서로 어긋나기도 하며 하나의 큰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영화 <책 읽어주는 남자>방황하는 자들의 폴리포니(polyphony)’라고.

 

II. 오뒤세우스들 : 마주침, 어긋남, 울림

앞서 언급했듯, 이 영화에서 오뒤세우스들이 등장하는 양상은 다양하고 복잡하다. 우선 본 절에서는 주인공 마이클과 한나의 관계에 주목해, 그와 관련된 세 가지 양상만을 살펴볼 것이다. 키워드는 상실’, ‘방황’, ‘안정(정착)’이다.

 

1. 1958: 마주침, 짧은 만남

마이클 버그, 15. 한나 슈미츠 36. 옷을 깔끔하게 차려 입고 다니는 마이클의 가정은 의외로 엄숙하다. 식탁에는 늘 정적이 흐르며 가족끼리 보통 주고받는 개인적인 이야기조차 오가지 않는다. 마이클에게 집은 이 아니다. 한나 슈미츠는 독신의 여성이다. 언제나 제복을 빳빳하게 다려 입고, 말을 길게 하지 않는다. 그녀가 브래지어까지 다림질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일종의 강박증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 그녀의 상실감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둘의 마주침은 우연했다. 구토 증세를 보이며 거리에 앉아있는 마이클을 발견한 한나는 그를 집까지 바래다주었고, 후에 마이클은 사례 차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둘의 우연한 마주침만남으로 응고할 수 있던 계기가 있었다. 한나가 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훔쳐보고는 며칠 후에 마이클이 다시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던 것이다. 둘의 관계는 급속하게 육체적 관계를 맺는 사이가 되었고, 마이클은 여기서 가정을 대체할 안정감을 느낀다.

한편 이 관계를 한나의 시각에서 볼 수도 있다. 둘의 일과는 육체관계 후에 마이클이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는 식이었지만, 어느 순간 한나의 요청으로 그 순서를 바꾸게 된다. 마이클이 책을 읽어주는 것에서 한나가 일종의 위안을 얻는다는 사실이 이 장면에서 암시된다. 책의 슬픈 대목에 이르러 한나가 마이클에게 안겨 울고 있는 컷신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안정감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한나가 갑자기 어디론가 떠나버림으로써 둘의 만남은 갑작스럽게 중단되어 버린다.

 

2. 1966: 어긋남, 사후적 충격

마이클 버그, 법대생. 한나 슈미츠, 전범 재판 피고인. (Röhl) 교수가 주관한 특별한세미나에 지원한 마이클은 나치 전범 재판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기소된 10명 남짓의 피고인 중에 한나가 있었다. 죄목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나치에 협력했다는 것.

계속된 증언은 한나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이 제시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경비(guard)로 일할 당시, 한나는 어린 아이들을 따로 모아 자신에게 책을 읽어줄 것을 요구했었다는 것이었다. 또 당시의 책임을 뒤집어쓰면서 한나는 필적 확인 작업을 거부한다. 여기서 한나가 문맹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한나의 방황이 시작된 지점.

그러나 여기서 마이클은 한나에게 다가가는 대신 도피하는 것을 선택한다. 한나가 사실 글을 읽고 쓸 수 없다는 사실은 재판 결과를 뒤집을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그는 끝까지 침묵을 지킨다. 또한 한나와의 면회를 신청해놓고는 끝내 그 자리에 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나가 나치 협력자였다는 사실에, 나아가 자신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다는 모습에 마이클은 혼란을 겪는다. 이를 통해 과거의 경험이 트라우마틱하게 새롭게 해석되고 이 둘은 다시 한 번 어긋난다.

 

3. 1976: 울림과 엇갈림

마이클 버그, 판사. 한나 슈미츠, 수감자. 10년 뒤, 마이클은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아내와는 이혼하고 어린 딸과 함께 살고 있다. 그러다 갑자기 어머니를 방문하게 되는데, 그는 옛 집에서 자신이 한나에게 읽어주던 <오뒤세이아>를 발견한다. 한참 생각에 잠기더니 그는 <오뒤세이아>를 녹음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카세트 테이프를 모아 한나에게 보낸다. 10년 동안 회피해왔던 기억에게.

테이프를 매개로 둘은 다시 연결된다. 한나는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마이클은 밤낮 모르고 책을 읽어 녹음한다. 그러나 마이클은 정작 과거의 아픈 기억을 마주하지 못한다. 한나의 편지에 답장을 하지도 않고, 한나가 출소한 뒤 그녀를 보살펴달라는 전화에 미온한 답변만을 한다. 한나를 면회 가서도 그녀를 위해 직업 자리를 알아봤다, 방을 구했다 정도의 형식적인 대화만을 나눈다.

한나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기억과 화해하게 된다. 오랜만에 만난 딸에게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고 살았노라고 고백한다. 그는 한나의 유언에 따라 그녀가 모은 돈을 아우슈비츠 생존자와 그 후손들을 위해 쓰기로 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그가 한나의 묘지를 방문해 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으로 끝난다.

 

III. 결론 : 불완전마침

그러나 이 폴리포니는 불완전마침으로 끝을 맺는다. 한나가 자살한 동기를 우리는 알 수 없고, 마이클 역시 여전히 정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맨 처음에 배치된, 그의 불안정한 생활 모습은 이런 방황이 끝없이 순환, 반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듯하다. 정착할 수 없는 영원한 방황. “집이란 곳은 다만 [돌아가고자] 꿈꾸는 곳이지.”

한편 더 넓은 시각으로 이 영화를 보는 사람도 있다. 이 글에서는 마이클과 한나의 주선율에 집중하다보니 보조적 선율을 놓치게 되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서길완, <더 리더-책 읽어 주는 남자> : 홀로코스트와 사후기억세대, 문학과 영상, 2011 봄이 참고된다. 이 글에서는 한나와 마이클, 그의 딸 줄리아의 단절과 화해를 통해 이 영화의 사회적 함의를 찾아내고 있다. 여기서 오뒤세우스들은 전쟁세대, 사후기억세대, 그리고 3세대라는 얼굴로 등장한다.



첨언---

영화 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그래서 역사는 언제나 폴리포니다. 마주치고, 함께 울리고, 그러나 결국 불완전마침으로 어긋나버리고 마는.


20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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